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58화 (59/168)

[11. 검수지옥 (9)]

“이제 3시간밖에 안 남았네요.”

“그러게요. ‘아직도’ 3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하네요.”

두 번째 괴수 무리가 쏟아지기 시작한 지 3시간.

김아람과 이나은의 말다툼도 3시간째 이어지고 있었다.

“교대하기 전에 몸이라도 풀 수 있도록 김화영 헌터님하고 한성수 헌터님 미리 깨워드리는 게 어때요?”

“깨우기엔 살짝 이른 거 같지 않나요? 저야 잠이 없어서 괜찮지만, 다른 분들은 지금 깨웠다간 이따가 피곤해할걸요.”

솔직히 말해서 두 사람 모두 더 잤으면 좋겠다. 교대까지 남은 3시간 동안 둘의 말다툼을 더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절로 피곤해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둘을 같은 조에 배치한 건 실수였다.

회의 결과, 우리는 2교대로 괴수를 막기로 했다.

A조가 괴수를 막을 땐, B조가 잠을 청하고. B조가 괴수를 막을 땐, A조가 잠을 청하는 식으로 3일을 보내는 게 피로를 덜기에 가장 좋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에 따라 조를 2개로 나누었다.

A조 : 김동현, 송태섭, 임성윤, 정이화

B조 : 김아람, 김화영, 이나은, 한성수

이렇게 조를 나눌 때만 해도 김아람과 이나은을 한 조에 붙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A조와 B조 간의 전력 차도 적어지고, 이나은이 무모한 짓을 하지 않도록 김아람이 감시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두 사람의 상성이 맞지 않을 줄이야.

“이나은 헌터님, 또 이상한 꿍꿍이 세우느라 잠 안 오는 거 아니에요?”

“에이, 그럴 리가요. 근데 김아람 헌터는 한창 클 나이라 많이 자두는 게 좋을 텐데. 좀 더 안 자도 괜찮겠어요?”

지금은 A조가 괴수를 막고 B조가 잠을 자는 시간. 당연히 김아람과 이나은은 다음 교대로 나설 예정이니 꿈나라에 있어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잘만 자는 김화영과 한성수와는 달리 이 둘은 왜인지 모르게 일찍 일어나 내 앞에서 몇 시간째 기 싸움을 하고 있다.

“인간의 적정 수면 시간은 7시간이거든요. 오늘은 이미 충분히 자서 괜찮아요.”

“제가 알기로는 ‘성인’의 적정 수면 시간이 7시간이고, ‘어린이’는 조금 더 자야 하는 거로 아는데. 임수연 헌터, 제 말이 맞지 않나요?”

나를 도와 국자로 수프를 젓던 수연이는 잠깐 멈칫하더니 미소 지으며 답했다.

“죄송해요. 제가 워낙에 아는 게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저보단 이쪽이 아는 게 더 많으니까, 현이한테 물어보면 잘 대답해줄 거예요.”

수연이는 자신에게 튄 불똥을 내게 전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 A조 돌아왔을 때 바로 치료할 수 있도록 준비하러 가볼게요.”

“수연아, 분명 아까 한 시간 전에만 준비하면 된다고….”

“현이도 A조 분들 바로 식사할 수 있도록 제때 요리 끝내줘.”

수연이는 내게만 보이도록 윙크하더니 황급히 저편으로 가버렸다.

“정현 헌터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맞죠?”

“정현 헌터님, 아는 그대로 답해주셔야 해요.”

두 사람 눈빛을 보니, 어느 쪽 편을 들었다간 한동안 고생할 게 뻔하다. 이럴 땐 말을 돌리는 게 상책이다.

“그나저나 내가 말한 건 생각해봤어?”

“절대 안 돼요!”

말을 돌리기가 무섭게 김아람이 단호히 말했다.

“정현 헌터님은 E급 헌터에다가 비전투계 직업인 연금술사잖아요. 저희를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은 정말 감사하지만, 그래도 정현 헌터님이 C급 괴수를 상대하게 할 순 없어요.”

내가 두 사람에게 부탁했던 건, 나 역시 A조 혹 B조 어디든 상관없으니 함께 전투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어느 조에도 포함되지 않은 수연이와 난 전투와 관련 없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수연이는 치료 담당, 난 식사 담당으로 ‘야누스의 출입문’ 앞에서 벗어나지 않고 각자의 역할을 다하기로 정했다.

