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56화 (57/168)

[11. 검수지옥 (7)]

“연구 일지에 적혀 있던 이름이거든. 자, 봐봐.”

이나은에게 돌려받은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 보이자, 옆에서 그를 유심히 보던 김아람이 말했다.

“동그라미에 별표. 중요한 이름인 건 확실해 보이네요. 그런데 이 수첩을 발견한 장소가 어디라고 하셨죠?”

“발견한 장소요? 공방전 당시 보조경기장에서 주경기장으로 이어지는 지하 통로에서 발견했었죠. 그건 갑자기 왜?”

김아람은 대답 대신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걸고 이리저리 꼬기 시작했다.

“저기 김아람 헌터?”

“아람이가 저런 행동 하면 뭔가 생각할 게 있다는 거니까 잠시 내버려 두면 돼.”

“걸리는 거라도 있는 건가?”

“이따 아람이가 알려주겠지. 우린 방해 안 되게 주변이나 좀 더 살펴보자.”

김아람에게서 떨어져 아직 살펴보지 않은 차 안을 뒤지던 와중, 이화가 조심스레 물었다.

“잠깐 딴 얘기 좀 해도 될까?”

“안 된다고 해도 할 거잖아. 뭔데?”

이화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껄끄러운 말을 하기 전에 짓는 이화의 표정을 보니 절로 긴장한 채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내가 강이란을 쫓고 있던 이유에 관해선 아직 말 안 했지?”

“두 번째 시련에서 강이란에게 동료 셋을 잃었다며.”

“반만 정답.”

“반만 정답이라니?”

“우리 일행이 강이란을 쫓는 이유는 그게 맞지만, 난 살짝 달라.”

이화는 그 뒤에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내가 강이란을 쫓는 이유는 첫 번째 시련 때, 우연히 만난 헌터 때문인데.”

“그 헌터가 왜?”

“괴수를 피해 함께 숨어 있다가 몇 마디 주고받았는데. 그때 그 헌터가 그러더라. 자기는 정찰조에게서 낙오되었는데 제때 돌아가지 못한다면 정성훈 헌터한테 죽은 목숨이라고.”

그게 뭔 상관이냐고 대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제때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정성훈 헌터를 만나게 해줄 수 있냐고 물으니까, 알겠다네? 그래서 첫 번째 시련이 끝나자마자 주둔지로 돌아가는 대신 그 헌터를 따라 정찰조가 있다는 곳으로 갔지.”

그곳에는 장신구를 찬 헌터들이 있었다고 한다.

“물류 창고 단지 주변으로 세력을 넓히기 전 정찰을 나왔던 놈들이었는데. 이건 중요치 않으니 넘어가고.”

“그 사람은 만났어?”

힘겹게 꺼낸 질문에 이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성훈 헌터는 거기에 없었어. 그 헌터한테 이건 약속하고 다르지 않으냐 따졌는데 상무님을 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냐면서 오히려 싸움을 걸어왔어.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헌터가 강이란이었더라고.”

그 싸움에서 동료 셋을 잃게 되었고. 이후 이화 일행은 강이란을 붙잡기 위해 물류 창고 단지에 가게 된 것이었다.

“결론은 죽은 동료의 복수 플러스 정성훈 헌터에 관해 물으려고 강이란을 쫓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화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마쳤다.

“강이란, 그 자식 혼자서도 충분히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낙오는 무슨.”

“그냥 그런 상황을 즐기는 거 같더라.”

“속인 다음에 뒤통수치는 거?”

“정확하네.”

“나도 된통 당했으니까.”

“오빠도 당했다고?”

이화는 내가 속았다는 사실에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그래서 정성훈 헌터는 우리가 아는 사람이 확실한 거야?”

“제일 중요한 걸 왜 안 물어보나 했네. 확실해. 우리가 아는 사람이 맞아. 강이란과 대화하면서 확인한 결과, 얼굴에 화상 자국 있는 거며, 나이며, 특이한 말투며, 다 일치하더라.”

“그 인간이 상무란 말이지?”

“믿기진 않지만. 그렇대.”

어머니의 유산을 사기로 모두 잃고 사라진 놈이 멀쩡히 살아서 상무 자리에 앉았다니.

