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검수지옥 (10)]
“제가 아니라 정현 헌터가 간다고요?”
고개를 끄덕이며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혹시 반대편 통로에 괴수를 통과시킬 구체적인 방법도 생각해뒀어?”
“가서 법무팀 헌터들을 쓰러뜨리다 보면 절로 인원 공백이 생길 테니까, 그러다 보면…. 음….”
“거기까진 자세히 생각 안 했나 보네.”
“…네. 저희가 박무성 헌터처럼 괴수를 조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 괴수를 법무팀 헌터 몰래 통로 앞까지 옮기기에도 무리가 있으니까. 가서 방해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니. 굳이 살아있는 괴수를 옮길 필욘 없지.”
시련의 클리어 조건은 ‘3일간, 본인에게 배정된 통로로 괴수가 통과하지 못하도록 수비’하는 것. 이 조건 어디에도 괴수가 살아있어야 한다는 말은 없다.
“뭐, 괴수 시체라도 옮길 생각이에요?”
“정답. 그러면 법무팀 헌터들과 오래도록 싸우지 않아도 돼.”
이후 내가 생각했던 방법에 관해 자세히 이야기했다.
“결론적으로 그 방법을 쓰기 위해선 정현 헌터를 괴수가 나오는 곳까지 데리고 가야 한단 거네요.”
“그런 셈이지.”
이야기를 마치자 이나은은 잠시 고민하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참, 이 작전에 대해선 저희 셋만 알고 있는 거예요. 정 필요하다 싶으면 송태섭 헌터나 임수연 헌터한테만 말하도록 해요.”
“그러니까 뭔가 비밀 요원 된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코드 네임 같은 거 만들까? 난 아카샤라고 불러줘. 예쁘지?”
“네네, 그렇게 불러드릴게요.”
김화영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답을 뻔히 아는 물음을 던졌다.
“정말 다른 사람들한텐 도움 안 구해도 되겠어?”
“아까 말했잖아요. ‘남’이라고. 그리고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이나은은 침을 한 번 삼키더니 조심히 말을 꺼냈다.
“새로 합류한 사람들이 회사 측 헌터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
“공방전에서 우리랑 같이 방어팀 헌터들을 쓰러뜨리고 마지막엔 소금 병사들까지 막아준 사람들이야. 당연히 회사 측 헌터일 리가 없지.”
“그건 모르는 거죠. 방어팀 헌터들은 어차피 버릴 예정이라 쓰러뜨린 거고. 소금 병사들은 본인이 죽을 수도 있어서 막아준 거일 수도 있잖아요.”
“너무 억측 아니야?”
“제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결국 회사 측 사람이었어요!”
이나은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끝마쳤다.
“그러니 이제 막 본 사람들을 함부로 믿을 순 없어요.”
생각이 짧았다.
법무팀 건물에서 아버지 친구가 회사 측 사람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들은 지 얼마 안 된 터이다. 지금은 이나은이 이 문제에 대해 예민하게 굴 수밖에 없다는 걸 생각했어야 했다.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는 데에 미안함을 느끼며 결국 이나은의 말에 따라주기로 마음먹었다.
“네 말대로 할게.”
“그렇다고 정이화 헌터를 못 믿는다는 건 아니었어요. 만약 그런 뜻으로 들렸다면…. 죄송해요.”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단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
어색한 침묵이 흐를 때, 김화영이 뜬금없는 단어를 내뱉었다.
“젤리랑 캔디.”
“네?”
“코드 네임! 현이가 젤리고 나은이가 캔디인 거야. 오케이?”
조용히 있다 싶더니, 계속 코드 네임을 생각하고 있던 건가.
“캔디요?”
“갑자기 단 게 땅겼거든.”
김화영은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듯, 자랑스럽게 어깨를 쫙 폈다. 그를 본 이나은은 웃으며 알겠다고 답했다.
“그럼 코드 네임도 해결됐으니,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할게요. 두 분 다 진짜 조심하셔야 해요. 뭔가 잘못된다 싶으면 바로 김화영 헌터 스킬로 돌아오세요. 알겠어요?”
