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68화 (69/168)

[13. 남겨진 사람들(3)]

“김화영 헌터가 사실대로 말했다길래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이건 너무 훅 들어온 거 아니야?”

“말 돌리지 말고.”

이화의 표정은 진지했다. 단둘이 대화하기 위해 이곳에 데려왔을 때부터 눈치챘지만 역시 이 문제에 대해 대충 넘어갈 생각은 없는 듯했다.

“작전을 세우게 된 진짜 이유가 궁금한 거지?”

“표정 주시하고 있을 거니까 이번에도 거짓말로 넘어갈 생각은 마.”

“그렇게 티가 많이 나?”

“20년 넘게 같이 살았으면 바로 알아볼 정도?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줘.”

마포대교에서의 작전을 세우게 된 이유를 말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죽음 이후 귀환하는 내 특성에 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SSS급 괴수로 ‘레비아탄’이 나온다거나 차단막을 통과하려면 ‘평시의 통로’를 지나야만 한다는 등의 정보를 알고 있던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으니.

‘CONTINUE?’ 특성에 관해 밝힌다는 건, 내 전력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 그래서 지금껏 이를 숨기기 위해 노력했으나….

굳이 동생한테까지 비밀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 이화가 내 이야기를 믿어줄지 말지는 별개지만.

“말했다시피 이런 작전을 세우게 된 건, 시련을 클리어하면 SSS급 괴수 ‘레비아탄’이 두 마리나 나오기 때문이야.”

“내가 의문인 게 바로 그 지점이야. 네 표정으로 봐선 거짓말하는 건 아닌데, 대체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왜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그야.”

말을 고르다 결국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나한텐 죽음 이후 귀환하는 특성이 있거든.”

“죽음 이후, 귀환?”

[금지된 명령어입니다.]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대체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왜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그야.”

어?

“그야, 뭐?”

이유를 말했는데, 제대로 못 들은 건가?

“죽음 이후 귀환하는 특성이 있다고 방금 이야기했잖아.”

“난 지금 처음 듣는 소린데?”

[금지된 명령어입니다.]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대체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왜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벌써 두 번이나 말해줬잖아. 너답지 않게 방금 말한 걸 왜 잊는….”

이화가 잊은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죽음 이후 귀환한다고 이야기할 때마다 불길한 창이 생겨났던 것 같은데.

“나한텐 죽음 이후 귀환하는 특성이 있어.”

[금지된 명령어입니다.]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대체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왜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확실하다. 죽음 이후 귀환하는 특성에 관해 언급할 때마다 그 직전으로 시간이 되감기고 있다.

“그 이야기가 금지된 명령언가 뭔가란 말이지?”

“오빠?”

왜 특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화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처지란 건 알겠다.

“제길.”

역시 사기적인 특성인 만큼 제약도 존재하는 건가.

이화한테만큼은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자세한 이유는 말할 수 없어.”

“나한테도?”

“미안.”

“결국엔 원점이네.”

이화는 실망한 듯 표정이 어두워졌으나 이내 웃으며 말했다.

“진지하게 말하는 거 보니 말 못 할 사정이 있나 보네. 일단 알겠어. 나중에 말할 수 있게 되면 그때 알려줘.”

“고마워.”

“그러면 슬슬 내려가 볼까?”

“그러자.”

대화를 마치고 아래층에 내려가니 송태섭이 에너지바 한 개를 던져 주었다.

“여기서 발견한 건 그게 다야. 위층에선 소득이 있었어?”

이화가 고개를 젓자 송태섭은 그럴 줄 알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멸망한 지 시간이 꽤 지났으니 멀쩡한 건 이미 다 털어갔겠지.”

“괜히 따라오게 한 것 같아서 죄송해요.”

“됐어. 적어도 네 목적은 이룬 거 아니야?”

“네?”

“아니다. 둘이서 그거 나눠 먹어. 그러고 난 뒤에 돌아가자.”

이화는 에너지바 절반을 떼어주며 원래 저렇게 눈치가 빠르냐고 조용히 물었다. 웃음으로 에둘러 대답을 대신하는데 벽에 엉망으로 그려진 그래피티가 눈에 들어왔다.

