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62화 (63/168)

[11. 검수지옥 (13)]

“갈 준비 끝난 거지?”

“흐으읍, 하아-”

눈을 뜨자마자 심호흡부터 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에는 반지를 빼내 목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 더듬거렸다.

다행히 법무팀장의 지갑에 부러졌던 목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젤리, 혹시 긴장한 거야? 조금만 숨 고르고 출발할까?”

출발?

그 단어에 그제야 김화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게 손을 뻗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멍하니 손을 바라보는데 별안간 피범벅이 된 손이 겹쳐 보였고. 그에 당황하여 뒤로 물러서니 ‘레비아탄’ 때문에 동료 모두가 죽는 장면이 떠올랐다.

“안 돼요!”

“안 된다니?”

“작전대로 하면 절대 안 돼요! 그랬다간 모두가 죽어요! 잠시 생각 좀. 생각할 시간 좀 주세요.”

반대편 통로에 괴수를 통과시키는 것도.

시련이 끝날 때까지 괴수를 쓰러뜨리는 것도.

모두 답이 아니었다.

이젠 세 번째 답을 제시해야 하는데, 다른 방도가 있긴 한 건가 싶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번 시련에서 살아남는 거야?”

“뭔가 큰 문제가 생겼나 보네. 알았어. 모두가 죽으면 슬프니까 잠시 조용히 있을게. 차분히 생각해 봐.”

저 김화영이 차분히 생각하라는 말을 하다니.

김화영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곤 전혀 생각되지 않는 멘트를 듣고 나니 의외로 마음이 가라앉았다.

“대신에 이제 곧 자정이니, 작전대로 할 건지 안 할 건지는 빨리 정해 줘.”

“노력해 볼게요.”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처음부터 찬찬히 생각해 보자.

우선 가장 최근에 겪은 죽음부터.

우리 일행이 시련을 무사히 클리어했을 때, 법무팀 역시 시련을 클리어하면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하나는 법무팀장이 다리를 폭파한 것.

법무팀장이 회사에 왜 그렇게 과잉 충성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본인도 다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걸 알면서도 그런 짓을 벌인 걸 보니 대화로 설득할 수 있는 상대는 확실히 아니다.

즉, 내가 어떻게 하든지 간에 법무팀장은 다리를 폭파할 거고. 그로 인해 법무팀을 쓰러뜨리더라도 ‘업강독충’이 있는 강을 건너지 않으면 다리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또 다른 문제는 마포대교가 ‘캠비온 녹스’의 도움을 받는 곳으로 선정되어 ‘레비아탄’이 두 마리씩이나 나온다는 것.

이번에 겪은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법무팀장이었지만, 사실 법무팀장이 다리를 폭파하거나 나를 죽이지 않았다고 해도 결국엔 ‘레비아탄’ 때문에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초월자. 아니, 그 미친놈들 때문에 시련을 클리어하는 방법으론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다시 법무팀 측이 시련에서 탈락하도록 손쓰는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하나?

그 방법을 쓰더라도 ‘레비아탄’을 피해 다리에서 벗어날 방법을 마련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는데.

차단막을 지나 다리에서 벗어날 방법은 시련을 클리어한 뒤 ‘평시의 통로’를 통과하거나 시련이 완전히 종료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

‘레비아탄’이 그때까지 차분히 기다려 줄 리가 없으니, 이 방법은 시련이 끝나기 직전에 쓰지 않는 이상 소용이 없다고 봐야 한다.

“어? 시련이 끝나기 직전?”

“젤리, 뭔가 생각난 거야?”

“네.”

어쩌면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가면서 법무팀과 초월자 모두에게 엿 한 번 제대로 먹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작전은 내용을 조금만 변경해서 진행하는 거로 하죠.”

“굳! 그럼 시간 없으니까, 최대한 빨리 설명해 줘.”

“일단 반대편으로 넘어갈 사람은 김화영 헌터….”

“코드 네임!”

“…아카샤 홀로예요.”

“나 혼자 간다고?”

“네. 그리고 아카샤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할 일을 설명하자 김화영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알겠다고 답했다.

“중요한 건 절대 법무팀 헌터 그 누구에게도 들키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알았어. 근데 젤리가 말한 방법대로 하면 아람이나 다른 사람들한텐 들킬 수밖에 없겠는데?”

“그 부분은 제가 지금부터 해결해야죠.”

김화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반지를 꼈다.

