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61화 (62/168)

[11. 검수지옥 (12)]

“갈 준비 끝난 거지?”

찝찝함을 느꼈을 때, 바로 눈치챘어야 했다.

이나은과 세운 작전엔 결함이 있었다는 것을.

실패 페널티와 다리를 둘러싼 차단막. 작전을 짜면서 왜 이 두 가지를 고려하지 않았을까.

그 탓에 차단막에 가로막혀 도망치지도 못한 채 ‘레비아탄’과 그 뒤에 따라온 ‘업강독충’에게 동료를 모두 잃고 마지막엔 나마저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제길.”

“젤리, 바로 이동할까? 이제 곧 자정이야.”

“어, 네?”

“어디 있어? 손이라도 잡아야 같이 이동할 텐데. 목소리가 여기서 들렸으니까 이쪽인가?”

지난번 죽임을 당한 장면에서 벗어나니 김화영이 손을 이리저리 휘젓는 모습이 보였다.

허공을 더듬는 김화영의 손을 황급히 피하며 다급하게 외쳤다.

“안 돼요!”

“안 된다고? 뭐가?”

“작전은 취소예요.”

“취소? 인제 와서 갑자기?”

작전대로 했을 경우, ‘레비아탄’을 상대해야 한다는 크나큰 문제가 생긴다.

만일 ‘레비아탄’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작전대로 하는 게 낫겠지만. S급 헌터인 법무팀장과 이화조차 ‘레비아탄’을 쓰러뜨리지 못했으니, 여기 있는 인원들로는 그 괴수를 쓰러뜨릴 수 없다고 보는 게 맞다.

설령 ‘레비아탄’을 어떻게 쓰러뜨린다고 쳐도 그 뒤에 따라오는 ‘업강독충’까지 쓰러뜨릴 순 없을 테고.

그러니 그냥 시련의 클리어 조건에 충실히 임하는 편이 낫다.

“이만 돌아가죠.”

반지를 빼며 말하자 김화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캔디랑 이야기 다 끝낸 거 아니었어?”

“저희가 놓쳤던 게 생각났거든요.”

“어떤 건데?”

“SSS급 괴수가 나온다는 부분이요.”

“첨에 이야기할 땐, SSS급 괴수가 나오니까 더 좋다며. 우리 대신 법무팀 헌터들 힘 빼 줄 거라고.”

이나은과 작전을 짤 때 저렇게 이야기하긴 했다. 다만, 그때는 ‘레비아탄’이 법무팀 헌터를 모두 쓰러뜨린 뒤 우리까지 전부 죽일지 몰랐던 시점. 괴수의 강력함을 알고 난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그 괴수가 얼마나 강할지 모르잖아요. ‘캠비온 녹스’가 이번 시련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고 했으니까, 단순한 괴수는 아닐 게 분명해요.”

“그래야 더 좋지. 법무팀 헌터들 확실히 쓸어 줄 테니까.”

“실패 페널티는 ‘해당 구역에 SSS급 괴수 출현’이잖아요. 여기엔 그 괴수가 해당 구역의 플레이어만 공격한다는 말은 없어요.”

“네 말은 괴수가 법무팀 헌터들을 쓰러뜨리고 우리까지 공격할 수 있다는 뜻이야?”

“맞아요. 괜히 불러냈다가 괴수가 저희 구역으로 넘어오면 차단막 때문에 다리 밖으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상대해야 해요.”

“아까 찝찝하다고 말했던 게 그거였구나.”

“네. 위험을 감수할 바엔 그냥 이대로 시련이 끝날 때까지 괴수 쓰러뜨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시시해졌네.”

김화영은 시무룩해진 채로 ‘야누스의 출입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멈추어 섰다.

“그런데 어떤 괴수가 나오는지 아는 거야?”

“그건 저도 당연히 모르죠.”

“그래? 너무 겁에 질려 있길래 알고 있는지 알았네.”

[스킬 ‘성역’이 발동됩니다.]

[스킬 ‘성역’으로 인해, 플레이어 ‘임수연’이 ‘전투 불가’ 상태가 됩니다.]

[‘성역’ 안의 아군 판정 플레이어의 ‘회복력’이 50 상승합니다.]

[‘성역’ 안의 아군 판정 플레이어의 피로가 모두 회복됩니다.]

“오빠 말 들었을 땐, 거짓말인지 알았거든요? 근데 진짜 몸이 가벼워졌어요!”

“엄청나지? 우리 수연이 대단하다니까.”

마지막 소환 시점 직전, 일행은 수연이의 스킬 ‘성역’ 안에서 피로를 해소했다.

