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66화 (67/168)

[13. 남겨진 사람들(1)]

일주일간 휴식이 주어진다는 글씨가 새겨지고 9시간쯤 지난 뒤. 다음 시련 참가 자격을 얻기 위해 우리는 조를 두 개로 나누어 S급 괴수 사냥을 나섰다.

조는 마포대교에서 나누었던 것 그대로 A조와 B조로 나누었다. 차이점이라면 A조엔 수연이가, B조엔 내가 합류했다는 점.

물론 클리어 조건이 ‘S급 괴수 퇴치에 1회 이상 기여’이기에 함께 전투에 나설 필요까진 없었다. 일행에게 아침으로 내가 만든 ‘검수 수프’를 먹여 ‘해가 지기 전까지 민첩 스탯을 5 상승’시킨 것만으로도 이 조건을 만족시키기엔 충분했으니까. 다만, 다음 요리를 위한 재료를 직접 얻고 싶어 괴수 사냥에 따라나서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B조 인원들을 따라 빌딩에서 나와 마포역 쪽으로 향했고, 그러던 와중 눈앞의 괴수와 마주하게 되었다.

“정현 헌터님, 제 뒤에 잘 숨어 계세요.”

“그럴 필요까진 없어 보이는데? 애초에 내가 네 등 뒤에 숨을 수 있을 리도 없고.”

“S급 괴수를 앞에 두고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마주한 S급 괴수는 ‘리빙 라면’. 이름 그대로 살아있는 라면이다.

자동차만 한 라면 봉지에서 면발을 늘어뜨린 채 둥둥 떠다니는 저 괴수의 공격 방식은 단순했다. 면발로 대상을 휘감아 봉지 안으로 집어넣는다. 이게 전부다.

오랜 시간 지켜봤음에도 ‘리빙 라면’은 그 외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저 괴수는 자신의 반숙, 완숙 눈동자에 걸린 주변의 건물 파편을 모조리 봉지 안으로 집어삼키며 단순한 공격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저 봉지 안에 소화 기관이라도 있는 건지 안으로 들어간 파편은 다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위협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S급 괴수라고 보기엔 너무나 단순한 움직임이다.

무엇보다 저 생김새. 괴수의 생김새가 너무나 익숙하다고 해야 할까나? 허공에 뜬 봉지 아래쪽에 비치는 익숙한 브랜드명과 바코드까지 합세해 계속해서 친근한 느낌이 들어 S급 괴수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비록 생김새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더라도 S급 괴수는 S급 괴수에요. 저도 저런 괴수는 처음 봐서 김빠지긴 하지만요.”

김아람은 나를 타이르더니 붓을 꺼내 들었다.

“어쨌든 간에 정현 헌터님이 함께 하겠다고 계속 말씀하셔서 데려오긴 했지만, 위험한 행동은 절대. 절대로 하면 안 돼요.”

“알겠어.”

“음식 재료로 쓸 만한 건 많이 챙겼어요?”

“여기까지 오는 길에 이것저것 챙겼지. 그리고 저 괴수를 퇴치하면 뭘 보상으로 줄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저녁에 면 요리 먹을 수 있다는 건 확실해 보이지 않아?”

“기대해 볼게요. 벌레로 만든 요리만 아니면 뭐, 전 다 상관없어요.”

김아람은 그 말을 끝으로 비틀거리더니 쓰러졌다. 다행히 땅에 닿기 전에 받쳐 들 수 있었다. 가까스로 내 무릎에 받쳐진 김아람은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적어도 예고는 해주고 잠들라고. 한성수 헌터, 여긴 준비 끝났어요.”

김아람이 잠에 빠진 걸 확인한 한성수가 어울리지 않게 기합을 외치고 ‘리빙 라면’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뭔가 생김새 때문인가? 긴장감이 전혀 안 드네. 그나저나 전투할 때마다 잔다니, 성가신 직업이야.”

무릎에 받쳐진 김아람이 편히 잘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주는데 별안간 그녀가 붓으로 허공에 글씨를 썼다.

‘모든 감각은 그대로니까, 말 가려주세요.’

“미안.”

사과에 만족한 듯, 김아람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김아람이 그린 건 기괴하게 생긴 거인. 그림을 완성하고 그 위에 서명하자 곧 거인은 입체감을 띠게 되었다.

“볼 때마다 신기하단 말이지.”

[스킬 ‘호접지몽’이 발동됩니다.]

