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64화 (65/168)

[12. 네 번째 판결(1)]

온 세상이 불타고, 얼어붙는다.

인간, 수인, 캠비온, 워울프, 괴수 등.

모든 생명체가 화염에 집어삼켜지거나, 얼음 속에 갇힌 채 죽음을 맞이한다.

그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는 이곳은 그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만들어진 광경에 참담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정현, 넌 실패했다.”

그, 아니면 그녀? 성별을 분간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며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자의 번뜩 뜬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자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도망쳐라. 당장 도망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저자에게 살해당한다.

계속해서 울리는 경보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 아니 좌절감에 굳어버린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기 위해 끙끙대는 사이, 어느새 내 앞에 선 그자는 검을 높이 치켜들었고.

“잘 가라.”

작별 인사를 끝으로 검을 휘둘렀다.

칼날이 번뜩이며 내 목을 탐하려 다가올 때.

“정현 헌터라도 살아야 해요.”

별안간 이나은이 나타나 나를 밀쳤다.

“왜?”

대답을 들을 순 없었다. 이미 은빛 칼날은 핏빛으로 물들고 말았으니.

절망 속 난 끊임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끊임없이.

아래로.

얼마나 오랫동안 추락했을까?

“정현 헌터?”

들려선 안 될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가? 나 대신 죽임을 당한 이나은의 목소리가 어째서 들리는 거지?

“정현 헌터. 정현 헌터? 정현 헌터!”

이나은이 나를 계속해서 부르고, 온 세상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손이 나를 붙잡아 다시 위로 끌어 올렸다.

“일어나세요.”

곧 엄청난 빛이 주변을 감싸고.

“좀! 일어나시라고요.”

난 눈을 떴다.

“몇 번을 깨워야 일어나시는 거예요? 평소엔 잘만 일어나셨으면서.”

“이나은 헌터? 너 분명….”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뭐라도 묻었어요?”

“다행이다. 죽은 게 아니었어.”

안도감에 눈앞의 그녀를 껴안으며 다행이라고 중얼거리고 있으니, 이나은이 혐오스럽단 듯 말했다.

“멀쩡히 잘만 살아있는 사람한테 죽은 게 아니었다니. 지금 그게 할 소리예요?”

“악-”

쫙 소리 나게 등짝을 때리며 이나은은 나를 밀쳤다.

“뭔 꿈 꾼 건진 모르겠지만, 불침번 서야 하니까 정신이나 빨리 차리세요.”

불침번? 그제야 다리에서 벗어난 이후의 일들이 떠올랐다.

마포대교에서 벗어난 우리는 근처의 비교적 멀쩡한 빌딩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괴수와 며칠 내내 싸우느라 모두가 지쳐있던 터라 곧바로 검수림을 뚫고 공덕까지 가기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해 내린 결정이었다.

바깥엔 여전히 해가 밤낮 가리지 않고 쨍쨍하게 비쳐 우리는 최대한 빛이 들어오지 않는 구석진 방을 찾아냈고. 그곳에서 모두가 잠을 청하는 동안, 두 명씩 조를 이루어 불침번을 서는 중이었다.

지금까지는 김화영과 송태섭이 불침번을 섰고, 이제부터 나랑 이나은이 그 둘과 교대하여 불침번을 설 차례였다.

“맞네. 불침번. 그럼 그건 다 꿈이었구나.”

하기야 동물하고 인간의 특징이 섞인 수인.

보라색 피부에 거대한 박쥐 날개를 가진 캠비온.

거의 늑대의 모습을 띤 워울프 등등.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명체들이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게 개꿈이 아니고 뭐였겠는가.

꿈이라 치기엔 너무 생생했던 거 같긴 하지만.

“다른 분들 주무시니까, 이야기는 그만하고 밖으로 나가죠.”

이나은이 잡아끌어 꿈에 관한 생각을 접고 순순히 방 밖으로 따라나섰다.

불침번을 서는 장소는 잠을 청하는 방이 있는 5층에서 한 층 위인 6층 로비. 한쪽 면이 창문으로 뒤덮여 있어 거리를 한눈에 내려다보기도 좋고, 고층이라 검수에 시야가 가려지지도 않는다는 이유로 그렇게 정해졌다.