모습이 사라진 김화영을 몇 번 불러보았으나 답이 없는 것으로 보아 반대편 구역으로 바로 넘어간 듯하다.

“제대로 잘해 주시겠지? 그나저나 저 스킬은 썼을 때 왜 글씨가 안 적히는 거지? ‘한솥밥 먹는 사이’ 특성은 제대로 적용되었을 텐데?”

[‘방구석 만화광’ 님이 부족한 설정을 추가합니다.]

“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그럼 난 내 할 일을 하러 가 볼까.”

김화영을 반대편 구역으로 보낸 뒤. 다음으로 한 일은 김아람과 이나은을 한자리에 모으는 것.

“젤리? 아카샤는 어디 가고 왜 혼자 계세요?”

“아카샤는 지금 반대편 구역에 있어.”

“네? 같이 가기로 했잖아요. 뭐가 잘못되기라도 한 거예요?”

“아니, 전부 계획대로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계획대로라고요?”

이나은은 작전과 달리 나 홀로 나타난 데에 혼란스러운 듯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다 설명해 줄게. 그전에 나랑 김아람 헌터에게 좀 가자.”

“김아람 헌터는 왜?”

“따라와 보면 알 거야.”

의구심을 품은 것 같긴 하지만, 이나은은 다행히 김아람의 앞까지 따라와 줬다.

“김아람 헌터,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죄송해요. 김화영 헌터님이 사라져서요. 그분을 찾는 게 우선이라,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해도 될까요?”

“내가 할 이야기가 김화영 헌터의 행방과도 관련되어 있거든.”

“네? 어디 계신지 알고 있는 거예요?”

“응. 법무팀 측 구역에 가 있어.”

내 말에 김아람과 이나은 모두 당황했다.

“법무팀 측 구역이요? 거기엔 어쩌다가?”

“그걸 지금부터 설명해 주려고 하는데, 괜찮겠어?”

“네. 부탁드릴게요.”

김화영이 내가 부탁한 일을 모두 끝내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을 법무팀 측 구역에서 보내야 한다. 적어도 몇 시간 동안은 모습이 보이지 않을 테니, 당연히 B조의 다른 헌터들은 김화영의 공백을 눈치챌 수밖에 없다.

그에 대한 핑계를 마련할 바엔 김아람에게도 작전에 관해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는 편이 낫다. 강이란에게 정보를 흘리고 있는 사람의 존재를 알려 준 사람인 만큼 믿고 작전에 관해 설명할 수 있기도 하고.

“처음 우리 계획은 나랑 김화영 헌터가 반대편 구역으로 넘어가서 괴수 시체를 ‘평시의 통로’에 통과시키는 거였어.”

“그런 계획을 세우셨다고요? 저한텐 그런 말씀까지 하셔 놓고.”

김아람이 언급한 ‘그런 말씀’이란 내가 전에 이화와 본인에게 했던 부탁을 말하는 거일 테다.

그때 ‘이나은 헌터, 항상 냉정하다가도 회사에 관한 일이 되면 그러지 못해서…. 그러니 무모한 짓 하지 않도록 두 사람이 지켜봐 줘.’라고 말해 놓고 뒤에서 이런 짓을 꾸미고 있었으니 어이없을 만하다.

“너한테 그런 말을 했던 게 생각나서 지금 말하는 거야. 네가 도우면 무모한 짓이 아니게 되니까.”

“알겠어요. 일단 들어 보죠.”

그렇게 김아람과 이나은에게 변경된 작전에 관한 설명을 시작했다.

김화영이 돌아온 건, 괴수가 소환된 지 이틀 차 정오.

“자동차 쪽은 잘 해결됐어요?”

“응. 네 말대로 법무팀 헌터 몇 명이 차량 밑에 이상한 장치를 붙이고 있더라고.”

“이상한 장치요?”

“괴수랑 싸울 때, 법무팀장 아줌마가 그런 걸 여러 개 뻥뻥 터뜨리는 걸로 봐서 그 사람 스킬인가 봐.”

작전을 진행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것 중 하나는 바로 차량 폭파를 막는 것.

공덕으로 무사히 가기 위해서는 법무팀장이 우리가 건널 다리를 끊도록 놓아두어선 안 된다.

“그래서 몰래몰래 잘 옮겨 뒀어. 아! 표식도 그려 놨어.”

“표식은 시련 끝난 이후까지 반드시 남아 있어야 해요.”

“구석에 진짜 조그맣게 그려 놨으니까 절대 못 찾을걸? 걱정하지 마.”