“근데 이번에도 괴수 640마리 나오는 거야?”

“네. 단순 계산으론 각자 괴수 80마리씩 맡아야 하는데. 제가 절반 정도는 홀로 소화할 테니까 나머지 괴수들만 어떻게 해 주세요.”

이화가 김화영에게 말한 것처럼 이번에 소환될 A급 괴수는 총 640마리.

고작 네 명이 막아 내기엔 너무 많은 수라 마지막 날만큼은 수연이의 스킬로 피로를 해소하며 다 같이 괴수를 막아 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오늘 총 세 번의 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렀고, 이제 마지막 전투만을 앞두고 있다.

전처럼 선두엔 이화가. 후방엔 수연이와 나를 지킬 김아람과 노인, 송태섭이 배치되었고. 그 외의 인원들은 선두에서 놓친 괴수를 처리하기 위해 중간부에 배치되어 전투 준비를 하고 있다.

“뭐 걱정되는 거라도 있어?”

다리를 살피며 상황을 정리하는데, 송태섭이 다가왔다.

“아니요. 아까도 잘 막아 냈는데, 걱정될 게 뭐가 있겠어요.”

“그런 것치곤 표정이 너무 어두운데?”

역시 이런 면에서 송태섭을 속이기란 불가능인가.

“그냥 찝찝해서요.”

“찝찝하다. 어떤 게?”

여섯 시간 전에 이미 이화의 활약으로 A급 괴수 640마리를 무사히 막아 낸 터라, 마지막 전투는 딱히 걱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나은과 작전을 짰을 때처럼 어딘가 찝찝하다.

“너무 시련이 쉬운 게 아닌가 싶어서요.”

초월자들이 지루하지 않게 준비했다는데, 법무팀이나 우리 일행 모두 별일 없이 괴수를 막아 내고 있다? ‘캠비온 녹스’가 바랐던 전개는 이런 게 아닐 테다.

“그래서인지 뭔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네 동생이 너무 강해서 시련이 상대적으로 쉬워 보이는 게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네가 찝찝하다면 뭔가 있다는 거겠지. 한번 잘 생각해 봐. 일단 시간이 되었으니 난 내 자리로 가 볼게.”

6시 정각이 가까워지자 송태섭은 이야기를 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러 갔다.

시간이 흘러 6시 정각.

[A급 괴수 ‘아라크네’가 소환됩니다.]

검은 점에서 괴수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마지막 날 소환된 괴수는 거미의 몸에 사람의 상반신이 달린 ‘아라크네’. 상반신이 인간의 모습인 만큼 각기 다양한 무기를 들고 있었으며, 칠판 긁는 소리로 대화라도 나누는 건지 이전과 달리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공격을 펼쳐 왔다.

물론 이화 앞에선 그런 위협적인 공격도 아무 의미 없었지만.

소환된 괴수 대부분은 첫발을 내딛기도 전에 이화가 내뿜는 불길과 냉기 앞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으며, 어쩌다 이화의 공격에 쓰러지지 않은 괴수가 있다 해도 금방 이나은의 선에서 정리되었다.

“이번에도 별일은 없겠네.”

예상대로 이화의 활약 속 마지막 소환 시점 역시 이전과 마찬가지로 무난하게 흘러갔다.

[마포대교-SW 구역, 소환된 모든 괴수가 쓰러졌습니다.]

[‘폐허가 뒤따르는 자’ 님이 플레이어 ‘정이화’의 순수한 힘에 심취합니다.]

[‘알 수 없는 자’ 님이 플레이어 ‘임수연’의 시련 클리어에 분개합니다.]

워낙 괴수의 수가 많은 탓에 자정이 되기 직전에야 마지막 괴수를 쓰러뜨리긴 했으나, 부상자 없이 시련은 마무리됐다.

[‘전시의 통로’를 지켜 냈습니다.]

[시련 통과!]

[‘평시의 통로’를 지나 ‘개선’을 알리시길 바랍니다.]

[‘개선’을 알리면 다리를 둘러싼 차단막을 통과할 수 있게 됩니다.]

“시련도 끝났으니 이대로 공덕에 가서 실험실 찾으면 되는 거죠?”

“응. 작전을 세웠던 게 무색할 정도로 별일 없이 시련이 끝났네.”

“작전을 세웠을 때만 해도 정이화 헌터가 주둔지에서 봤었던 것보다 훨씬 강해져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역시 우리 동생이라니까. 옛날에 고등학교 다닐 때도.”

“그만. 자정 지났으니 통로부터 지나가죠.”

내 아름다운 추억 회상을 끊고 이나은이 ‘평시의 통로’로 향하는 순간.

