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검수지옥 (8)]
[‘오관대왕의 심판’의 클리어 조건이 해금됩니다.]
[오관대왕의 심판]
- 대상 플레이어 : U+2641 행성 생존자 전원
- 클리어 조건 : 3일간, 본인에게 배정된 통로로 괴수가 통과하지 못하도록 수비.
- 성공 보상 : 다음 시련 진출 및 상점 확장
- 실패 페널티 : 해당 구역에 SSS급 괴수 출몰
- 만일 전속 계약한 플레이어가 한 명도 남지 않았을 경우, 후원자님께서는 더 게임에 참여할 수 없으니 주의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전속 계약할 대상 선별은 이번 시련까지 가능합니다. 신중한 선택 부탁드립니다.
[플레이어 위치에 따라 통로가 배정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은 마포대교-SW 구역에 위치합니다.]
[플레이어 ‘정현’은 ‘전시의 통로’에 배정됩니다.]
다른 두 사람이 배정된 통로를 확인해보니, 마찬가지로 ‘전시의 통로’에 배정되어 있었다.
“‘야누스의 출입문’을 중심으로 어느 쪽에 있냐를 기준 삼아 통로를 배정했나 보네.”
“저희 모두 같은 통로에 배정된 걸로 보아선 그럴 가능성이 크겠네요.”
내 짐작대로라면 다리마다 각기 다른 통로를 배정받은 그룹 두 개가 존재하게 된다.
이는 시련에서 중요한 요소로 활용될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야누스의 출입문’의 양 통로를 모두 막으라는 전제 조건까지 내세우며 헌터들을 두 그룹으로 나눌 이유가 없으니.
하지만 클리어 조건만으론 이것이 시련에서 어떻게 작용할지 알 수 없었다.
“클리어 조건 말고도 뭐가 더 있는 건가.”
「통로 배정이 끝났습니다.」
「배정 기준까지 설명하긴 귀찮으니까, 간단히 말할게요.」
「그냥 본인이 통과한 통로를 지키세요.」
“어떤 통로를 통과했느냐에 따라 ‘야누스의 출입문’을 중심으로 어느 쪽에 있는지도 달라지니까. 결국 오빠 말이 맞았네.”
“그러면 저희 일행 모두 같은 통로를 배정받은 거네요. 다행이다.”
“그건 다행이긴 한데, 우리가 화난 얼굴 조각 쪽 통로를 지나서 그런가? 통로 이름 한번 불길하네. ‘전시의 통로’라니.”
「그나저나 너무 마음이 안 좋네요.」
「태양이 안 져서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무려 72시간 동안 괴수들이 통로를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아내야 한다니.」
「아직 남은 시련도 많은데 플레이어 여러분이 혹사당할 생각 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방구석 만화광’님이 플레이어 ‘김화영’에게 낙서 일부를 공개합니다.]
[플레이어 ‘김화영’에게 ‘방구석 만화광’님이 기록한 종족 ‘캠비온’에 관한 정보가 일부 해금됩니다.]
[‘캠비온’의 안구에는 눈물샘이 존재하지 않는다.]
별안간 눈앞에 적히는 글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말로만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한 건 알았지만, 실제로 눈물샘조차 없을 줄이야.
“눈물샘도 없는데 저딴 말이나 하고. 어이없네.”
“웬 눈물샘?”
이화의 반문에 글씨를 다시 보니 그제야 ‘플레이어 김화영에게’라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한솥밥 먹는 사이’ 특성으로 김화영에게 보이는 글씨가 내게도 보인 것이니, 이화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 당연했다.
“그냥 헛소리였어. 넘어가자.”
혹여나 김아람 앞에서 ‘한솥밥 먹는 사이’에 관해 설명하게 될까 걱정했으나, 이화의 관심은 다행히 새로이 적히는 글씨로 옮겨갔다.
“그럼 쓸데없는 이야긴 그만하고, 이거나 봐.”
이화의 핀잔에 나도 시선을 옮겨 글씨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특별한 조건을 몇 개 더해보았습니다.」
곧 ‘오관대왕의 심판’이 적힌 창에는 몇 가지 조건이 추가되었다.
