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54화 (55/168)

[11. 검수지옥 (5)]

이나은은 헛웃음을 흘리며 짧은 욕설을 내뱉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저 판사 말대로면 제 소중한 사람들이 죽게 된 건 다 회사 때문이란 거죠?”

그렇게 말하곤, 그녀는 자신의 교복 상의에 달린 명찰을 꽉 움켜쥐었다.

“정말로 상헌 아저씨가 멀쩡히 살아있는지 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요. 만약 그렇다면….”

“여기는 또 무슨 방인가? 법정에 이어 두루마리로 가득한 방이라니. 참으로 독특한 곳일세.”

“재판 기록을 보관해둔 데 같아요. 어, 김화영 헌터님!”

“수연아, 쉿! 저기서 현이가 나은이랑 단둘이 이야기하고 있거든. 방해하면 안 돼.”

주변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탓에 이나은의 뒷말은 미처 다 들을 수 없었다.

소란이 생긴 쪽을 바라보니 김화영이 노인과 함께 합류한 헌터들의 입을 막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들에게 빼앗긴 시선을 다시 이나은 쪽으로 돌렸을 때, 그녀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후였다.

“괜찮아? 조금 쉬었다 가도….”

“쉬고 자시고 할 시간이 어딨어요? 서둘러 마포대교를 뚫고 실험실로 가야죠.”

이나은은 내 어깨를 살며시 잡아 보고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수연이에게 향했다.

그에 오히려 내가 아까까지 이나은이 짓던 얼떨떨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불안하네.”

물류 창고 단지 일이 있었던 이후. 자신의 복수와 연관된 일이라면 불나방처럼 달려든 이나은이다.

여태까진 불에 타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상대가 회사이니만큼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김아람이 말했듯 자칫 잘못했다간 빠져나오긴커녕 일행 전체를 불길 속으로 끌고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면, 누군가는 이나은이 섣불리 움직일 수 없게 막아 줄 억제제 역할을 해야 하는데.

“꼬맹이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해줄 수 있으려나.”

그 역할을 맡을 만한 사람으로는 일전에 이나은에게 개인 행동하지 말라고 경고한 김아람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나중에 꼬맹이랑 따로 이야기하든가 해야겠네.”

김아람과 단둘이 이야기할만한 시간이 생기길 바라며, 최초의 판결이 적힌 두루마리를 고이 서재에 꽂아두었다. 이후 이나은을 따라 일행에 합류하니 노인 쪽 감방에 있던 헌터들이 위층에 올라가서 겪은 일을 들을 수 있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검사실이 나오더구먼. 거기엔 신임 검사 한 명이 있었다네.”

“검사 아저씨도 여기 남아 있었구나! 그 아저씨는 지금 어디에 있어?”

“마주하자마자 곧바로 덤벼드는 바람에 쓰러뜨릴 수밖에 없었네.”

신임 검사를 쓰러뜨리고 검사실을 뒤지다 보니, 수연이가 이상한 버튼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 버튼을 누르니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가 나타났다네. 그 통로를 통해서 이곳에 올 수 있었지.”

“건물 곳곳에 비밀 통로가 있나 보네! 어? 아저씨, 괜찮아?”

김화영의 걱정에 그제야 남성이 온몸을 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 저도 그 검사처럼 되는 건가요?”

그는 이윽고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빌기 시작했다.

“이 자는 딱히 자네들을 공격한 것도 아니고, 중요한 정보도 주었다고 하니. 그냥 놓아주는 게 어떤가? 그게 불안하다면, 어디 묶어두어도 되고.”

“그랬다가 저희가 침입한 사실을 회사에 보고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차라리 허튼짓 못 하도록 당분간 끌고 다니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이나은의 제안에 남성은 자신을 여기에 남겨달라고 애원했다.

“네? 여기 남겠다고요?”

“여러분께 폐가 될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을게요. 그리고 제가 여러분에 관해 상부에 보고한다는 건, 침입자를 막지 못하고 놓친 죄 역시 스스로 고백하는 꼴이에요. 보고하는 순간, 사형 선고를 피할 수 없게 되는데 제가 왜 보고를 하겠어요?”

“그렇긴 하네요. 정현 헌터, 어떻게 하실래요?”

후환을 남겨두지 않으려면 제거하는 게 최선이긴 하다만.

“여기서 저희가 놓아드려도, 마포대교에서 마주하면 그땐 적으로서 상대할 거예요. 필요하다면 그쪽이 문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거나, 아예 목숨을 앗을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그럴 바엔 지금 저희한테 끌려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마포대교로 갈 생각은 없어요.”

남성은 단호히 말했다.

“전 이미 죽은 목숨이에요. 아까 말했듯 원래대로라면 침입 사실을 상부에 보고한 뒤, 제 목숨과 바꿔서라도 침입자를 막았어야 했으니까요.”

“저희랑 함께하면 회사로부터 그쪽을 보호해 줄 수도….”

“제 목숨은 중요하지 않으니 괜찮아요. 그보단 법무팀장님 방으로 가서 제가 방금 저지른 위법 기록을 모두 지우는 게 더 중요해요.”

“위법 기록이요?”

“누군가 회사법을 어기면, 그와 관련된 결재서류가 법무팀장님 방에 생겨나거든요. 그 많은 서류 속에서 제 위법 기록이 적힌 서류를 찾는 데에만 시간이 며칠 걸릴 테니, ‘후원 미션’은 포기할 수밖에 없어요.”

다시 말해 위법 기록을 지우고 죽음을 택하겠다는….

“굳이 왜 ‘후원 미션’을 포기….”