6층 로비에 도착하자 송태섭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잠은 충분히 잤어?”

“정현 헌터는 얼마나 충분히 잤는지, 일어나서도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더라고요.”

이나은이 비꼬자 송태섭은 괜한 질문을 한 것 같다며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이대로 있다간 이나은의 비꼼을 불침번 서는 내내 듣게 될 게 뻔해 얼른 화제를 돌렸다.

“혹시 시련 관련해서 글씨 새겨진 거 있었어요?”

“아니. 그런 건 없었어.”

휴식을 취한 지도 벌써 하루가 지났다. 그런데도 아직 시련과 관련된 글씨가 단 하나 새겨지지 않았다니.

처음엔 단순히 ‘캠비온 녹스’의 지각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게 하루가 되어가니 슬슬 시련 실패로 인해 우리 앞에만 글씨가 새겨지지 않은 건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그럼 들어가서 쉬세요.”

“들어가기 전에 뭐 하나만 묻자.”

“어떤 건데요?”

“그래서 진짜 작전은 뭐였어?”

그 물음에 잠깐이지만 적막이 흘렀다.

“진짜 작전이요? 어떤 걸 말하는 거예요?”

“당연히 마포대교에서 너랑 김화영 헌터가 실행했다는 작전을 말하는 거지.”

“그거라면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빌딩에 오자마자 내가 한 건 일행 전원을 모아놓고 작전에 관해 말해주는 거였다. 물론 김아람에게 말했듯 진실에서 벗어난 작전을 이야기해주었다.

그 당시에 다들 의문을 품지 않고 넘어가서 이제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었는데. 송태섭만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그때 말했다시피 ‘평시의 통로’에 괴수 시체를 집어넣었거든요.”

“그날 김화영 헌터 혼자 반대편 통로로 넘어가지 않았나?”

시치미를 떼려 했으나 송태섭은 사전에 그를 차단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일행의 제일 끝에서 ‘평시의 통로’를 통과할 리가 없잖아.”

“전 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그걸 어떻게?”

아차 싶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대충 때려 맞혀봤는데, 내 생각대론가 보네.”

“그게….”

“모든 일이 끝난 뒤에 작전을 알려준 것부터 뭔가 이상했어. 누군가를 이해시키려고 설명하는 것 같다는 작위적인 느낌이 들었거든.”

죽음 이후 귀환한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여러 핑계를 마련한 게 티 났던 건가. 역시 이 사람의 촉은 무시하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어떤 괴수랑 어떠한 상황에서 마주하게 될지 보여주는 스킬? 다른 사람들이면 몰라도 우리가 그거에 속을 리가 없잖아.”

“알겠어요. 말해드릴게요. 어차피 송태섭 헌터까지 속일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대신에 다른 분들한텐 말씀하시면 안 돼요.”

진짜 작전에 관해 이야기해주자, 송태섭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게 된 거였군.”

다행히 송태섭 또한 김화영이나 이나은처럼 작전을 짜게 된 경위나 다른 사람들에게 작전을 숨긴 이유에 관해선 묻지 않아 주었다.

“어떻게 된 건진 알았으니까, 다른 사람들한텐 말 안 하고 있을게.”

“감사합니다.”

“아, 맞다! 방금 그 이야기 들으니까 현이한테 말할 거 생각났어.”

그동안 송태섭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김화영이 불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번쩍 들었다.

“어떤 건데요?”

“이화한테 그만 사실대로 말해버렸어.”

“네?”

“눈에 불 켜고 물어봐서 말할 수밖에 없었거든. 그래도 단둘이 몰래 이야기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이미 이화가 알게 된 시점에서 안 괜찮은 것 같은데요.”

내 동생이라면 분명 이런 작전을 짜고 숨긴 이유에 관해 캐물을 텐데. 뭐라고 답해야 하지? 이렇게 된 이상 이화에겐 죽음 이후 귀환한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나?

“괜찮을 거야. 죽기야 하겠어? 그럼 우린 이만 자러 가볼게. 나은이랑 현이, 즐거운 시간 보내!”

“잠시만요.”