“알았어.”
“그러면 제가 이따 김아람 헌터랑 한성수 헌터 시선 돌릴 테니, 시간 되면 두 분은 계획대로 움직여주세요.”
“저요?”
뒤를 돌아보니, 김아람과 한성수가 와 있었다.
“방금 저 부르시지 않았어요? 그나저나 이나은 헌터님, 저한테 할 말 있지 않아요? 트럭에 뭐가 있다고요?”
다행히 우리가 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 듯 김아람은 곧장 이나은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꼈다가 괜히 새우 등 터지기 싫었던 난 슬금슬금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시간이 흘러 자정까지 30분 남은 시점. 어느덧 계획을 실행할 시간이 되었다.
“현아, 더 안 자도 괜찮겠어?”
“응. 어차피 곧 교대할 타임이잖아. B조 인원들 맞이하려면 미리 일어나 있어야지.”
슬슬 A조 인원들이 일어날 테니, 이젠 김화영한테 가 봐야 한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알겠어.”
수연이에겐 핑계를 대고 화장실로 쓰고 있는 차 뒤편으로 걸어갔다.
“이쯤 왔으면 안 보이겠지.”
수연이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난 뒤, 엎드린 채로 B조 쪽으로 기어갔다.
제일 가까운 괴수 시체에 이르자 김화영이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젤리, 여기야.”
“젤리요?”
“코드 네임! 내 코드 네임도 모르는 거 아니야?”
금방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아직도 기억할 줄이야.
더 귀찮아지기 전에 장단을 맞추어주었다.
“아카샤인 거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전투는 끝났어요?”
“진작에 끝났지. C급 괴수 40마리밖에 안 나왔는걸.”
“김아람 헌터랑 한성수 헌터는요?”
“캔디가 데리고 저리로 갔어. 혹시라도 괴수가 더 튀어나올 수 있으니 자정까지 제대로 살펴야 한다고 했거든. 그러니까 아무 말 없이 따라가더라.”
“잘됐네요.”
다시 한번 김아람과 한성수가 주변에 없는 걸 확인하고 괴수 시체에 손을 댔다.
[‘특급 냉장고’에 ‘츠치구모의 사체’가 보관됩니다.]
곧 거대한 거미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 ???? ??’ 장비로 인해 플레이어 ‘정현’이 ‘은신’ 상태가 됩니다.]
이후 반지를 껴서 내 모습을 감추었다.
“갈 준비 끝난 거지?”
“네. 근데 뭔가 찝찝하네요.”
“찝찝하다니? 어떤 게?”
“그것까진 잘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들 몰래 움직이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그렇다고 대놓고 할 순 없잖아요. 이나은, 아니 캔디랑 약속한 것도 있고.”
“그건 그렇지. 그럼 바로 이동할게.”
그 말에 김화영의 팔뚝을 붙잡았다. 그를 동의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순식간에 세상이 일그러졌다.
일그러진 세상이 원래대로 펴졌을 땐, 눈을 휘둥그레 뜬 법무팀장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김화영은 자연스레 법무팀장과 악수하며, 인사말을 건넸다.
“굿나잇! 나잇이라고 하기엔 너무 밝나? 어쨌든, 판사 아줌마 잘 지내고 있었어?”
김화영이 법무팀장의 손을 흔드는 동안,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선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은 법무팀 헌터들이 위치한 구역의 중간부. 헌터 대다수는 괴수가 소환되는 쪽에서 대기 중인 터라 법무팀장의 뒤쪽, ‘야누스의 출입문’ 쪽에는 헌터 셋뿐이었다.
“그, 그쪽이 어째서 여기에….”
“당연히 아줌마랑 놀고 싶어서 왔지.”
그 말과 함께 김화영은 단검을 뽑아 들었다.
“내가 아줌마랑 놀 동안 젤리는 빨리 입 안에 들어가.”
“젤리?”
“아줌마도 젤리 좋아해?”
