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69화 (70/168)

[13. 남겨진 사람들(4)]

저들이 빌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우린 황급히 부서진 책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오빠, 밑에 몇 명 들어왔는지 봤어?”

“끌려온 사람까지 더하면 총 네 명이었어.”

“만약에 저놈들이 우릴 눈치채면 어떻게 할 거야? 그냥 싸웠다간 나머지 놈들까지 우르르 몰려올 텐데, 그 사람들까지 감당할 자신은 없어.”

“그럴 일 없길 바라야지.”

“대화 중에 방해해서 미안한데,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빨리 결정해야 할 것 같다.”

반대편 책상에 따로 몸을 숨긴 송태섭이 바깥쪽을 눈짓했다.

곁눈질로 창밖을 바라보니 나머지 사람들이 우리 일행이 묶고 있는 빌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설마 들킨 거예요?”

“그것까진 모르겠다.”

“저쪽도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고 있겠죠?”

“당연하지. 오빠도 아람이랑 며칠 지내봐서 알잖아. 저놈들 이 거리에 들어섰을 때부터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을걸? 그러니까 저쪽은 걱정하지 말고 지금은 우리가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부터 생각해보자.”

그때, 아래에서 누군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정말 우리한테서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던 거야? 정말? 정말로? 아저씨, 그런 거였다면 생각이 정말 짧잖아! 정말 멍청한 거 아니야?”

이곳에 들어온 놈들은 조심성이라고는 없는 건지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말하는 내용이 다 들릴 정도로 크게 이야기했다. 앳된 목소리에 이어 이번엔 차분한 목소리와 칼칼한 목소리가 빌딩 안에 울려 퍼졌다.

“자기 형도 버리고 혼자 앞서가던데. 가족애, 그런 건 없는 건가요?”

“너 바보냐? 나이는 제일 많이 처먹은 주제에 이 사람이 형을 배려해준 것도 몰라?”

“그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요?”

“더 빨리 죽도록 배려해준 거잖아.”

“정말 그런 거야? 아저씨, 정말 배려심 깊네. 정말 마음에 든다.”

세 사람의 목소리가 섞여 기묘한 웃음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끌려온 사람을 비웃고 있는 듯했다.

“저 사람들이 무슨 관계인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끌려온 한 명은 적이 아닌 것 같지?”

“내 생각도 그래. 적은 세 명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

“만약에 저놈들을 쓰러뜨릴 거면 나머지 놈들이 반대편 빌딩으로 들어간 지금이 기회이긴 한데, 세 명 정도는 상대할 수 있지?”

“상대할 수는 있지. 근데 내가 나서면 소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어서, 반대편 빌딩에 들어간 놈들이 바로 눈치챌걸?”

확실히 이화의 공격은 위력이 세고 범위가 넓은 만큼 주변에서 눈치챌 수밖에 없긴 하다.

“기회가 있을 때 적을 줄여 놓는 게 나은데….”

“그러면 남매끼리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 궁리하고 있어 봐. 저놈들은 내가 처리할게.”

지금껏 우리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송태섭은 그렇게 말하며 책상에서 빠져나왔다.

“괜찮으시겠어요?”

“힘에 부친다면, 다른 곳으로 유인하기라도 해 볼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아래층에서 또다시 소란이 벌어졌다.

“야야, 이 바보 놈 지금 나 깨물었어!”

“아저씨, 정말 용감한데? 가족 이야기하니까 화난 거야? 정말 무서워서, 나 오줌 찔끔 쌀 뻔했잖아.”

“이 바보 자식이 지금 날 무시한 거지?”

“잠깐만요. 무슨 개짓거리를 하려고요?”

“강이란 대장님이 직접 택한 나를 이 바보 자식 따위가 무시해선 안 되는 거잖아! 당연히 본보기로 죽여버려야지!”

곧 단말마의 비명이 들리고.

“자, 봤지? 봤어? 봤냐고? 날 무시한 바보 자식들은 다 이렇게 되는 거야.”

“어쩌려고 죽인 거예요? 우리한테 본보기를 보여서 뭐 하려고 이런 개짓거리를 한 거예요?”