하마터면 이화 문제로 여기 있던 세 사람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잊을 뻔했다.

“혹시 신기가 뭔지 알고 계시나요?”

“신기? 그게 뭐야?”

모른다고 즉답한 김화영과 달리 송태섭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들어본 적도 없으시나요?”

한 번 더 묻자 송태섭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전에 장비 중에 신화급 장비보다 더 상위 등급의 장비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 있어.”

“그게 신기란 거죠?”

“어. 근데 그냥 헛소문일 거야. 상점에서도 그런 건 판매하지 않잖아.”

하지만 ‘후원 미션’에 떡하니 적힌 걸 보니 그냥 떠도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상점에서도 판매하지 않는 상위 등급의 장비를 얻을 기회인 건가.

“갑자기 신기는 왜? 어디서 그런 걸 줍기라도 했어?”

“실은 이번에 ‘후원 미션’을 받았는데, 클리어 보상이 신기를 지급한다는 내용이어서요.”

“실패 페널티는?”

“신기 이용 자격 박탈이요.”

“뭐 너로선 잃을 게 없는 거 아냐? 그냥 수락하지, 그래?”

“그 ‘후원 미션’의 클리어 조건이….”

이나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히 말을 이었다.

“허상헌 헌터의 신기를 훔치는 건데. 이나은 헌터, 들어본 적 있어?”

“아저씨의 신기를요? 왜 그런 ‘후원 미션’이? 아! 일단 저도 신기란 걸 방금 처음 들어봤어요.”

“잘 모른다는 거네. 그러면 그분의 장비라도 알려줄 수 있을까?”

“특별한 장비는 생각 안 나는데…. 그러고 보니 아저씨가 무척 소중히 여기던 게 있긴 했거든요? 그냥 일반적인 건전지긴 한데, 이상하게 엄청 소중히 여기셨어요.”

건전지?

“일단 알겠어.”

“어차피 아저씨 만나야 하니까, 만나게 되면 제가 여쭤볼게요.”

“그래. 그러면 송태섭 헌터 말대로 하는 게 낫겠네.”

[‘빛나는 눈의 전략가’ 님이 등록한 ‘후원 미션’을 수락합니다.]

[‘번개의 아내’ 님이 등록한 ‘후원 미션’을 수락합니다.]

‘후원 미션’을 수락하자 순식간에 여러 글씨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빛나는 눈의 전략가’ 님이 당신의 선택에 미소를 보냅니다.]

[‘호색한 찬탈자’ 님이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될 것임을 경고합니다.]

[‘번개의 아내’ 님이 ‘호색한 찬탈자’ 님의 경고에 코웃음을 칩니다.]

[‘무형의 관리자’ 님이 손님맞이 준비를 합니다.]

[‘폐허가 뒤따르는 자’ 님이 난폭하게 검을 휘두릅니다.]

[‘거품에서 피어난 꽃’ 님이 사과를 베어먹습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님이 수라장을 기대합니다.]

뭔가 잘못된 곳에 끼어들었다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곧 모든 것을 잊게 할 글씨가 새겨졌다.

「네, 네 번째 ‘시련’이 종료되었어요.」

「안내가 늦어서 죄송해요.」

「저, 전 ‘캠비온 녹스’ 대신 MC를 맡게 된 ‘캠비온 멀린’이에요.」

「남은 시련을 맡게 되었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엥? 새로운 MC다!”

MC가 바뀌었다?

지금까지 제멋대로 잘만 시련을 진행하던 ‘캠비온 녹스’가 MC에서 잘리기라도 한 건가?

“그러네요. 왜 바뀐 걸까요?”

이나은의 물음을 곱씹다 보니 짐작 가는 데가 떠올랐다.

“설마 수연이 때문인가?”

이번 시련에서 수연이를 죽이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캠비온 녹스’에게 물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수연이 한 명의 파급력이 그렇게 클 것 같진 않았다.

“임수연 헌터 때문이라고요?”

“신경 쓰지 마. 말이 잘못 튀어나왔어.”

[‘알 수 없는 자’ 님이 ‘캠비온 멀린’을 응시합니다.]

「히익-!」

「바, 바로 베팅 결과부터 살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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