“우리 어머니 돈 떼먹은 놈이 지금은 상무라니. 하, 세상 참 좋아졌네. 그래도 잘됐다.”

“잘됐다니?”

“살아있으면 우리한테 진 빚 갚게 할 수 있잖아. 게다가 어디에 있는지까지 대충 알게 되었고.”

“강이란과 엮인 데다가 상무란 직책을 달고 있는 걸 보니, 회사에 몸담고 있겠지?”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지.”

잘은 모르지만, 상무란 직책 정도면 회사에서도 꽤 높은 자리일 것이다. 그만큼 회사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겠지.

회사란 세력하고 맞붙어야 한단 상황이 암울하기만 했는데, 여기서 정성훈이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단 소식을 듣게 될 줄이야.

진짜.

진짜, 이런 행운이 떨어질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

“그런 멍청이를 상무에 앉혔다고?”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이화도 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회사를 쓰러뜨릴 카드가 하나 더 생겼네.”

“우리 부모님 아들 아니랄까 봐, 나랑 같은 생각 하고 있었네.”

“그 자식 잘만 이용하면 회사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거야. 그때 그 자식 표정 볼만하겠네.”

“남은 건 그 자식을 우리 눈앞에 끌고 오는 방법인데.”

“우리 앞에 나올 수밖에 없도록 큰 소란을 피워줘야지.”

그렇게 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역시 실험실.

“소란 피우는 건 내 전문이니까 맡겨줘.”

내 말에 이화는 인방하던 짬 어디 안 갔다면서 배시시 웃다가 한 마디 덧붙였다.

“미안해. 삼촌 이야기를 들었더라도 주둔지로 바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됐어. 결국엔 다시 이렇게 만났잖아.”

“그건 맞지. 사실 네가 어디서 쉽게 죽을 사람도 아니라 딱히 걱정은 안 했어.”

“동생님? 방금 뭐라고?”

“근데 걱정은 걱정이고, 미안한 건 미안한 거니까.”

이화는 바로 앞의 차 문을 닫더니 김아람 쪽으로 돌아섰다.

“아람이 생각 끝났나 보다.”

거기서 대화를 마치고 우린 김아람에게 돌아갔다.

김아람은 우리를 보자마자 꼬던 머리카락을 놓고 양손을 앞으로 모으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대단한 내용은 아닐 수 있지만, 말씀드려야 할 게 있어요.”

“어떤 건가요?”

“정현 헌터님, 저한테 말 놓으셔도 돼요.”

“네? 설마 계속 생각하던 게.”

“아, 말씀드릴 건 당연히 이게 아니죠. 방금 건 그냥 신경 쓰여서 말씀드린 거고. 본론은 지금부터예요.”

김아람은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붓 한 자루를 꺼내더니, 허공에 휘저었다.

신기하게도 김아람이 쓴 붓글씨는 그 자리에 둥둥 떠다녔다.

- 첫째, 강이란 헌터는 어떻게 정현 헌터가 백민기 헌터를 찾을 것을 알았는가?

- 둘째, 강이란 헌터는 어떻게 정현 헌터가 지하 통로로 올 것을 알았는가?

두 문장을 적은 김아람은 내게 물었다.

“두 질문에 답하실 수 있나요?”

왜 이런 질문을 던진 건지 이해가 안 가 침묵을 지키자 김아람은 스스로 답변을 내놓았다.

“제 나름대로 내린 답변을 말씀드려볼게요. 먼저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정현 헌터님이 연구 일지를 봤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김아람은 첫 번째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제 답이 맞았다면, 자연스레 강이란 헌터는 정현 헌터가 연구 일지가 있는 지하 통로로 올 것 역시 알았다는 의미가 돼요. 근데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강이란 헌터는 왜 연구 일지를 치우지 않았을까요?”

생각해 보니 이상하다.

우리가 올 것에 대비하여 지하 통로에 권주혁 일당을 배치했으면서, 연구 일지는 왜 치우지 않은 거지? 권주혁 일당이 우리를 반드시 막아내리라 생각한 건가?