김아람이 설명한 바로는 ‘호접지몽’은 꿈에서 본 대상들을 그리고, 그림에 자신의 서명을 남기면 그가 살아 움직이는 스킬이다.

그 스킬로 탄생한 기괴한 거인은 넘어질 듯 말 듯 엉성하게 달려 나가더니 괴수를 붙잡고 면발을 흡입했다.

‘리빙 라면’의 면발을 김아람의 거인이 마크하는 동안, 작전대로 거인의 등을 타고 오른 김화영과 한성수가 봉지 위로 점프하며 괴수의 눈을 터뜨렸다.

노른자가 질질 흐르자 괴수는 익숙한 CM송을 내지르며 봉지를 활짝 벌렸다.

‘리빙 라면’이 벌린 봉지 안에선 라면 국물이 쏟아졌다.

김이 펄펄 나는 라면 국물에 닿은 거인의 몸은 점차 지워져 갔다. 다행히 괴수의 눈을 터뜨리고 낙하한 김화영과 한성수는 거인이 완전히 지워지기 전 그의 손에 받쳐져 땅에 안전히 착지했다.

“번지점프 같고, 재밌었다!”

무사히 목표를 달성한 둘의 모습에 안도할 때, 당황한 한성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또 뭡니까?”

한성수의 앞, 라면 국물이 땅을 적신 곳에서 거대한 지렁이 같은 라면 부스러기가 꿈틀거리며 솟아나고 있었다. 한성수가 황급히 창으로 부스러기를 반으로 베었으나, 두 동강 난 부스러기는 멈추지 않고 그의 다리를 휘감았다.

“이래서 라면 먹을 때 부스러기까지 탈탈 털어 먹어야 하나 봐. 어른들 말은 정말 틀린 게 하나 없어.”

김화영이 제때 단검을 휘두른 덕분에 부스러기들은 한성수를 놓아 주었다. 부스러기가 휘감겼던 한성수의 다리에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큰일이네요.’

시야를 지우긴 했어도, 처음 보는 ‘리빙 라면’의 스킬에 대한 대비책은 없는 상황. 여전히 라면 국물이 적셔진 곳에서 계속해서 솟아나는 부스러기는 어느새 수십 마리에 이르렀다. 명색이 S급 괴수인 만큼, 확실히 A급 헌터와 B급 헌터만으론 상대하기 힘들었다.

“다음 그림은?”

‘시간이 좀 걸려요.’

“이나은 헌터를 믿는 수밖에 없네.”

그 순간, 머리 위에서 이나은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다 비키세요.”

김아람을 업은 채 뒤로 물러서며 본 이나은은 ‘리빙 라면’보다 더 높이 위치한 빌딩 옥상에 서 있었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겨루기 준비’ 상태가 됩니다.]

일행 모두가 충분히 물러섰다고 판단했는지 이나은은 ‘리빙 라면’의 봉지 위로 낙하했다.

이나은은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틀며 발차기를 봉지 한가운데에 정확하게 꽂았고.

[플레이어 ‘이나은’이 ‘뒤후려차기’ 기술에 성공하였습니다.]

[5점 득점으로, ‘힘’이 4배 적용된 피해를 입힙니다.]

그대로 봉지를 뚫으며 지면에 착지했다.

멀리서 보기엔 사뿐히 내려앉은 것 같았으나, 곧 이나은의 발 주변의 땅이 움푹 파이더니 엄청난 진동과 함께 아스팔트가 갈라졌다. 그 충격파에 휩쓸린 부스러기는 잘게 갈라지더니 한 번에 소멸했다.

“이게 S급 헌터….”

마포대교에서의 전투 이후 S급으로 한 단계 등급을 올린 이나은의 일격. 그 일격에 괴수는 한 방에 쓰러졌다. 아무리 S급 중 최약체로 평가받는 괴수라고는 해도 일격에 쓰러뜨리다니. 이화도 그렇고, S급 헌터의 파괴력은 정말 격이 다른 수준이다.

[S급 괴수 ‘리빙 라면’을 퇴치하였습니다.]

***

“오늘 저녁은 뭐야?”

“면 요리.”

“면? 전에 챙겨뒀던 컵라면이 아직도 남아 있었나? 얼마 전에 다 먹은 거 아니었어?”

“아직 우리가 퇴치한 괴수 이야기를 못 들었구나.”

수연이와 함께 빌딩 2층으로 향하며 ‘리빙 라면’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 괴수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있는데, 진짜로 존재했던 거야?”

“응. 브랜드까지 달고 있을 줄은 몰랐어.”