“대화 주제가 너무 뜬금없지 않나요?”
김화영이 준 신호에 난 조심조심 ‘야누스의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곧 내가 이동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김화영은 법무팀장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저희를 쓰러뜨려서 더 많은 괴수가 쏟아지기 전에 시련을 끝내겠단 생각이신 것 같은데.”
기습적인 공격에도 법무팀장은 너무나 침착했다. 그녀는 지갑으로 단검을 간단히 쳐내곤 자연스럽게 김화영의 턱까지 올려 쳤다. 이후 살짝 공중에 띄워진 김화영의 멱살을 잡아 바닥에 내리찍기까지. 아스팔트가 파일 정도의 충격에 김화영은 피를 토해냈다.
“그런 계획이었다면 적어도 몇 명은 더 데리고 왔어야죠. 게다가 전 S급 헌터. 놀 상대를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요?”
“내 쪽은 신경 쓰지 마.”
“알겠습니다. 최소한의 배려는 여기까지예요. 이제 괴수가 소환될 시간이 다 되어 가니 다른 헌터들은 그쪽에 집중하세요. 남의 구역에 기어들어 온 쥐새끼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김화영이 신경 쓰지 말라고 한 건 분명 내게 한 말이다.
저 말대로 지금은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먼저다. 애써 두 사람의 싸움에서 시선을 돌리고 ‘야누스의 출입문’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야누스의 출입문’으로 향하는 길에 서 있던 법무팀 헌터들은 반지를 낀 내가 지나가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법무팀장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덕분에 아무 방해 없이 ‘평시의 통로’ 바로 앞에 도착했다.
[B급 괴수 ‘조로구모’가 등장합니다.]
도착하고 얼마 안 지나자 타이밍 좋게 기다렸던 글씨가 새겨졌다. 자정이 지났으니 이젠 내가 시선을 끌 차례다.
“법무팀장!”
목청 높여 외치며 반지를 빼내자, 법무팀 헌터들의 시선이 단번에 내게 쏠렸다. 법무팀장도 일방적으로 이어가던 공격을 멈춘 채 시선을 내게 고정했다.
[‘빛나는 눈의 전략가’가 당신의 전략을 평가할 준비를 마칩니다.]
[‘방구석 만화광’님이 눈을 빛냅니다.]
“초월자님이 순간이동 시켜준 건 아닌 것 같은데, 그쪽은 어떻게…. 그보다 왜 통로 앞에?”
“준비한 선물이 있거든.”
“선물이요?”
“‘츠치구모의 사체’ 꺼내줘.”
[‘특급 냉장고’에 보관된 ‘츠치구모의 사체’가 방출됩니다.]
거대한 거미 사체가 내 뒤에 나타나자 당황한 법무팀장이 외쳤다.
“모두 저자를 막아!”
“그러기엔 늦지 않았을까?”
허겁지겁 달려오는 헌터들에게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준 뒤, 그대로 뒷걸음질 쳐 거미 사체를 ‘평시의 통로’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마포대교-NE 구역 ‘평시의 통로’로 괴수가 통과했습니다.]
[마포대교-SW 구역, 괴수 소환이 중단됩니다.]
[‘빛나는 눈의 전략가’님이 당신의 전략에 실망합니다.]
[‘호색한 찬탈자’님이 분노합니다.]
[‘번개의 아내’님이 속 시원해합니다.]
“미안하게 됐네.”
[마포대교-NE 구역에 실패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SSS급 괴수 ‘레비아탄’이 등장합니다.]
순간 엄청난 진동과 함께 다리를 뚫고 무언가가 솟아났다.
솟아난 건 거대한 악어.
“아줌마, 놀아줘서 고마워!”
갑자기 튀어나온 괴수에 법무팀장이 당황한 틈을 타 김화영이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몸이 자유로워진 김화영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 헌터 셋을 쓰러뜨리고 내 옆에 섰다.
“그럼 안녕!”
거대한 입으로 다리를 씹어먹는 ‘레비아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김화영의 어깨를 잡자 순식간에 세상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