“이 자식 형도 죽었잖아. 가족끼리 만날 수 있도록 살짝 도와준 것뿐이야.”

“아까 상황은 부대장님께서 허가해주신 거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부대장님께서 이 사람이 죽은 걸 아신다면 저희 셋 다 목 잘릴 텐데…. 전 이 개짓거리에 참여한 적 없는 거예요.”

“엉? 그런가? 너, 우리랑 같이 지낸 세월이 얼만데 바보같이 우릴 저버리는 거야?”

“그게 아니라.”

“강이란 대장님께선 다른 건 몰라도 전자발찌를 찬 사람들끼리는 바보같이 배신하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

“잠깐!”

얼마 안 가 두 번째 비명이 들렸다.

“우릴 배신한 죄로 이 사람은 네가 죽인 거로 할 거야. 그리고 난 너를 막으려다가 정당방위로 널 죽인 거고. 근데 화나네. 옛날에 도둑질하다 걸렸을 때, 집주인이 경찰에 신고하려 했단 말이지? 감옥에 가기 싫어서 정당방위로 내 신체의 자유를 지키고자 그 바보 자식을 죽여버렸는데. 왜 정당방위 인정이 안 된 거야?”

“정말로? 멸망 이전의 세상은 정말 알 수 없다니까.”

본인들끼리 싸우다 두 명이 죽어버린 상황. 다행히 반대편 건물에선 이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이제 두 명만 상대하면 되는 것 같지?”

“네.”

“그럼 가볼게.”

지금이 빌딩 내의 적을 쓰러뜨리기 위한 절호의 기회란 생각이 일치했는지 송태섭은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송태섭 헌터가 아래쪽 정리해줄 동안,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 좀 생각해보자.”

“그거 말인데. 내가 한 가지 생각한 방법이 있긴 하거든?”

“뭔데?”

“오빠, 고소공포증 없지?”

“난 없지.”

“송태섭 헌터는?”

“잘 모르겠네. 근데 고소공포증은 왜?”

이화가 답하기도 전, 아래층 상황이 정리됐다며 송태섭이 우릴 불렀다.

“내려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금방 끝났네.”

“오빠는 송태섭 헌터랑 합류해. 난 옥상에 좀 가볼게.”

“옥상? 거긴 왜?”

“확인할 게 좀 있거든. 자세한 이야기는 송태섭 헌터까지 합류하고 난 뒤에 이야기해줄게. 오빠는 송태섭 헌터 옥상으로 데려와 줘.”

“알겠어.”

이화와 갈라져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두 남성이 머리 위에 손을 올린 채 벽에 붙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김아람 또래 정도로 보였다.

“뭐야? 이렇게 어린 애도 있었어요?”

“그러게. 세상 멸망하긴 했나 봐.”

“그쪽도 나이로 사람을 평가하는 거야? 정말 우리 가족이랑 다름없네. 그거 정말 멍청한 생각이야.”

나이 어린 쪽이 ‘정말 빌런’인 걸 보니,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나이 많은 쪽인 것 같다.

“두 명이나 되는데, 너무 빨리 제압한 거 아니에요?”

“지켜야 할 게 있으면 강해지는 타입이라. 둘한테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봐봐.”

송태섭은 정보를 캐라며 그들의 목에 대검을 겨눴다. 자신의 목을 겨눈 대검을 본 둘은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가 주둔진가요?”

첫 물음에 정말 빌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 옆의 사내는 이 바보 자식도 죽여버렸어야 했다며 욕설을 내뱉었다.

한숨을 쉬며 이해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에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주둔지 총인원은요?”

내 질문에 바보 빌런이 피식 웃었다.

“바보 자식들. 너넨 이제 죽었다.”

반면 정말 빌런은 온몸을 떨며 빌딩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덩치 있는 남성이 서 있었다.

“두 명 사망. 두 명 붙잡힘. 셋이 고작 둘을 상대 못 한 거냐?”

덩치는 침을 퉤 뱉으며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박수용 헌터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그래, 이 바보 자식들이 이 둘을 죽이고 저희까지 붙잡아서….”

