[11. 검수지옥 (1)]
이번 시련은 시작부터 뭔가 이상하다.
수락밖에 존재하지 않는 ‘후원 미션’을 던져주질 않나.
뭔지도 모르는 ‘야누스의 출입문’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자동으로 이번 시련에서 탈락한다지 않나.
게다가 정작 제일 중요한 시련의 클리어 조건은 4일 뒤에나 공개한다니.
물론 ‘클리어 조건이 4일 뒤 공개된다는 것’과 ‘후원 미션을 4일 안에 클리어하라는 것’을 결부해 보면, ‘야누스의 출입문’을 통과하는 것과 시련의 클리어 조건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건 금방 눈치챌 수 있긴 하다. 그 점을 눈치챘더라도 그 외에 별다른 정보가 없어 시련을 클리어하기 위한 작전을 미리 세워둘 수 없다는 건 매한가지지만.
지금껏 다른 시련들이 그랬듯, ‘오관대왕의 심판’ 역시 7일 동안 치러진다면 시련의 끝은 정확히 일주일 후. 즉, ‘후원 미션’이 끝나고 클리어 조건이 공개되는 순간부터 3일 이내에 그를 완료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시련을 클리어할 시간도 촉박한데, 미리 대비할 수 없게끔 그 내용까지 숨겼다는 건 순발력이 중요한 속도전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는 건가?
뭐, 지금 생각한다고 바로 답이 나오는 건 아니니 우선은 ‘후원 미션’부터 수락할까.
[‘캠비온 녹스’님이 등록한 ‘후원 미션’을 수락합니다.]
“독특한 ‘후원 미션’이네요. 그저 문을 통과하면 된다니.”
옆에서 몇 번이고 내용을 정독하던 이나은도 한참 만에 ‘후원 미션’을 수락했다. 하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이 남았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후원 미션’ 내용을 쏘아보고 있었다.
“한쪽 문을 선택하여 통과하라는 건, 여러 개의 문이 존재한다는 거겠죠? 어떤 문을 선택하냐에 따라 반대쪽에 있는 게 달라지기라도 하나? 그나저나 야누스…. 어디서 많이 들어보긴 했는데, 혹시 뭔지 아세요?”
“나은아, ‘야누스 신전’에 관해서 들어본 적 없어?”
이나은은 이화가 언급한 ‘야누스 신전’을 몇 번 읊조려 보더니 결국 잘 모르겠다 답하며 내게 눈짓했다. 나 역시 어깨를 으쓱하며 잘 모른다는 눈치를 주자, 이화는 ‘야누스 신전’에 관한 설명을 시작했다.
“야누스는 두 얼굴을 가진 로마의 신이야. 처음과 끝을 상징하는 신으로 출입문의 수호신이기도 해. 그런 그를 기리는 ‘야누스 신전’은 로마 시내에 있었는데, 전시에는 문을 열어두고 평시에는 문을 닫아두었대. 아마 이거랑 ‘야누스의 출입문’이랑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그럴 것 같네요. 근데 그런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그야 우리 이화는 전교권을 단 한 번도 놓쳐보지 않았고, 모의고사도 항상 1등급만 받아온 모범생이었거든. 책은 또 얼마나 많이 읽는지, 아는 것도 엄청 많다고.”
왠지 모르겠지만, 대화에 끼어들자 이나은은 징그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서 멀어졌다.
“왜 그쪽이 으스대는 건데요?”
“이게 끝이 아니야. 이화는….”
“오빠, 그만. 더했다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빠 입 못 열도록 막아버릴 거야. 마침 뭔가 또 적히고 있는데, 이제 여기에 집중하는 게 어떨까?”
앞으로도 한참 남은 동생 자랑은 새로운 글씨 탓에 나중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생존한 모든 플레이어가 제 ‘후원 미션’을 수락해주셨군요.」
「혹시라도 거부하는 플레이어가 있을까 봐 마음 졸였는데, 다행이네요.」
「시련 시작도 전에 초월자님들의 흥미를 충족시켜 줄 배우들을 제 손으로 죽일 일은 없으니 말이죠.」
글씨가 새겨진 창에는 막대그래프가 함께 표시되어 있었다. 그래프는 ‘후원 미션’을 수락한 플레이어와 수락하지 않은 플레이어 수를 나타내고 있었는데, 당연하게도 수락하지 않은 쪽의 수는 0이었다.