“정현 헌터님 일행도 시련에서 통과하셨나 보네요.”

‘전시의 통로’에서 법무팀장이 나타났다.

“이래서 인사과장님께서 주목하고 있는 거군요.”

“그동안 피곤했을 테니 이번엔 그냥 지나가는 게 어때?”

“동료분은 정현 헌터님과는 다르게 생각하나 본데요? 죄송한데, 잠시 비켜 주시겠어요?”

법무팀장은 살기를 내뿜는 이나은을 밀쳐 내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정현 헌터한테서 당장 안 떨어져?”

“오빠한테 손대는 순간, 너희 모두 이 다리에서 못 빠져나갈 줄로 알아.”

이나은과 이화가 경고하자 법무팀장은 지갑을 높이 치켜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내 오른뺨을 향해 지갑을 내리찍었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저흰 이 다리에서 빠져나갈 생각이 없거든요.”

그 한 번의 공격으로 땅에 엎어진 날 다시 일으키며 법무팀장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인사과장님께서 그쪽 일행을 회사에 보고하지 않는 이유는 알고 있지만. 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법무팀장은 어느새 냉정을 잃은 광기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쪽은 명백한 회사의 적. 인사과장님께서 높게 평가하는 만큼 정현 헌터님은 언젠가 반드시 회사에 해를 끼칠 게 분명해요. 그런 자를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어요.”

그 말과 동시에 엄청난 굉음이 연속해서 들려왔다. 굉음이 들려오는 쪽을 보니 다리 곳곳에 놓인 차가 연쇄적으로 폭발하고 있었다.

“무슨 짓을?”

“당신들과 함께 제가 이곳에서 죽는다면, 인사과장님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시 회사를 위한 판단을 해 나갈 거에요.”

결국 다리는 폭발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러면 그쪽도 다리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건 똑같을 텐데?”

“아까 말하지 않았어요? 저흰 다리에서 빠져나갈 생각이 없다고요. 애초부터 정현 헌터님 일행이 시련을 통과하면 다리를 폭파할 예정이었어요. 그를 위해 일찍이 마포대교에 와서 미리 준비해 둔 거니까요.”

“왜 그렇게까지….”

“회사는 반드시 실험에 성공해야만 해요. 당신들을 막아 인류의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면, 저희의 목숨쯤은 얼마든지 바칠 수 있습니다.”

인류의 미래?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 순간 글씨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초월자님들께서 내기를 거셨는데, 무승부가 난 구역이 존재한다니. 너무너무 슬픈 일이에요.」

「초월자님들과 의논한 결과, 무승부가 난 구역에서도 승부를 낼 수 있도록 제가 살짝쿵 도와주기로 했답니다.」

「하지만 힘이 미약한 관계로 모든 구역을 도울 순 없으니, 한 곳만 딱 집어서 도와주겠습니다.」

「그곳은 바로!」

「마포대교입니다.」

[SSS급 괴수 ‘레비아탄’이 소환됩니다.]

[SSS급 괴수 ‘레비아탄’이 소환됩니다.]

[‘폐허가 뒤따르는 자’ 님이 난장판에 칼춤을 춥니다.]

[‘빛나는 눈의 전략가’ 님이 어긋난 형평성에 어이없어합니다.]

「시련을 통과할 만큼 강하니, SSS급 괴수쯤은 아무 문제 없겠죠?」

「지금부터 어느 쪽이 더 오래 살아남는지.」

「승부는 그 결과로 결정짓도록 하죠!」

망할. 어쩐지 너무 쉽게 흘러간다 싶더니. ‘레비아탄’이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나.

“마침 좋네요. 초월자님들께서도 저희의 위대한 실험이 성공하길 바라시는 게 틀림없어요.”

폭파된 다리. ‘레비아탄’ 두 마리. 앞을 막아선 법무팀장까지.

최악의 상황이 겹치고 겹쳐 여기서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모두 이자들이 다리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으세요.”

“차라리 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보내 주는 게 어때?”

일단은 시간이라도 끌면서 어떻게든 방법을.

“그쪽에게 시간 따윈 주지 않을 겁니다.”

곳곳에서 벌어진 전투.

그 사이, 욕설을 내뱉으며 달려오는 이나은.

내 앞에서 지갑을 치켜든 법무팀장.

그 모든 장면은 슬로우 모션처럼 흘러가다가.

지갑이 내 목에 닿자 ‘뚝-’ 소리와 함께 다시 원래의 속도로 돌아왔고.

“그럼 안녕히.”

법무팀장이 뭐라 중얼거리는지 듣기도 전에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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