“이놈들한테 질 정도로 약하다. 너희 정녕 우리 위대하신 강이란 헌터님의 부하가 맞는 거냐?”

남성이 주머니에서 리모컨 같은 걸 꺼내 버튼을 몇 개 누르자, 우리가 인질로 잡은 두 사람의 온몸이 파래졌다. 바보 빌런은 입을 뻐끔거렸으나 피만 주르륵 나올 뿐,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입에 거품을 문 채 쓰러졌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둘은 위대하신 강이란 헌터님의 부하가 될 자격이 부족해. 그래서 죽었을 뿐이야.”

“한때 동료였던 자를….”

“동료? 이 둘이 나랑 동료라고? 우린 위치가 달라! 난 관리자야! 이런 놈들이 강이란 헌터님의 부하가 될 자격이 충분한지 관리 감독하는 관리자라고!”

입술을 파르르 떨던 덩치는 흥분했다며 숨을 골랐다.

“위대하신 강이란 헌터님은 부하들에게 시련을 주셨지. 제대로 임무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전자발찌에 심어둔 장치를 작동해 독을 주입받아 즉사하도록. 물론 그런 시련이 존재하는 걸 아는 사람은 우리 간부뿐이긴 하지만.”

“간부라면, 네놈.”

“예비 간부라고 해 두지. 곧 있을 행동대장 선거에 출마할 예정이거든. 너무 말이 많았군. 중요한 정보를 여럿 말해버렸으니 너희도 죽여야겠네.”

덩치는 신나게 떠들어대는 걸 멈추고 양 주먹에 너클을 꼈다.

“어? 근데 너, 어디서 많이 본? 아, 아아- 그래, 송태섭 헌터였구나. 우리 위대하신 강이란 헌터님이 그쪽 이야기 자주 해서 알고 있어.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닥쳐.”

덩치의 말이 끝나기도 전, 송태섭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대검의 무게를 생각하면 믿기 힘든 엄청난 속도로 덩치의 앞까지 달려간 송태섭은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내 입을 막으려는 걸 보니, 위대하신 강이란 헌터님을 배신한 게 본인도 어지간히 부끄러웠나 보지?”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속도로 덩치의 주먹이 움직였다. 덩치는 대검을 너클로 받아내고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내 이름은 박수용. 적어도 널 위대하신 강이란 헌터님 앞에 끌고 갈 자의 이름은 알고 있으라고.”

“강이란은 위대하신 따위의 수식어를 붙일 만한 놈이 아니야.”

송태섭이 대검을 난폭하게 내리찍자 덩치는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하게 싸움에 임했다.

평소 냉정하게 검을 휘두르던 송태섭은 강이란의 이름을 들어서인지 난폭하게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렇게 치열한 공방은 송태섭이 대검으로 그린 궤적을 덩치가 받아치는 형국으로 진행되었다.

덩치는 자신만만했던 태도와는 달리 힘에 부쳤는지 점차 뒤로 밀려 어느새 전투의 장소는 1층 한가운데로 바뀌었다. 그 틈을 타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둘의 신경이 온통 전투에 쏠린 사이, 난 시체를 향해 기어갔다.

시체를 하나씩 살피니 예상대로 네 사람 중 한 사람은 전자발찌를 차지 않았다.

“이 사람이 끌려온 사람이겠지.”

대신 그의 발목에는 46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숫자? 아무 의미 없는 문신인 건가? 어찌 되었든 서른 명 모두가 강이란 세력은 아니란 거네.”

전자발찌를 차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건 아까 본 서른 명 모두가 우리의 적은 아니란 뜻. 어쩌면 인질로 잡혀 있는 사람들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SS급 헌터가 있다는 점은 걸리지만, 그래도 희소식은 희소식이네.”

시체를 살피는 와중에도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덩치는 힘에선 밀리는 듯 보였으나, 행동대장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말에 어울리게 검의 궤적을 주먹으로 비틀며 피해를 최소화하고 있었다.

검과 주먹을 주고받다가 덩치가 살짝 뒤로 물러섰다.

“위대하신 강이란 헌터님이 언급할 만큼, 강하긴 하네. 그러면 행동대장 선거를 위해 아껴뒀던 수를 써보도록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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