물론 원래 같았으면 이런 안전한 역할을 맡길 스스로 바랐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이화와 함께 하는 상황. 동생을 제일 위험한 최전선에 내보내고 홀로 안전하게 있고 싶진 않았다.

S급 헌터인 이화에게 내 도움 따윈 필요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시련에선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게다가 ‘캠비온 녹스’는 피와 비명이 없으니 지루했다며 남은 시련 동안은 그러지 않게 준비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지난번 시련에서 동상을 부수니 초월자가 현신한 것처럼 이번에도 ‘캠비온 녹스’가 어떤 짓거리를 해 놓았을 가능성이 큰데.

그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서. 혹 죽음 이후 귀환하여 넘기기 위해서라도 상황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그러니 전장에 합류하여 특이한 점이 있는지 살피고 싶어 두 사람에게 그런 부탁을 하게 된 것이었다.

“‘괴수’ 한정으로 나도 싸울 수 있어. 지난번에 B급 괴수인 ‘빙혈어’도 홀로 쓰러뜨렸다니깐. 이나은 헌터도 봐서 잘 알잖아. 어서, 나 거들어주는 게 어때?”

“괴수로 요리를 만들면, 그 괴수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쓰러뜨릴 수 있다고 하시긴 했죠.”

저 말대로 괴수로 요리를 만들어 레시피가 생성되면, 그 괴수는 만지는 것만으로도 쓰러뜨릴 수 있다. 즉, 거미 괴수로 만든 요리 레시피만 생성한다면 F급 헌터인 나도 싸울 수 있게 된다.

“그렇다 해도 아직까진 그쪽 도움받을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저희끼리도 충분한데, 굳이 정현 헌터까지 나설 필욘 없어요. 혹여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해요.”

“맞아요. 무엇보다 정현 헌터님이 저희를 돕기 위해선 그… 거미로 만든 요리를… 먹어야 한단 거잖아요.”

“그렇지.”

“그러니까 더더욱 안 되는 거예요.”

“더더욱 안 된다니? 설마 거미로 만든 요리 먹기 싫어서 그런 거야? 전엔 분명 이런 상황에 반찬 투정 같은 걸 하면 안 된다며?”

“그땐 괴수로 요리할지 몰랐으니까 그랬죠. 검수(劍獸)까진 어떻게 참고 먹겠는데, 거미는…. 거미잖아요. 거미를 어떻게 먹어요. 다리만 봐도…. 차라리 굶는 걸 택할게요. 어쨌든 안 돼요.”

“들었죠?”

김아람의 말에 이나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두 사람 분명 의견 대립하고 사이 안 좋은 거 아니었어? 이럴 땐 정말 사이가 좋네. 아주 보기 좋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요. 그만 비꼬시고, 본인 역할에 집중해주시죠.”

“제가 도울 건 없습니까?”

“네. 괜찮아요. 어차피 거의 끝나가요.”

“알겠습니다.”

이제 교대까지 1시간 남은 시점. 김아람과 이나은이 몸 좀 푼다며 어디론가 간 사이, 이번엔 한성수가 곁에 앉았다.

“저기, 혹시 요리하는 데 방해가 안 된다면 한 가지만 더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저으면서 끓이기만 하는 건데, 방해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요? 편히 물어보세요.”

“말로만 듣던 이화 오빠의 음식을 제가 먹고 있다니 믿기지 않아서 그런데. 정말 제가 도울 건 없는 겁니까?”

“앞 문장이랑 뒤 문장이랑 대체 무슨 상관인 거죠?”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괜찮다고 답했다.

저 물음에 괜찮다고 답한 게 벌써 몇 번째인지.

그런데도 여전히 한성수는 안절부절못한 채 손가락을 꼼지락대고 있다. 이대로면 또 도울 게 없냐고 물을 것만 같아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화가 평소에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아닙니다. 예의상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도울 건 정말….”

“김아람 헌터 좀 데려와 주실래요?”

이나은이 한성수와 내 사이에 앉으며 말했다.

“저 멀리 봉고 트럭 보이죠?”

“네, 보입니다.”

“저 트럭에 뭔가 이상한 게 있는 것 같다며 확인하겠다고 홀로 가버렸거든요.”

