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네 번째 판결(2)]
「이번 시련에선 ‘전시의 통로’ 쪽에 괴수가 더 적게 들어갔어요.」
「그에 맞추어 베팅해주신 포인트를 배분할게요.」
[베팅 결과에 따라 포인트가 재배분됩니다.]
「그리고 플레이어 지명권은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님께 드리는 게 맞겠네요.」
[‘낮은 시선의 소유자’ 님이 아쉬워합니다.]
[‘허영의 사내’ 님이 애써 평정심을 유지합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님께 플레이어 지명권이 주어집니다.]
[플레이어 지명권을 찢으면 자신이 원하는 플레이어와 전속 계약할 수 있게 됩니다.]
죽음에서 벗어날 방법을 생각하는 통에 플레이어 지명권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가 부디 다른 헌터에게 저 지명권을 쓰길 바라보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님이 플레이어 지명권을 당신을 향해 흔듭니다.]
[‘풍요와 파괴의 군주’ 님이 당신을 놓친 데에 아쉬워합니다.]
[‘피의 살육자’ 님이 자신이 점찍은 자를 건들지 말라고 위협합니다.]
[‘낮은 시선의 소유자’ 님이 플레이어 지명권을 포인트로 구매하고자 합니다.]
지금껏 저놈이 요청한 전속 계약을 잘 무시해왔지만, 지명권이 생긴 이상 이젠 다 부질없는 짓이 되어 버렸다.
“망했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님이 당신에게 전속 계약을 요청합니다.]
“어? 왜 지명권을 쓰지 않고?”
지명권을 쓰기 전에 간 보는 건가?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님이 킬킬 웃으며 플레이어 지명권을 플레이어 ‘임수연’을 향해 흔듭니다.]
[‘오를레앙의 성처녀’가 긴장합니다.]
아니, 간 보는 게 아니다. 지금 저 미친놈은 자신과 전속 계약을 맺지 않으면 수연이에게 지명권을 쓸 것이라 협박하는 거다.
저놈이 내 스탯을 0에 고정해버린 전적을 생각하면,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와 전속 계약 맺는 이점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다. 그러니 이렇게 된 거 딱 한 번 눈 감고 수연이가 저자와 전속 계약을 맺게 하는 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지난번에 나 때문에 ‘부정의 복수자’ 세력에게 잡혀간 수연이한테 이 미친놈 처리까지 떠맡길 순 없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님의 전속 계약을 수락합니다.]
[지금부터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님 외의 초월자에게 후원 및 후원 미션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현재 진행 중인 ‘후원 미션’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저래 놓고 지명권을 나한테 쓸 수도 있었으니까, 이게 최선이었겠지?”
지명권이 없더라도 어차피 저 초월자는 어떻게든 나와 전속 계약을 맺으려 했을 테니까. 그래, 이게 최선이라 생각하자.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님이 전속 계약 맺은 걸 기리며 1포인트를 플레이어 ‘정현’에게 후원합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님이 옆으로 누운 채 8포인트를 플레이어 ‘정현’에게 후원합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님이 전속 계약 맺은 걸 기리며 11포인트를 플레이어 ‘정현’에게 후원합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님이 전속 계약 맺은 걸 기리며 0포인트를 플레이어 ‘정현’에게 후원합니다.]
전속 계약 맺은 걸 애써 좋게 포장하자마자 20포인트를 굳이 네 번에 나누어서 후원하는 짓거리나 하다니. 이건 뭐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0포인트 후원은 또 뭐야?”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님이 휘파람을 불며 남은 건 당신에게 맡깁니다.]
“맡기긴 뭘 맡겨!”
결국 폭발한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이나은의 만류에 겨우 화를 진정했을 땐, 네 번째 시련이 완전히 종료된 후였다.
[‘시련’이 종료됩니다.]
[생존한 플레이어들은 다음 ‘시련’에 진출하게 됩니다.]