- 6시간 간격으로 각 구역에 괴수 무리가 소환됩니다.
- 12시간 간격으로 소환되는 괴수의 수가 2배로 증가합니다.
- 24시간 간격으로 소환되는 괴수의 랭크가 한 단계 상승합니다.
- 괴수가 통로를 통과했을 경우, 그 즉시 반대 구역엔 괴수가 소환되지 않게 됩니다.
- 다리에 씌워진 차단막은 시련이 완전히 종료된 이후에 사라집니다.
이게 플레이어가 혹사당할 걸 생각해서 추가한 조건이라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힘들어지는 구조네. 저대로면 마지막 소환 시점엔 대체 얼마나 많은 괴수가 쏟아진다는 거야? 상상만 해도 너무 끔찍해.”
“법무팀 측이 먼저 포기하면 마지막 소환 시점까지 가지 않을 수도 있죠. 물론 저쪽도 최대한 버텨보려 하겠지만요.”
“저쪽이 먼저 포기하길 바라거나, 끝까지 버티거나. 둘 중 한 가지….”
그 순간, 앞서 적힌 글씨들 가운데 ‘김화영’이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가 아니구나. 저쪽이 포기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네.”
「그리고!」
중얼거린 말은 또다시 적히기 시작한 글씨에 묻혔다.
“아직 안내할 게 남았나 봐. 이제 많은 걸 바라지도 않으니 그냥 여기서 더 힘들어지지만 않으면 좋겠다.”
「몇몇 플레이어분께서 통로의 이름에 대해 걱정하는 것 같아서 몇 마디 덧붙일게요.」
「모든 플레이어는 ‘전시의 통로’ 혹 ‘평시의 통로’에 배정되었는데.」
「딱 잘라 말할게요.」
「통로의 이름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세요.」
[각 구역의 ‘전시의 통로’에 ‘폐허가 뒤따르는 자’의 술식이 새겨집니다.]
[‘전시의 통로’에 ‘전투의 함성’이 울려 퍼집니다.]
[‘전시의 통로’로 향하는 모든 괴수의 ‘힘’이 200 상승합니다.]
[‘전시의 통로’로 향하는 모든 괴수는 전투를 우선시합니다.]
[‘폐허가 뒤따르는 자’가 인간의 순수한 힘을 기대합니다.]
“아까 이럴 것 같아서 불길하다 한 건데. 말이 씨가 되어 버렸네.”
[각 구역의 ‘평시의 통로’에 ‘빛나는 눈의 전략가’의 술식이 새겨집니다.]
[‘평시의 통로’에 ‘화합의 노래’가 잔잔하게 흐릅니다.]
[‘평시의 통로’로 향하는 모든 괴수의 ‘민첩’이 200 상승합니다.]
[‘평시의 통로’로 향하는 모든 괴수는 목적지 통과를 우선시합니다.]
[‘빛나는 눈의 전략가’가 인간의 지혜를 기대합니다.]
「괴수 막는 데 벅차, 통로의 이름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거거든요.」
「다만, 초월자님들께선 통로의 이름을 유심히 봐주시길 바랍니다! 그와 연관된 이벤트가 하나 열릴 예정이거든요.」
「이벤트라 하면, 바로 어느 쪽 통로로 괴수가 더 적게 들어갈지 맞히는 승부 예측!」
「시련에서 주최되는 승부 예측은 합법이니, 걱정하지 말고 많이 참여해주세요!」
「참여하실 분들은 포인트 베팅 부탁드립니다.」
「참고로 가장 많은 포인트를 걸고 예측에 성공한 분께는 플레이어 지명권을 드릴 예정입니다.」
이후 한참 동안 초월자들의 베팅 내용이 이어졌다.
「많은 분께서 베팅해주셨네요.」
「‘평시의 통로’ 쪽에 베팅한 분 중에선 ‘낮은 시선의 소유자’님께서 가장 많은 포인트를 걸어 주셨습니다.」
「‘전시의 통로’ 쪽에 베팅한 분 중에선 ‘허영의 사내’님께서 가장 많은 포인트를.」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1포인트를 제외한 자신의 모든 포인트를 ‘전시의 통로’ 쪽에 베팅합니다.]