반면, 수락한 쪽의 수는 1,298,797. 첫 번째 시련에 참여했던 플레이어 수를 생각하면 무척이나 줄어든 수치였다.
“분명, 시련 시작할 땐 플레이어 수가 정확하게 1억 명이었죠?”
“그랬었지.”
“그럼 시련 세 번 만에 1/100 정도만 생존했단 거네요.”
“…처참하네.”
“1/100이든 1/1,000이든 저희가 거기에 끝까지 포함되기만 하면 되죠. 물론 그 전에 강이란 놈들은 그러지 못하도록 만들어야겠지만요.”
그래프에 이어 이번엔 거대한 황금빛 글자가 하늘 정중앙에 새겨졌다.
[95:14:54]
[95:14:53]
[95:14:52]
「이 숫자가 0이 되기 전까지 문을 통과하면 돼요.」
모두의 시선을 빼앗은 숫자는 1씩 줄어들며 ‘후원 미션’이 끝나기까지 남은 시간을 표시해주었다.
「그러면 ‘야누스의 출입문’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드려야겠죠?」
「‘야누스의 출입문’은 전 세계 곳곳의 다리마다 설치되어 있답니다.」
「다리의 한가운데를 보면 ‘야누스의 출입문’이 있을 거예요.」
「그저 그 문을 통과하면 되는 ‘간단한’ 미션이니 전원이 성공하길 바랄게요.」
「모두가 ‘후원 미션’을 성공하길 기원하며 한번 무대를 바꾸어 볼까요?」
[‘빙하기’가 종료됩니다.]
[바람이 잠잠해집니다.]
[B급 괴수 ‘빙혈어’가 물러납니다.]
[S급 괴수 ‘빅풋’이 물러납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법!」
「몸도 녹일 겸, 다 함께 광합성 좀 할까요?」
[‘만물을 아우르는 자’님이 전차를 몰고 옵니다.]
멀리서부터 가까워지는 말 울음소리에 맞추어 어둠이 걷히고 해가 떠올랐다. 따스한 햇볕은 지면을 덮은 눈을 녹이기 시작했다.
“이젠 이 털옷 벗어도 되겠죠?”
“눈이 녹는 걸 보니,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
“전투할 때마다 몸에 걸려서 성가셨는데 이제야 이걸 벗네요.”
[‘특급 냉장고’에 장비한 ‘빅풋 털옷’이 보관됩니다.]
일주일간 지겹도록 쌓인 눈은 신기하게도 ‘빅풋 털옷’을 벗은 시점에 모두 녹아 있었다. 한기 또한 완전히 사라져서 정말 봄이 온 듯한 포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확실히 추운 것보단 이게 낫네요.”
이나은이 기지개를 켜며 말한 그 한 마디는 그만 플래그가 되어 버렸다.
「‘만물을 아우르는 자’님의 도움으로 이번 시련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내내 해가 화창하게 떠 있을 예정입니다.」
「그동안 추위에 떨었을 여러분을 위해 밤에도 해가 뜰 수 있게 해주신 ‘만물을 아우르는 자’님께 박수 부탁드립니다.」
“이게 낫다고 이야기하자마자….”
“밤에 자려면 안대라도 만들어야겠네. 또 이상한 가격으로 상점에서 판매하고 있으려나?”
「그리고!」
「봄의 매력 하면 각종 식물의 싹이 트는 거 아니겠어요?」
[‘캠비온 녹스’님이 행성 곳곳에 ‘검수의 씨앗’을 뿌립니다.]
「지옥의 나무를 구경하며 봄의 매력을 함께 느껴보자고요.」
[햇볕을 받아 ‘검수’가 자랍니다.]
[행성 곳곳에 ‘검수림’이 생성됩니다.]
씨앗을 뿌렸다는 글씨가 새겨지기 무섭게, 땅을 뚫고 거대한 나무들이 자라났다. 건물 사이사이 빽빽하게 자라난 나무들은 곧 숲을 이루었다.