[‘시련’ 클리어에 실패하였으나 생존한 플레이어의 경우 참가 자격을 갱신해야 합니다.]
[두 번째 기회]
- 대상 플레이어 : ‘오관대왕의 심판’을 클리어하지 못한 생존자 전원
- 클리어 조건 : S급 괴수 퇴치에 1회 이상 기여.
- 성공 보상 : 다음 시련 진출 자격 획득
- 실패 페널티 : 사망
“이 정도 조건이면 그다지 까다로운 편은 아니네.”
김화영의 말대로 클리어 조건이 퇴치가 아닌 ‘기여’인 이상 까다롭다고 할 순 없었다.
“시련 클리어 못 했다면서 다른 벌칙을 준 것도 아니고. 이제 좀 안심하고 잘 수 있겠다.”
「약속대로 시련을 클리어한 플레이어들의 상점을 확장해드릴게요.」
[‘시련’을 클리어한 플레이어의 상점이 확장됩니다.]
[이전까지 구매할 수 없었던 장비와 물품들이 상점에 추가됩니다.]
“이건 좀 뼈아프네요.”
“뭐, 죽는 것보다야 나으니까.”
「또, 해야 할 게 하나 더 있는데요.」
「‘만물을 아우르는 자’ 님 부탁드릴게요.」
[‘만물을 아우르는 자’ 님이 전차를 몰고 떠나갑니다.]
점점 멀어지는 말 울음소리를 따라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워졌다. 본래 같으면 반기지 않았을 칠흑 같은 어둠이었지만, 일주일 만에 다시 찾아왔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드디어 해가 졌네.”
“이젠 정말 맘 편히 잘 수 있겠어.”
[햇볕이 져 ‘검수’가 시듭니다.]
[행성 곳곳의 ‘검수림’이 사라집니다.]
「무대 정리도 끝났으니, 이제 ‘오관대왕 님의 판결’을 들어볼게요.」
[오관대왕의 판결이 시작됩니다.]
[플레이어의 언행을 ‘업칭’으로 측정합니다.]
[신업과 구업의 측정이 끝났습니다.]
[상대의 불행을 바라며, 이웃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친 플레이어들에 분노하며 오관대왕이 유죄 판결을 내립니다.]
[U+2641 행성의 죄악 수치가 10 상승합니다.]
「죄악 수치가 40이네요.」
「판결도 들었으니까 다음 ‘시련’으로 넘어가 볼게요.」
「지난번 ‘캠비온 녹스’가 안내했듯이 전속 계약 맺은 플레이어가 한 명도 남지 않은 후원자님께서는 이번 시련부터 참여할 수 없어요.」
「죄, 죄송해요.」
‘캠비온 멀린’의 사과와 함께 여러 초월자가 후원 자격을 잃었다.
「앞으로 함께할 초월자님은 총 108분이네요.」
「마지막까지 몇 분이나 함께하게 될진 모르겠지만, 잘 부탁드릴게요.」
「다음 ‘시련’을 위해 ‘염라대왕’ 님께 자료를 전달해드릴게요.」
[감록사에서 측정한 자료를 ‘염라대왕’에게 전송합니다.]
[다음 ‘시련’이 시작됩니다.]
[‘시련’의 난이도를 조정 중입니다.]
벌써 다섯 번째 시련이다. 도대체 언제쯤 이 시련이 완전히 끝날지 모르겠다. 아니, 끝나기는 할까?
불평을 이어가며 다음 시련 내용을 기다리는데 뜬금없는 글씨가 새겨졌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님이 플레이어 ‘정현’과의 전속 계약을 파기합니다.]
[지금부터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님 외의 초월자에게 후원 및 후원 미션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어라?”
[‘풍요와 파괴의 군주’ 님이 말을 잃습니다.]
[‘피의 살육자’ 님이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님의 행위에 의구심을 품습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님이 당신의 절망감을 맛본 데에 만족합니다.]
전속 계약을 맺었다가 바로 파기했다고?
“왜 굳이 이런 짓을?”