“괴수 퇴치해서 라면 스프에 면까지 얻었으니까, 저녁으로 라면 끓이겠구나.”

“그건 아니야. 라면 스프를 바로 쓰기엔 아까워서 너희가 잡은 괴수한테서 나온 ‘화려한 버섯’과 조합해서 다른 면 요리해보려고.”

A조가 퇴치한 S급 괴수는 ‘군목면’. 나무 가면을 쓴 사람 형태의 괴수로 온몸에 버섯이 자라나 있다는 게 특징이다. 그를 퇴치하고 ‘화려한 버섯’을 보상으로 획득했는데 이화가 요리할 때 써보라며 내게 주었다.

“그거 정말 쓰려고? 왠지 독 있을 것처럼 생기지 않았어?”

“‘독 내성’ 믿고 살짝 먹어보니까 아무 이상 없더라고.”

“그래? 도착했다.”

주방으로 사용하고 있는 옛 식당 문을 열자 김화영이 우리를 반겼다.

“왔구나! 오늘도 방송처럼 하는 거지?”

“네.”

“그럴 줄 알고, 현이의 방송 파트너인 내가 말끔하게 차려입고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지.”

저 말대로 김화영은 어디서 구했는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또 오늘의 요리를 심사해줄 심사위원을 특별히 모셔봤어.”

김화영의 말에 눈을 비비던 송태섭이 손을 들어 보였다. 얼굴에 피곤이 잔뜩 끼어 있는 걸 보니 김화영이 떼를 써서 데려온 듯했다.

“불침번하고 저희 말곤 다 잘 시간이잖아요.”

“그럼 바로 요리 시작!”

김화영은 내 말을 잘라먹으며 손을 씻었다. 송태섭에게 미안한 눈빛을 보내며 나도 손을 씻고 오늘의 재료를 꺼냈다.

군목면의 ‘화려한 버섯’.

리빙 라면의 ‘면발’.

사흉 도철의 ‘우유’와 ‘버터’.

어느 건물에서 파밍한 ‘밀가루’.

요술 맷돌의 ‘소금’.

흡혈귀의 ‘양파’와 ‘마늘’.

여기까지가 지금부터 할 요리에 들어갈 재료다.

“오늘은 뭔가 시작부터 본격적이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려고요.”

이번 요리가 직업 승급 조건을 달성시키기 위한 마지막 요리. 그런 만큼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재료를 한 번에 먹음으로 여러 특성을 얻고 싶기도 했고.

“그럼 시작해볼까요?”

목소리 톤을 바꾸자 초월자들의 이목이 쏠렸다.

[‘풍요와 파괴의 군주’ 님이 영원한 허기를 달래고 싶어 합니다.]

[‘번개의 아내’ 님이 요리 재료를 똑같이 준비합니다.]

“‘검수 수프’ 이후 오랜만에 찾아뵙네요. 기다려주신 분들께 죄송하다는 인사를 드리며 요리 바로 시작해보겠습니다.”

“평소와 달리 다양한 재료가 준비된 것 같은데, 어떤 요리를 보여주실 건가요?”

벌써 세 번이나 게스트로 함께한 김화영은 막힘 없이 대사를 내뱉었다.

“오늘 보여드릴 요리는 버섯 크림 파스타입니다.”

“와! 맛있겠다. 진짜? 만들기 어려운 거 아니야?”

“평소와 달리 조리 과정이 조금은 복잡하겠지만, 많이 어려운 건 아니에요.”

수연이에게 버섯과 양파, 마늘 손질을 맡기고 난 곧바로 소스 제작에 들어갔다.

불 위에 프라이팬을 올리고 사흉 도철의 버터와 밀가루를 녹이기 시작했다.

“버터와 밀가루를 섞어서 약한 불로 녹이며 저어주면 루가 만들어지거든요.”

“나! 내가 해 봐도 돼?”

“네. 이 속도로 계속 저어주면 돼요.”

“오- 현이 너 진짜 요리사 같다.”

김화영의 말에 씁쓸함을 느끼며 국자를 넘겨주었다. 국자를 집은 김화영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버터와 밀가루가 섞여 생기는 덩어리를 풀어가며 루를 완성했을 즈음 우유를 부었다.

“계속 저어야 해?”

“네. 덩어리지지 않게 계속 저어주세요.”

“넵, 셰프!”

이제 젓기만 하면 되니 소스 제작은 김화영에게 맡기고 난 다음 작업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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