「만지지 말고 감상만 해주시길 바랍니다.」
「스치기만 해도 어디 하나 잘려 나갈 수 있거든요.」
‘캠비온 녹스’가 경고했듯 나무에는 가지마다 바늘 같은 뾰족한 붉은 잎이 달려 있었다. 잎 하나하나는 내 팔뚝 길이만 해, 멀리서 보면 여러 자루의 창이 나무에서 뻗어 나온 듯한 형상이었다.
「준비는 이만하면 된 것 같으니, ‘후원 미션’이 종료된 4일 후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지금까지 봄의 전도사 ‘캠비온 녹스’였습니다!」
“하! 이번 시련도 쉽지 않겠네. 오빠,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아까 하다만 이야기부터 끝낼까?”
이화 일행과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 이나은이 따로 이야기할 게 있다며 우리 일행만을 모았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임수연 헌터 덕분에 괜찮아졌어. 며칠 사이에 몇 번이나 도움을 받은 건지 모르겠네. 그나저나 무슨 이야기 하려고 우리끼리 모인 거야?”
“저는 서울로 갈 거예요.”
이나은이 툭 내뱉자, 송태섭은 그게 어쨌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강이란의 세력을 서울에서 뿌리 뽑을 생각이거든요. 분명 쉽지 않은 여정이겠죠. 위험하기도 할 테고. 그러니 여기서부터 각자의 길을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물론 단단히 약속했던 정현 헌터는 저랑 함께해야겠지만요.”
“각자의 길?”
고심하고 고심해서 꺼낸 이나은의 말에 송태섭이 피식 웃었다.
“미안하지만, 강이란을 쫓는 건 나한테도 중요한 일이거든. 그리고 쉽지 않고 위험하면 더더욱 함께해야 하는 거 아니야?”
“지난번에 혼자 사라졌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김화영이 톡 쏘아붙이자 송태섭은 민망한 듯 시선을 돌렸다.
“그땐 물류 창고 단지에서 있었던 일을 알기 전이었으니까…. 어쨌든. 나랑 아저씨는 어차피 강이란을 계속 쫓을 생각이었으니, 함께 서울로 갈게.”
송태섭이 함께하겠단 뜻을 밝히자, 김화영이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무래도 많이 위험하겠지?”
“네.”
“그러면 나야 좋지. 나도 계속 같이 다닐게.”
김화영마저 동참하겠다고 하자 일행의 시선은 마지막 남은 한 사람, 수연이에게 모였다.
“아저씨와 달리 김호연 헌터랑 이천수 헌터는 여기에 남을 거야. 공방전 중 죽은 동료들의 시신을 모든 시련이 끝날 때까지 지키겠다고 아저씨랑 약속했거든. 원한다면 임수연 헌터도 그분들하고 함께 이곳에 남아도 돼. 이번 공방전에서 강이란 세력이 모두 제거된 이곳이 서울보단 비교적 더 안전할 거야.”
송태섭의 제안에 수연이는 동문서답을 했다.
“회사란 곳, 뭐 하는 곳인지 알아요?”
“회사?”
어리둥절한 송태섭과 달리 내 표정엔 당황함이 절로 배어 나왔다.
“그걸 어떻게….”
“네가 보지 말라고 했지만, 지하 통로의 방에서 나도 이것저것 봤거든. 네가 수첩을 읽으며 중얼거리는 것도 들었고. 회사에서 그분을 끔찍하게 살해한 거지?”
침묵을 지키자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수연이는 말을 덧붙였다.
“강이란 헌터가 사라질 때 회사 이야기한 걸 보면, 그 사람의 세력이 회사랑 연관된 거고. 그러면 나도 함께할게. 그 사람들이 더는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싶어.”
“하지만 위험.”
“그러면 임성윤 헌터 포함해서 전원 함께한다고 보면 되는 거죠?”
수연이를 만류하려 했으나 이나은이 상황을 정리해버렸다.
“이나은 헌터, 잠깐만.”
“임수연 헌터가 애도 아니고, 과보호는 거기까지만 하시죠. 어차피 남의 도움만 받았다간, 시련에서 생존하지도 못해요.”
내게만 들리도록 소리 낮춰 한 말에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저랑 정현 헌터는 꼬맹이 일행한테 가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고 올게요. 다른 분들은 여기서 조금 더 휴식 취하고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