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52화 (53/168)

[11. 검수지옥 (3)]

손을 뻗어보았으나, 당연히 잡히는 건 없었다.

이나은은 이미 눈앞에서 사라진 후였다.

“와! 나은이, 뭐 한 거야? 무슨 주문 같은 건가? 회사 지부는….”

“김화영 헌터, 멈춰요!”

“…여의도에 있다? 응? 멈추라고?”

[플레이어 ‘김화영’이 영업 비밀 보호 의무를 위반한 사실이 적발되었습니다.]

[현재 인사위원회 개최가 불가합니다.]

[징계 심의를 미룹니다.]

[인사위원회가 개최되기 전까지 플레이어 ‘김화영’을 구속합니다.]

[플레이어 ‘김화영’을 법무팀으로 이송합니다.]

그리고 이나은에 이어 김화영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법무팀으로 이송? 설마 두 분 지금 회사랑 연관된 곳에 간 거예요? 아직 아무런 준비도 안 되었는데, 어째서?”

나야말로 그게 궁금하다.

법무팀의 위치며, 전력이며, 그 무엇 하나 아는 게 없는데 아무런 대비책도 세우지 않고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김화영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나은은 대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한 거지?

물류 창고 단지 일로 인해 분노하고 있는 건 알겠다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혹시 김화영 헌터 여기에 표식 같은 거 새기진 않았죠?”

“그럴걸? 날 바뀐 지 얼마 안 되었잖아.”

“미치겠네.”

그쪽에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방법은 없는 건가. 그렇다고 이대로 이나은과 김화영을 놓칠 순 없고.

이렇게 된 이상 죽음 이후 귀환하는 내 특성을 믿고 이판사판으로 함께 적진에 들이닥치는 수밖에 없나.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박무성이 이송되었을 때와는 다르게 ‘현재 인사위원회 개최가 불가해서 징계 심의를 미룬다’라고 적혔다는 것. 어쩌면 저곳에 가는 즉시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지도 모른다.

“계획을 바꿀게요. 지금 바로 전투 준비하고 이나은 헌터를 쫓아가죠.”

“오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곧바로 회사 소속 법무팀에 가는 거니,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거든요. 그러니 오기 싫은 분은 따라오지 않아도 돼요. 나중에 여의도에서 만나면 되니까.”

“여의도?”

“여의도에 회사 지부가 있다고 했거든. 지금 따라오지 않을 사람들은 거기서 합류하는 거로 하죠.”

[플레이어 ‘정현’이 영업 비밀 보호 의무를 위반한 사실이 적발되었습니다.]

[현재 인사위원회 개최가 불가합니다.]

[징계 심의를 미룹니다.]

[인사위원회가 개최되기 전까지 플레이어 ‘정현’을 구속합니다.]

[플레이어 ‘정현’을 법무팀으로 이송합니다.]

글씨가 새겨지는 순간 입이 다물어졌다.

가위눌린 듯 옴짝달싹 못 하게 된 몸을 억지로 움직이려 하니 눈앞이 핑 돌았다.

“빨리 좀 오시지. 왜 이리 늦게 왔어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눈을 떴을 때, 난 사방이 철창으로 둘러싸인 좁은 공간에 있었다.

“지금 그게 할 소리야?”

“늦긴 했어도 감동적이지 않아? 오랜만에 만난 동생마저 남겨두고 나은이 따라와 주다니.”

“그쪽도 잘한 건 아니니까 조용히 하세요. 너 진짜 무슨 생각으로 이런 무모한 짓을?”

“무모하다고요?”

이나은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뒤를 가리키며 배시시 웃었다.

시선을 그쪽으로 옮기니 활짝 열려 있는 철문이 보였다.

철문은 정면으로 길게 뻗은 통로와 이어져 있었다. 통로에는 바닥에 쓰러진 의자 몇 개만 있을 뿐, 감옥을 지키는 사람은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어디 간 거야?”

“여기 있던 사람들도 살아남기 위해선 ‘후원 미션’을 해결해야 하잖아요.”