이나은의 말에 한성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김아람 헌터가 그런 말을 했단 말입니까? 그런 말을 허투루 할 사람이 아닌데…. 정말 뭔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럼 큰일이잖아!”

어느새 대화에 끼어든 김화영은 어딘가 어색하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은아, 왜 아람이 혼자 보낸 거야? 같이 갔어야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제가 얼른 가서 데리고 오겠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다른 분들은 정현 헌터와 임수연 헌터 곁을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네네. 감사합니다.”

한성수는 멍한 눈을 한번 끔뻑이고는 이나은이 가리킨 트럭 쪽으로 달려갔다.

“사실은 트럭에 뭔가 있는 것 같으니 확인 좀 해달라고 제가 김아람 헌터에게 부탁한 거긴 하지만요. 자, 이제 당분간 방해할 사람은 없으니 이야기 시작해 볼까요?”

“이야기라니?”

“이번 시련을 클리어할 방법에 관해 이야기해야죠.”

이나은은 트럭 쪽을 바라보던 날 잡아끌어 자리에 앉혔다.

“그런 이야기 할 거면 김아람 헌터랑 한성수 헌터를 딴 데 보낼 필요가 없었잖아.”

“지금은 목표가 같아서 정이화 헌터 일행과 함께한다지만, 정이화 헌터를 제외한 나머지 헌터들은 저한텐 ‘남’이에요.”

“남이라니?”

“위험한 순간이 생기면 가차 없이 버릴 거란 뜻이죠. 저희 일행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필요에 따라 이용하기도 할 거란 뜻이기도 해요. 이해됐어요?”

순간 내 눈앞에서 수연이를 죽이던 이나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새롭게 합류한 인원들이 이나은의 기준을 넘어서지 못한 것 같다. 이건 지금 당장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니, 이나은에게 그들 역시 일행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것을 차근차근 보여주어야 할 것 같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화랑 지금까지 함께해 준 사람들을 함부로 버릴 수는 없으니.

“일단은 알겠어. 그래서 시련을 클리어할 방법으로 생각해 둔 거 있어?”

“네.”

“소환되는 괴수를 모두 쓰러뜨린다. 같은 방법은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죠. 제가 생각한 방법은 김화영 헌터의 스킬을 이용하는 거예요.”

이나은이 생각한 방법은 이렇다.

우선 김화영과 이나은 둘이서 반대편 구역으로 넘어간다. 이후, 한 명은 법무팀 헌터들과 전투하며 그들을 방해하고 다른 한 명은 괴수가 통로를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러고 난 뒤, 자정이 지나면 곧바로 김화영의 스킬을 써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여기까지가 이나은이 생각한 방법인데, 내가 생각했던 방법과 얼추 비슷했다. 중요한 부분은 달랐지만.

“김화영 헌터 스킬은 어떻게 쓸 거예요? 돌 같은데 표식 새겨서 반대편 통로로 던질 건가요?”

“아니야. 아까 법무팀장하고 악수할 때 몸에 표식 새겨뒀거든. 거기로 이동할 거야.”

“네? 그때 새겨뒀다고요?”

“응. 혹시 쓸 일 있을까 봐.”

“근데 하루 지났잖아요. 표식 지워진 거 아니에요?”

“엥? 내가 하루 지나면 표식 지워진다고 했었나? 아니야, 포인트 내면 하루 더 표식 안 지워지게 할 수 있어! 대단하지!”

확실히 어제 새긴 표식이 지워졌다는 이야기만 몇 번 했지 하루가 지나면 표식 지워진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긴 하다.

“그런 이야기는 미리 해두면 좋았잖아요.”

“안 물어봐서 안 궁금한지 알았지.”

“결론적으로 김화영 헌터의 스킬을 사용하는 데엔 아무 문제 없는 거네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김화영은 자랑스럽게 손가락으로 v 자를 만들었다.

“그럼 이제부턴 이나은 헌터가 말해준 계획에서 몇 가지 좀 수정해볼게요.”

“역시 법무팀 헌터들과 싸운다는 게 불안하신 거죠? 전 진짜 괜찮….”

“우선 김화영 헌터와 반대편 구역으로 넘어갈 사람은 이나은 헌터가 아니야.”

이나은의 말을 끊고 말하자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누가 나랑 같이 가?”

“제가 김화영 헌터랑 함께 반대편 구역으로 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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