아니, 강이란은 우리가 방어팀 헌터들을 모두 죽일 걸 기대하고 있었다. 권주혁 일당 따윈 버리는 패로 거기에 둔 거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내가 연구 일지를 보길 바랐던 건가.

“강이란 헌터는 정현 헌터님이 연구 일지를 보고 백민기 헌터를 찾길 원했던 거예요. 그래서 연구 일지를 지하 통로에 놓아둔 거죠. 두 번째 의문은 여기서 나와요.”

김아람은 두 번째 문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강이란 헌터는 어떻게 해서 정현 헌터님이 지하 통로로 올 것을 알았을까요?”

“그야 최주일 헌터를 이용해서.”

“아니죠. 최주일 헌터와 함께 작전을 짤 땐, 임성윤 헌터님 일행이 지하 통로로 갈 예정이었어요. 하지만 들어보니 강이란 헌터는 정현 헌터님이 그곳에 갈 것을 콕 집어 알고 있던 거 같던데요?”

권주혁 일당과 최주일에게 날 붙잡으라 시킨 걸 보아선 김아람의 말대로 강이란은 내가 지하 통로로 이동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게 맞다.

“세 가지 경우의 수가 있어요. 하나는 운이 좋아서 강이란 헌터의 예측이 다 맞아떨어진 것.”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겠지.”

“네. 일단 이 경우는 배제하고 생각해요. 다른 하나는 강이란 헌터가 미래를 예측하는 스킬을 가졌다는 건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런 스킬이 존재할 가능성도 희박해요. 그러니 이 역시 배제하도록 해요.”

“그럼 마지막 경우의 수는?”

“강이란 헌터에게 정보를 흘리는 자가 저희 사이에 있다는 거죠. 정확히는 정현 헌터님 일행 중 한 사람이요.”

세 가지 경우의 수 중에선 마지막이 제일 타당하긴 하다.

스파이가 있다면 우리 일행이 지하 통로로 갈 것을 몰랐던 꼬맹이 일행은 후보에서 제외해야 하는 것도 맞고.

하지만 우리 일행 중에 스파이가 있다곤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 일행 중에 스파이가 있을 리가 없어.”

“전 정보를 흘리는 자가 있다고 했지 스파이가 있다고 하진 않았어요. 어쨌든 이 부분은 제가 책임지고 조사해볼게요. 두 분은 당분간 행동 조심해 주세요.”

김아람이 마지막 부분을 강조하여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이건 다른 이야긴데, 강이란 헌터가 데려오라고 할 정도니 분명 백민기 헌터가 회사에 있어 중요한 인물인 건 틀림없어요. 강이란 헌터에게 데려가는 건 나중에 생각하더라도 일단 그분 반드시 찾아내죠.”

“그래야지.”

김아람이 이야기를 마치고 우린 한동안 침묵을 지킨 채 남은 구역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따로 하고 싶었던 말 있었거든.”

그러다 이나은에 관한 부탁이 떠올라 두 사람을 불렀다.

“이나은 헌터, 항상 냉정하다가도 회사에 관한 일이 되면 그러지 못해서…. 그러니 무모한 짓 하지 않도록 두 사람이 지켜봐 줘.”

“개인적인 일이라도 있나 보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일행의 안전을 위해서도 어차피 그러려고 했어요.”

“그나저나 우리 오빠가 다른 사람도 걱정해주고. 신기하네.”

안심하는 날 이화가 이상하게 바라볼 때, 우리 앞쪽에 검은 점이 생겨났다.

“이게 뭐지?”

검은 점은 이윽고 여러 개로 늘어나더니, 크기도 점차 커졌다.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이상한 점들에 뒷걸음질 칠 때, 허공에 뜬 황금빛 글자에서 알람 소리가 났다.

[00:00:02]

[00:00:01]

[00:00:00]

[‘후원 미션’이 종료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후원 미션’을 클리어했습니다.]

「드디어 지루하기 짝이 없던 ‘후원 미션’이 끝났습니다!」

「피와 비명이 없으니 너무 지루했네요.」

「그래서 남은 시련 동안은 지루하지 않게 준비해봤습니다!」

「지금 바로 시련의 클리어 조건을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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