“위법 기록이 남아있다면, 제 와이프가 위험하니까요. 위법 기록을 지우고 ‘후원 미션’을 실패해 이곳에서 죽는 게 최선이에요. 그러면 회사에서 제가 침입자를 막다가 죽었다고 판단할 테니, 와이프에게 제 죄를 묻진 않겠죠.”

몸은 떨고 있지만, 남성의 표정만은 결연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내 말을 들은 남성은 안쪽의 서재에 다가가더니 두루마리 하나를 찾아 꺼냈다. 곧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서재 하나가 뒤로 밀려나더니, 숨겨진 문이 나타났다.

“따라오세요.”

남성을 따라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무실 책상이 여럿 놓인 방이 나왔다. 그중 제일 큰 책상에 결재서류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남성은 결재서류를 지나 방 깊숙한 곳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더 들어가면 일 층으로 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있을 거예요. 문제는 전력을 간수실에서 공급한다는 건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쪽에서 ‘우웅-’ 소리가 났다.

“다른 일행분이 간수실에서 전력을 가동했나 보네요.”

남성의 말대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누르니 얼마 안 지나 문이 열렸다.

“들어보니, 실험실로 가려는 것 같은데. 만약, 혹시라도 가능하다면 제 와이프를 구출해주세요. 와이프 이름은 지은정이에요.”

“이런 부탁을 벌써 두 번이나 받는구먼. 내가 책임지고, 그 부탁 들어줄 수 있도록 노력하지.”

노인의 대답에 남성은 감사하다며 그 자리에서 절을 몇 번이고 했다. 그 모습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이어졌다.

문이 닫히고 1층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렸을 때,

“정말 여기서 오라버니가 나왔네. 엘리베이터 전력 켜길 잘했다.”

일행 모두가 다시 모였다.

***

[29:14:20]

[29:14:19]

법무팀 건물에서 나와 마포대교에 도착하기까지, 이틀 정도의 시간이 소요됐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네.”

“거리상으로는 가까워도, 워낙 길이 불편해서 오래 걸린 것 같아요.”

김화영의 말에 답하며 뒤쪽을 바라보니 지상을 온통 뒤덮은 검수림이 보였다. 저 망할 숲만 아니었으면, 분명 마포대교에는 반나절 만에 도착할 수 있었을 거다.

조금이라도 스치면 큰 상처를 입히는 잎을 지닌 검수(劍樹)도 문제였지만, 숲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검수(劍獸)라는 B급 괴수도 길을 편히 나아갈 수 없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가시 달린 거대한 늑대는 무리 지어 우리를 쫓으며 마포대교로 나아가는 걸 계속해서 방해했다. 그 탓에 이동 속도는 더뎌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우리는 검수림에서 이틀 밤이나 보내게 되었다.

“그래도 다들 다친 데 없이 무사히 여기까지 왔잖아. ‘후원 미션’ 끝날 때까지 시간도 아직 넉넉하게 남았고. 그럼 된 거지.”

“수연이 말이 맞아! 그리고 그 나무껍질이랑 괴수 고기로 만든 수프 이제 안 먹어도 되는 게 어디야.”

“네? 맛있었던 거 아니었어요?”

“그땐 그거밖에 먹을 수 없었으니까, 최면처럼 맛있다고 계속 말한 거지.”

정말이냐고 물으려 하자 수연이는 시선을 피했다. 수연이마저 옹호해주지 않는다면, 그 음식은 맛이 없었던 게 맞다.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재료론 그 요리가 나름 최선이었는데…. 직업 승급 조건을 하나 더 채운 것으로 만족하고 그때 만든 요리는 영원히 봉인해야겠다.

김화영의 솔직한 요리 평을 잊기 위해 다시 마포대교로 시선을 옮겼다.

다리 곳곳에선 주인 잃은 차들이 녹슬어가고 있었다.

“저게 ‘야누스의 출입문’이겠지?”

수연이가 가리킨 곳은 다리의 한가운데. 그곳엔 거대한 얼굴 두 개가 나란히 조각된 문이 있었다.

문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가 얼굴 조각의 입 부분에 각각 존재했다.

“으- 사람 입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거야? 뭔가 느낌 이상할 거 같아.”

그러면서도 호기심이 일었는지 김화영이 제일 먼저 다리 위에 발을 얹었다.

그 순간, 모두의 눈앞에 글씨가 새겨졌다.

[‘마포대교’에 입장하셨습니다.]

[평시 상태가 유지 중입니다.]

“평시 상태?”

「그건 바로 평화가 유지되고 있단 뜻이죠!」

「많은 플레이어가 시련에 참여할 수 있는 편이 좋잖아요.」

「혹시나 평화를 깨고 다른 플레이어가 ‘야누스의 출입문’을 통과할 수 없게 막으려는 건 아니죠?」

「만일 다른 플레이어에게 해를 가한다면, 곧바로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 버릴 거예요!」

‘캠비온 녹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강에서 거대한 물고기 하나가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

[?급 괴수 ‘업강독충’이 등장합니다.]

자세히 보니, ‘업강독충’은 물고기가 아니라 수많은 벌레로 이루어진 하나의 군집이었다. 내 허리까지 올법한 벌레들은 자신의 몸보다도 큰 두 개의 엄니를 갖고 있었다.

벌레 무리는 마치 하나의 물고기인 것처럼 자연스레 수면 아래로 다시 들어갔다.

수면 위에 살짝 비치는 거대한 그림자는 강에 먹잇감이 빠지기만을 기다리며 다리 주변을 이리저리 맴돌았다.

「그러니 본격적인 시련이 시작되기 전에 쓸모없는 싸움을 하진 말아 주세요.」

그 경고를 마지막으로 글씨는 더 새겨지지 않았다.

“물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네.”

“네. 그러면 일단 ‘후원 미션’부터 끝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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