‘해방’, ‘새로운 세상’, ‘왕’ 등 다양한 낙서 가운데 유달리 크게 적힌 그래피티. 그 그래피티를 자세히 보니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송태섭 헌터, 혹시 저거 보셨어요?”

“저걸 뭐라 부르더라? 그, 그래, 뭐였는데. 어쨌든 저게 왜?”

내가 가리킨 건 ‘권주혁 대빵’의 ‘대빵’ 부분에 ‘x’ 표시를 한 그래피티. 그를 본 송태섭은 바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

“이 빌딩, 강이란 놈의 세력이 지내던 곳이었나.”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

나와 송태섭이 서두르자 이화는 당황해서 물었다.

“갑자기 두 사람 왜 그래요? 그래피티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권주혁이라는 사람, 우리가 공방전 당시 쓰러뜨렸던 강이란의 부하야.”

“뭐라고요?”

그런 사람의 이름이 여기 적혀있단 건, 강이란 세력이 이곳에 들린 적이 있다는 거다. 강이란 세력이 어딘가로 가는 도중 이곳에 잠시 들렸던 것일 수도 있지만 마포는 실험실이 위치한 공덕에서 상당히 가까운 곳. 여기가 강이란 세력의 주둔지일지도 모른다.

“잠시만요. 혹시 이 소리 들리세요?”

“무슨 소리?”

“모두 조용히 해주세요.”

대화를 멈추자 여러 명의 말소리가 저 멀리에서 얼핏 들렸다. 뭐라고 말하는지까진 들리지 않았지만, 점차 가까워지는 소리는 거리 한복판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소리의 출처를 찾아 조심스럽게 밖을 내다보니 서른 명 정도 되는 무리가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 중이었다.

“강이란의 세력이겠지?”

“정황상 그럴 가능성이 크죠.”

“싸움을 피할 순 없겠네.”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대검에 손을 얹은 송태섭을 이화가 말렸다.

“안 돼요.”

“수는 저쪽이 많더라도 우리에겐 S급 헌터가 둘이나 있잖아. 질 것 같진 않은데?”

“수가 문제가 아니에요. 저 무리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 심상치 않아요.”

“온몸에 문신한 사람 말이지?”

“네.”

겉으로 보이는 신체 부위라면 전부 문신을 새겨 놓은 남성은 상의를 입지 않은 채 당당히 길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자신감과 달리 드러난 남성의 상반신은 뼈가 보일 정도로 앙상하기 그지없다. 툭 치면 부러질 것만 같은 사람을 S급 헌터인 이화가 왜 불안해하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

“저 사람이 왜? 그렇게 강해 보이진 않는데? 보이는 걸로 치면 그 옆에 덩치가 더 강할 것 같지 않아?”

“아니, 네 동생 말이 맞아.”

“네?”

내 의견을 전면 부정한 송태섭을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저 사람의 이름은 오준석. SS급 헌터야.”

“그걸 어떻게?”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이였거든.”

“알고 지내던 사이요?”

“그보다 저기엔 S급 헌터도 한 명 있어. 끝에 보이지? 방독면 쓴 사람.”

송태섭이 언급한 S급 헌터란 일행의 제일 뒤에서 네발로 기어 오는 사람을 말하는 듯하다. 그래피티는 저 사람의 작품인지 몸에 스프레이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저 인간의 이름은 방우준. 오준석 못지않게 악질이야.”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요?”

“내가 아는 건 저 두 사람이 끝. 다른 사람들은 전부 처음 보는 얼굴이야.”

“상황이 그리 좋진 않네요.”

SS급 헌터와 S급 헌터가 한 명 이상일 수도 있다는 소리에 불안감이 차올랐다.

“수연이의 버프가 없는 이상, SS급 헌터는 쓰러뜨릴 수 없다고 보는 게 맞겠지?”

“분하지만 오빠 말이 맞아. 그리고 수연 언니의 버프를 받는다고 해도, 다른 사람까지 지켜가면서 싸울 여유는 없을 거야.”

순간 이나은의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떠올려봤으나, 그 역시 SS급 헌터를 상대할 타개책은 되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나은의 ‘힘’이 배수로 적용된 피해를 주기 위한 전제조건은 기술이 적중하는 것. 괴수야 인간을 보면 죽이기 위해 일단 달려들고 보는 존재이니 기술이 적중하기 쉽지만, SS급이나 되는 헌터가 그를 곧이곧대로 맞아줄 리는 없었다.