정말 진의를 알 수 없는 초월자다. 미쳤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의 알 수 없는 행위에 관한 고민은 다음 시련에 관한 내용을 읽기 위해 접었다.
「‘염라대왕’ 님이 자료 검토를 끝냈다고 하시네요.」
「그럼 어떤 시련이 준비되어 있는지 확인해 볼까요?」
[‘염라대왕’이 자료를 찢어버립니다.]
[염라대왕의 심판]
- 대상 플레이어 : U+2641 행성 생존자 전원
- 클리어 조건 : NotFoundError.
- 성공 보상 : NotFoundError
- 실패 페널티 : NotFoundError
[Error!]
[참조할 내용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련’을 담당할 판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련’이 중단됩니다.]
「어….」
「자, 잠시만요.」
잠시라는 말과는 달리 다음 글씨는 한참 후에야 새겨졌다.
「혀, 협의 결과 이번 시련은 모두가 클리어한 걸로 치기로 했어요.」
「그리고 지금껏 고생했으니까 하, 한 주 정도는 쉴 수 있도록 아량을 베풀게요.」
「일주일 후 치러질 다음 시련에서 뵙도록 해요.」
그를 끝으로 글씨는 더 새겨지지 않았다.
김화영과 송태섭이 잠을 청하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한참 동안 시련이 중단된 이유가 뭘지 생각해보았다.
클리어 조건이나 성공 보상, 실패 페널티 대신 적혀 있던 ‘NotFoundError’.
참조할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련을 담당할 판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을 잘 조합하면 시련이 중단된 이유가 나올 것 같은데, 생각은 거기에서 더 발전해나가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답이 떠오르지 않아 결국 이나은에게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저도 궁금하네요.”
그렇게 답하는 이나은 역시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메인 MC가 바뀐 것도 그렇고. 시련이 중단된 것도 그렇고. 초월자님들 사이에서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그게 뭔진 모르겠어요.”
“어떤 이유에서 시련이 중단된 건지 알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이유를요? 알아봤자 저희랑은 상관없잖아요.”
상관없을 확률이 높지만,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를 이용해서 시련을 완전히 멈출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저염식 전도사’ 같은 호의적인 초월자가 존재한다면 떠보기라도 하겠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는 노릇. 일단은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어야겠다.
“지금부턴 저희랑 상관있는 이야기 해요.”
생각을 정리하는 중, 허상헌의 명함을 만지작거리던 이나은이 화제를 전환했다.
“날 밝는 대로 공덕으로 가는 건 무리겠죠?”
“실험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우선 다음 시련 진출 자격부터 획득해두는 게 낫지 않을까?”
“그건 그렇네요.”
“이왕 시련 없는 일주일이 주어졌으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실험실로 가자고.”
“하루.”
그 단어를 내뱉은 이나은은 검지를 뻗어 내 눈앞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하루예요.”
“응?”
“S급 괴수를 퇴치해서 다음 시련 진출 자격을 획득하는 데 하루. 실험실에 쳐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데 하루. 3일 뒤엔 반드시 공덕으로 가요.”
“우리 둘이 정해서 될 일은 아니잖아.”
말을 끝마치려다 이나은의 손에 들린 허상헌의 명함을 보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그렇게 하자고 의견 정도는 내볼게.”
“제 말대로 해야만 하는 이유를 조작해서라도 강력하게 주장해주세요.”
“어?”
“아니면 저 혼자서라도 실험실로 쳐들어갈 거예요.”
“알겠어. 노력해볼 테니까, 혼자 쳐들어간단 생각만은 접어둬.”
다급히 말리자 이나은은 배시시 웃었다.
“그냥 해본 소린데 잘 먹혀드네요. 종종 써먹어야겠어요.”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정현 헌터는 공덕으로 가기 전에 준비할 거 있어요?”
“지금까지 미뤄뒀던 중요한 것 좀 끝내두려고.”
“중요한 거요? 어떤 거예요?”
“신메뉴 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