“그 말은 다들 ‘야누스의 출입문’을 통과하러 가서 자리를 비웠다는 거야?”

“정답. 침입하기엔 정말 좋은 조건 아닌가요? 급했는지 감옥 열쇠마저 복도에 떨어뜨리고 갔더라고요.”

이나은은 자랑스럽게 열쇠 꾸러미를 빙빙 돌리고 있었다.

철문 바로 앞에 표식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니, 김화영이 스킬을 써서 복도로 넘어간 후 열쇠로 문을 연 듯하다.

“만약에 법무팀 인원 중 절반만 ‘후원 미션’ 하러 가고, 나머지 절반은 이곳을 지키거나. 혹 오늘이 아닌 다른 날에 ‘후원 미션’을 하러 가기로 했다거나. 아예 시련 참가를 포기하고 이곳을 지켰으면 어쩔 뻔했어.”

“그래서 김화영 헌터랑 함께 온 거죠.”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이나은이 말을 덧붙였다.

“미리 부탁해서 원래 있던 곳에다가 표식 새겨뒀거든요. 여차하면 김화영 헌터 스킬로 다시 돌아가려 했죠.”

“두 사람 그런 얘긴 대체 언제 해 둔 거야.”

“다들 치료받느라 정신없을 때 했지. 그나저나 내 연기 어땠어?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여기에 온 거 같지 않았어?”

“덕분에 제대로 속아 넘어갔네요.”

모든 수를 계산하고 저지른 짓이었나.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주면 좋았잖아. 그러면 아무 말 없이 따라왔을 텐데.”

“그야 그랬다간 의견 충돌이 생기고, 그만큼 시간도 지체될 것 같아서요.”

“차라리 그게 낫지. 아무도 안 따라오면 어쩌려고 그랬어?”

“어차피 그쪽은 따라올 거였으니까요.”

무슨 의미인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이나은은 새끼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저랑 약속한 게 있으니까, 반드시 따라올 것 같았어요.”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저한텐 그쪽만 있으면 돼요. 무슨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든 잘 넘길 수 있도록 만들어 줄 테니까. 그러니 다른 사람은 따라오든 말든 별로 상관없어요.”

나를 꿰뚫어 보는 듯, 어느새 이나은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물론 그쪽이 오면 송태섭 헌터랑 정이화 헌터도 따라올 거고. 그러면 결국 다 이곳으로 올 게 뻔하긴 하지만요.”

능청맞은 대답에 혀를 차니, 송태섭의 외침이 들렸다.

“다들 괜찮아?”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은 오른쪽 감방. 이윽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여기가 법무팀이 있는 건물인가 보군.”

“에? 감옥인가요? 저희 지금 갇힌 건가요?”

이나은의 말대로 곧 모두가 이곳으로 왔다.

“제 말 맞죠? 다만 다들 다른 감방으로 떨어질 건 생각 못 했네요.”

오른쪽 감방엔 동현이 형, 이화, 송태섭, 한성수. 왼쪽 감방엔 노인과 김아람, 수연이가 있었다.

문제는 세 개의 감방은 일렬로 이어져 있지만, 그 바깥은 벽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

“철창 아니면 벽을 부숴야 하나? 그러지 않는 이상 당분간 함께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일단 다른 감방들의 문부터 모두 열어주고 생각하자.”

“그럴까요? 정이화 헌터, 여기 꾸러미 중에 맞는 열쇠가 있을 거예요.”

이나은이 이화 쪽에 열쇠 꾸러미를 건네줄 때, 김아람이 말했다.

“혹시 문밖으로 뭐가 보이세요? 저희 쪽에선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이는데 다른 곳도 마찬가진가요?”

그 말을 듣고 밖을 살피니, 저 멀리 방문이 보였다.

“무슨 방이 보이는 게 아니라, 계단이 보인다고요? 이화야, 너희 쪽은 어때?”

“우리 쪽에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여. 이대로 통로를 따라가면 완전히 흩어지게 생겼네.”

곧 ‘쿵’하는 소리가 두어 번 나더니, 이화가 말을 이었다.