반대편 구역에서 보낸 반나절 동안 김화영은 내가 부탁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끝낸 듯하다. 그럼 이제 남은 건, 괴수 시체를 통로에 통과시키는 것뿐.

“근데 시체 정말 통과시킬 거야?”

“그 방법 말곤 다른 방법이 없어요.”

“열심히 괴수 막던 애들이 실망할 텐데. 그나저나 나 없다고 누가 찾진 않았어?”

“A조는 괴수 막느라 김화영 헌터 사라진 사실도 몰랐고. B조한텐 김아람 헌터랑 이나은 헌터가….”

“캔디!”

“…캔디가 말 맞춰서 잘 둘러댔어요.”

“잘됐다. 둘이 화해했구나.”

김화영은 둘 사이가 좋아져서 다행이라며 손뼉까지 치면서 기뻐했다.

“화해라고 해야 할까요? 둘 다 제 작전에 동의해서 협력해 준 거긴 한데.”

“아무렴 어때. 그렇게 한 걸음씩 나가는 거지. 그럼! 여기 반지 다시 받아. 난 할 일 끝냈으니 조금 쉬러 가 볼래.”

“감사합니다.”

홀로 적진, 그것도 괴수와 전투가 한창인 곳에 가서 위험을 감수하고 부탁한 일을 모두 끝내 준 김화영이다. 고맙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사하긴 뭘 감사해. 재밌었으면 됐어.”

***

[마포대교-SW 구역, 소환된 모든 괴수가 쓰러졌습니다.]

[‘폐허가 뒤따르는 자’ 님이 플레이어 ‘정이화’의 순수한 힘에 심취합니다.]

[‘알 수 없는 자’ 님이 플레이어 ‘임수연’의 시련 클리어에 분개합니다.]

이번에도 이화의 활약 속에 자정이 되기 직전, 모든 괴수를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끝!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쉬어도 되는 거지?”

“네. 다음 안내가 나올 때까지 조금만 쉬고 있죠.”

곧 시련이 끝난다는 기쁨에 모두가 신나 있을 때, 김아람과 김화영이 조용히 내게 다가왔다.

“정현 헌터님, 마지막으로 작전 정리해 볼게요.”

“그러자.”

“정현 헌터님이 김화영 헌터님하고 반대편 구역으로 넘어가서 괴수 시체를 통과시킨 이후. 자정이 되면 다른 일행분들과 함께 ‘평시의 통로’ 통과하면 되는 거죠?”

“맞아.”

이대로 어느 통로에도 이상이 생기지 않은 채 시련이 종료되면 ‘레비아탄’ 두 마리를 상대하게 된다. 그를 피하고자 차선책으로 자정 직전 괴수 시체를 통로에 통과시키는 수를 택했다.

“‘평시의 통로’를 통과하고 다시 전원이 모이면 그 즉시 김화영 헌터님의 스킬로 다리 끝으로 이동하는 거고요.”

“응. 자정이 되자마자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다른 사람들 모두 ‘평시의 통로’ 통과하도록 만들어 줘. 그사이에 우리도 ‘평시의 통로’ 통과해 둘게.”

“알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작전에 대해 모르니까, 그거 감안해서 잘 둘러대 볼게요.”

다른 일행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번 작전만큼은 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있기로 했다. 강이란이 정보를 빼내 갈 수도 있는 상황이니 더더욱 주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바로 실행하죠.”

작전 내용을 최종적으로 점검한 김아람은 다시 다른 일행 쪽으로 돌아섰다.

김아람이 이화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모습을 본 난 반지를 껴 모습을 감추었다.

다행히 내가 모습을 감춘 것을 눈치챈 사람은 김화영뿐이었다.

“지금인 거지?”

“네.”

사전에 따로 이야기한 대로 김화영은 스킬을 써 반대편 구역으로 넘어갔다.

그에 맞추어 나도 ‘야누스의 출입문’ 쪽으로 이동했다.

“김아람 헌터에겐 미안하네.”

그리고 김아람에게 이야기한 것과는 달리 ‘전시의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마포대교-SW 구역 ‘전시의 통로’로 괴수가 통과했습니다.]

[마포대교-NE 구역, 괴수 소환이 중단됩니다.]

[‘폐허가 뒤따르는 자’ 님이 분노합니다.]

[‘빛나는 눈의 전력가’ 님이 당신의 전략을 흥미롭게 지켜봅니다.]

[‘알 수 없는 자’ 님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당신을 내려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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