“혹시 저 둘이 어떤 식으로 전투하는지는 알고 계세요?”

“자세히는 몰라도 대충은 알고 있어.”

“나머지 헌터들은 역시 모르고요.”

“내가 있을 때까진 없던 사람들이라….”

방금 송태섭의 과거와 엮인 말을 들은 것 같았지만, 일단은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게 더 중요했기에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고 넘겼다.

“저 둘 외에 다른 헌터들이 얼마나 강한지, 또 어떤 식으로 전투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란 거네요.”

“그렇지.”

“안다고 해도 여기서 싸우는 건 별로 좋지 않은 선택인 거 같아. 여기서 싸우다가 시간이라도 끌렸다간 회사 측 헌터들까지 한 번에 상대하게 될 수도 있잖아.”

이화의 말대로다. 자칫하면 실험실을 지키는 회사 측 병력이 합류할 상황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싸움은 최대한 피하면서 들키지 않고 일행에 합류하는 걸 최우선으로 해야겠네. 그 이후에 어떻게 할지는 그때 가서 이야기하자.”

“응. 당장은 여기서 나갈 수 없으니 저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좀 지켜보자. 그동안 송태섭 헌터가 알고 있는 정보 좀 들려주세요.”

“오준석하고 방우준 말이지?”

“아니요. 강이란 헌터의 세력과 관련된 거라면 전부요.”

“전부? 알겠어.”

송태섭은 우선 강이란 세력의 조직도부터 이야기해주었다.

“대장인 강이란 밑에 부대장과 고문이 있고, 부대장의 밑에 행동대장 둘이 있어. 간부는 여기까지가 끝이고 나머지 조직원들은 행동대장 밑에서 활동하고 있어.”

행동대장 중 한 명은 이전에 공방전에서 다툰 권주혁. 그의 공백을 새로운 인물이 채웠을지까진 송태섭도 모른다고 했다.

“나머지 행동대장 한 명이 방우준이야. 어렸을 때부터 잔혹한 면이 돋보여서 일찍이 행동대장 자리에 올랐어.”

그의 전투 방식은 스프레이를 통한 각종 상태 이상 공격. 물론 맨손 격투도 수준급이라고 한다.

“그럼 오준석은 부대장쯤 되겠네요.”

“응. 오준석은 뭐랄까. 잘난 척이 극도로 심한 사람인데, 전투 방식이…. 흐느적거리면서 툭 치는데 엄청난 파괴력이 나온다고 해야 할까? 원리까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몸을 부딪치면서 싸우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남은 건 고문이네요.”

고문 이야기가 나오자 송태섭은 무척이나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가까스로 말을 끝냈다.

“고문은, 이젠 없어.”

“누군가 공석을 채웠을 수도 있는 거네요.”

“아니. 고문은 계속 공석일 거야. 그것만은 확실해.”

“그러면 저기에 강이란 세력의 중요 인물이 전부 있는 거죠?”

“그런 것 같아.”

다음으로 조직원의 수를 물어보려는데 이화가 우리의 입을 막았다.

“저기 좀 보세요.”

밖을 보니 무리에서 두 사람이 벗어나 있었다. 두 사람은 전력을 다해 앞으로 뛰어갔는데, 그들이 무리와 거리가 생겼을 즈음 방우준이 뒤를 쫓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지?”

네 발로 땅을 기어가듯 뛰는 방우준은 금세 두 사람 중 뒤처진 사람을 붙잡았고, 그대로 입 안에 스프레이를 뿌렸다.

스프레이를 삼킨 사람을 경련을 일으키더니,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자기 조직원을 죽인 거야?”

알 수 없는 방우준의 행위. 방우준은 곧 앞서가는 사람까지 붙잡았다. 이번엔 스프레이를 뿌리는 대신 그자를 다시 무리 쪽으로 집어 던졌다.

환호성을 지르며 무리에서 세 사람이 튀어나와 그자를 제압했고.

“빨리 숨어.”

그대로 우리가 있는 빌딩으로 끌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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