[‘허영의 사내’님의 미소가 일그러집니다.]
「정정하겠습니다. ‘전시의 통로’ 쪽에 베팅한 분 중에선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께서 가장 많은 포인트를 걸어 주셨습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낄낄대며 1포인트를 ‘허영의 사내’에게 후원합니다.]
잠깐. 저 말대로 ‘전시의 통로’ 쪽이 베팅에서 이기게 된다면 플레이어 지명권은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한테….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플레이어 ‘정현’에게 손 하트를 날립니다.]
“제길.”
「시련 시작 전에 멘트가 너무 많았네요. 지루하셨던 분들껜 사죄의 인사 올립니다.」
「다음 시련은 무척 단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준비해보겠습니다!」
「그럼 안내도 모두 끝났으니, 바로 괴수 소환하겠습니다!」
[평시 상태가 중단됩니다.]
[전시 상태가 유지 중입니다.]
“아람이 데리고 당장 일행에 합류해.”
그렇게 말하는 이화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유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접은 우산을 펜싱 하듯 쥔 이화의 앞. 이제는 원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커진 검은 점들이 무언가 일어날 것을 예고하듯 일렁이고 있었다.
순간 일렁임 가운데 피처럼 붉은빛이 강하게 뻗어져 나왔다.
[C급 괴수 ‘츠치구모’가 등장합니다.]
괴수의 등장을 알림과 동시에 붉은빛은 희미해졌다. 그리고 검은 점들에 어떤 어두운 숲의 풍경이 비쳤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이하게 생긴 나무들과 그 위로 두 개의 달이 뜬 풍경.
검은 점 위에 비치던 풍경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일렁임만 남았다. 곧 그 일렁임을 걷고 무언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건 바로 거미. 물론 우리가 흔히 보던 거미와는 달랐다.
트럭만 한 거미의 몸통엔 호랑이 가죽이 뒤덮여 있는 것 같았으며, 거대한 몸집을 지탱하기 위해서인지 여덟 개의 다리 또한 무척 굵었다.
“정이화 헌터님, 저도 함께 남아서 싸울게요.”
“됐어. C급 괴수쯤은 나 혼자서도 충분해.”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이화는 제일 먼저 달려든 ‘츠치구모’의 머리를 우산으로 톡 건드렸다. 살포시 닿았음에도 칠판 긁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며 여섯 개의 눈을 부라린 ‘츠치구모’의 움직임이 손쉽게 멈추었다.
그 상태로 이화가 손목을 살짝 비틀자 우산이 닿은 곳을 중심으로 ‘츠치구모’의 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금을 따라 불길이 일며 ‘츠치구모’가 형태도 남지 않고 타버린 후 이화는 잘 보았냐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괴수가 얼마나 나올지 모르잖아요.”
“얼마나 나오든, 이번에 소환되는 괴수들 정도는 나 혼자서도 충분해.”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하나둘 ‘츠치구모’를 터뜨리는 모습에 결국 김아람은 이화의 말에 수긍했다.
“알겠어요.”
“이번 시련을 무사히 클리어하려면 중요한 건 체력 분배인 것쯤은 둘 다 알지? 그러니 어서 가서 누가 언제 괴수를 막고 언제 쉴지 인원 분배해 줘. 그동안 난 여기서 몸 좀 풀고 있을게.”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도와드리러 올게요.”
“됐다니깐. 그리고 우리 꼬맹이, 거미 무서워하잖아.”
“아, 아니거든요! 정현 헌터님, 어서 가요.”
이화의 놀림에 김아람은 몸을 홱 돌려 일행 쪽으로 향했다.
김아람을 따르기 전, 한 번 더 이화를 바라보았다.
“무리하진 마.”
“영화 같은 데에서 홀로 남는 사람들이 많이 죽곤 하잖아. 왜 그런 건지 알아?”
“응?”
“괜히 그런 말에 답했다가 사망 플래그 내뱉어서 그런 거야. 그러니 내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