“철창도, 벽도 파괴할 수 없대. 공방전 때처럼 건물 자체에 파괴 불가라도 걸어 둔 것 같은데?”

“어쩔 수 없네요. 여기 있어도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일단 앞으로 나가 볼까요? 다행히 건물 안엔 아무도 없는 것 같고, 이왕 왔으니 회사란 곳에 관한 정보 모아서 1층에서 합류하는 거로 해요. 단!”

김아람이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 공기가 얼어붙은 듯,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이나은 헌터님, 방금처럼 아무런 상의 없이 개인 행동하는 건 그만두셨으면 좋겠어요. 모두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요.”

“최대한 노력해볼게요. 물론 강이란을 상대하는 데 위험을 감수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그때도 노력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김아람의 말을 이나은이 맞받아치고 둘 사이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자자, 우리한텐 시간이 별로 없는 거 아닌가? 얼른 이곳을 살피고 ‘후원 미션’도 해결해야지.”

긴장감을 깨준 노인에게 속으로 감사함을 표하며 얼른 상황을 정리했다.

“임성윤 헌터 말이 맞아요. 이미 벌어진 일, 잘잘못은 합류한 후에 따지고. 지금은 이곳을 살피는 데 집중하죠. 혹시 법무팀 측의 헌터가 있을 수도 있으니 다들 긴장은 풀지 마세요.”

내 말에 이화가 밑에서 보자고 답하며 먼저 감방을 나섰고, 이어 김아람도 죄송하다며 머리를 한 번 숙인 뒤 감방을 나섰다.

“나은아, 우리도 가볼까?”

김화영이 등 떠밀어 천천히 철문 밖으로 나서는 이나은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침울해 보였다.

창문 하나 없이 앞으로만 쭉 이어진 복도는 우리를 황금빛 문 앞으로 인도했다.

“부잣집 놀러 온 기분이네.”

“바로 들어갈까요?”

“그러면 문은 내가 열래! 언제 또 이런 문 열어보겠어.”

김화영이 문을 살며시 열자, 드라마에서 여러 번 본 장소가 나왔다.

“오! 법정이다! 나 법정은 처음이야.”

“왠지 ‘이의 있음’을 외쳐야 할 것 같네요.”

“‘이의 있음’? 뜬금없이?”

“그런 게 있어요. 그나저나 감옥하고 연결된 걸 보니, 붙잡아 온 사람들의 징계 내용을 여기서 재판을 통해서 바로 결정하나 보네요.”

거대한 법정 이곳저곳을 둘러볼 때, 판사석 쪽에서 별안간 우당탕 소리가 났다.

“누구야?”

소리가 난 직후 김화영이 던진 단검은 정확히 판사석에 놓인 의사봉에 꽂혔다. 그 충격에 나무망치가 판사석에서 떨어지자 뒤편에 숨어 있던 사람이 ‘히익’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두 손을 하늘 높이 든 남성은 판사복을 입고 있었다.

“여, 여기엔 어떻게?”

벌벌 떠는 그에게 순식간에 다가간 이나은은 의사봉에 꽂힌 단검을 뽑아 목에 겨누었다.

“저희 질문에나 답하세요. 그쪽 말고 여기에 다른 헌터가 있나요?”

자신의 목에 닿을락 말락 하는 단검을 바라본 남성은 침을 꼴깍 삼키더니 고개를 저었다.

“자, 잘은 모르지만. 저, 적어도 여기엔 저뿐이에요.”

“잘은 모른다고요?”

“그, 그게 판사로 이곳에 오고 난 뒤 한 번도 다른 곳엔 가보지 못했거든요.”

“언제 이곳으로 왔는데요?”

“이제 한 달 됐어요.”

살짝 오줌까지 지린 남성을 보니 거짓말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한 달밖에 안 됐다면, 다른 판사들도 있는 거 아니에요?”

“네, 네. 그렇죠.”

“그 사람들은 어디에?”

“다, 다들 ‘후원 미션’ 하신다고 ‘마포대교’로 갔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