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70화 (71/168)

[13. 남겨진 사람들(5)]

“아껴뒀던 수? 그럴 여유 따윈 없었을 텐데?”

“위대하신 강이란 헌터님의 친구였다고 해서 네놈이 뭐라도 된 것 같아? 네깟 것 상대로 행동대장 후보인 내가 여유 부리는 건 당연하지!”

덩치는 송태섭을 비웃으며 기존의 너클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붉은빛이 감도는 너클을 꺼냈다. 아무래도 지금 장비 중인 저 너클이 덩치가 말한 아껴뒀던 수인 것 같다.

“아- 그래. 그것까진 인정해주지. 네놈을 사지 멀쩡하게 데려갈 순 없겠어. 난 아직 그 정도로 강한 건 아니니 말이야. 다리 하나 정도는 분지른 다음에 끌고 가 주지.”

새로운 장비를 낀 덩치의 협박, 그러나 송태섭의 분노는 다른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 자식의 친구? 그딴 소리 다신 입에 담지 마.”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이를 꽉 깨문 송태섭은 대검을 고쳐 잡았다. 둘의 신경이 곤두선 채 맞부딪힐 일만을 앞두고 있을 때. 별안간 계단에서 이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태섭 헌터, 화난 건 알겠는데 잠시 비켜주실래요?”

“숨어있던 놈이 있었나? 그래도 달라지는 건….”

“네네. 달라지는 건 없겠죠. 제가 끼어들지 않았어도 송태섭 헌터가 그쪽을 쓰러뜨렸을 테니.”

이화가 귀찮다는 투로 말을 끊은 동시에 계단 쪽에서 여러 개의 얼음 창이 뻗어 나와 덩치의 팔을 관통했다. 앞으로 뻗어가는 얼음 창은 그대로 기둥에 박혔고, 덩치는 거기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꼴이 되었다.

“끼어들어서 죄송해요. 반대편 빌딩 상황이 뭔가 심상치 않아서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었어요. 무엇보다 저 사람이 아껴뒀던 수가 뭔지 전혀 궁금하지 않기도 했고요.”

“신경 쓰지 마. 끼어들어 줘서 오히려 고마우니까.”

“지금 위대하신 강이란 헌터님의 부하인 내가 말하고 있는데….”

“쫑알쫑알 말도 많네.”

이화가 혀를 차자 얼음 창에서 쩍 소리가 나더니 기둥이 있는 벽 전체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에 휘말려 덩치의 입마저 얼어붙어 뒷말은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방금 너무 소란스러웠나? 저 덩치만 얼리려다가 힘 조절을 살짝 실패했네. 옆 건물엔 안 들렸겠지?”

“들렸어도 본인들끼리 치고받는 줄로만 알 거다. 강이란의 부하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아.”

경멸 섞인 송태섭의 말마따나 실제로 바깥에선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대체 이런 인간들을 데리고 어떻게 서울을 차지한 걸까요?”

“강이란한테만큼은 충성을 다하는 놈들이거든. 강이란, 그 자식 이전부터 남 구워삶는 건 잘해왔으니까….”

경멸 다음에 회한. 송태섭의 말에서 느껴지는 저 감정들은 박무성이 했던 말을 떠올리게 했다.

‘강이란 헌터님과 송태섭은 의형제 사이였어. 둘이 같은 보육원 출신에다가 동갑이거든.’

곧 그 말은 김아람이 했던 의심으로 이어졌다.

‘강이란 헌터에게 정보를 흘리는 자가 저희 사이에 있다는 거죠. 정확히는 정현 헌터님 일행 중 한 사람이요.’

“송태섭 헌터가 강이란 세력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잘 알고 있어서 다행이네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이화의 눈초리가 날카롭다. 이화의 비꼼이 이어지기 전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몇 가지 물어보게 입 부분만 풀어줄 수 있어?”

내 의도를 읽었는지 이화는 뭔가 말하려던 걸 그만두고 우산으로 덩치의 입 부근을 톡 쳤다.

곧 붉은빛이 감돌더니 우산이 닿은 부분의 얼음이 녹아내렸다. 입이 자유로워지자마자 덩치가 외쳤다.

“부대장님! 여기에 위대하신 강이란 헌터님의 적이!”

“정신 나갔나?”

덩치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기 전에 이화가 황급히 얼음으로 그자의 입을 완전히 뒤덮었다. 눈과 코 부근만 제외하고 얼음에 완전히 뒤덮인 덩치는 눈동자를 부릅뜨며 자신의 분노를 표현했으나 이화가 얼음을 치워줄 리는 없었다.

“뭘 대답해줄 것 같진 않네. 그냥 완전히 얼려버릴게.”

“강이란 세력의 규모 정도는 알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네.”

덩치를 뒤덮은 얼음은 점차 위로 영역을 넓혀 갔다. 그제야 덩치의 눈에 처음으로 공포가 드리워졌다.

“잠깐. 번거롭게 해서 미안한데, 입 부근만 다시 풀어줄 수 있어?”

“소리 지를 것 같으면 바로 얼릴 거야.”

완전히 얼어붙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 때문인지 이화가 다시 한번 입 부근의 얼음을 녹이자 덩치는 아까와 달리 조용히 입술만을 깨물고 있었다.

“딱 한 번만 물을게요. 그쪽 세력 규모가 어느 정도 되죠?”

“위대하신 강이란 헌터님, 더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지금 무슨?”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죽음으로 충성을 다할 뿐.”

그 말을 끝으로 덩치의 온몸이 파래졌다.

“리모컨을 쓰지 않아도 자결할 수 있게 설계된 건가? 딱 강이란 그놈이 할 만한 짓이네.”

송태섭이 욕설을 내뱉고, 이화는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눈짓으로 물었다.

“전자발찌에 독을 주입하는 장치를 달아놓았다 하더라고.”

“그럼 본인 스스로 죽었다는 소리야?”

“그런 것 같아.”

덩치가 보인 비뚤어진 충성심이 오히려 강이란의 부하다워서 더 역겹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반대편 빌딩 상황이 심상치 않다면서?”

“네. 몇몇 사람이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더라고요.”

“아저씨 쪽이 있다는 걸 들킨 건가?”

“그것까진 모르겠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저 멀리서 서른 명쯤 되는 무리가 이곳을 향해 오고 있었어요.”

“뭐?”

강이란 세력이 고작 이걸로 끝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벌써 다른 인원들이 왔을 줄이야.

“그래서 지금 당장에 일행하고 합류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아요.”

“요컨대 날이 어두워지면 이동하자는 거지?”

“네. 일단 옥상에서 상황을 더 지켜보면서 해가 지길 기다리죠.”

“이제 충분히 어두워진 것 같은데?”

“슬슬 움직여볼까?”

고개를 끄덕이자 이화는 거리를 내려다보던 송태섭을 불렀다.

“아직도 순찰 중인 헌터 있어요?”

“대여섯 명이 계속 돌아다니고 있긴 한데 신경 쓸 필욘 없을 것 같아.”

옥상에 오고 한 시간쯤 지났을 땐가? 쓰러진 헌터들을 발견했는지 아래층에서 소란이 있었다. 그 이후로 빌딩을 살피는 인원이 생겼는데, 이화가 옥상으로 올라오면서 계단을 완전히 망가뜨린 덕분에 그들의 수색이 이곳까지 이어지진 못했다.

우리를 찾지 못한 채 빌딩 수색을 마친 그들은 거리 수색에 돌입했다. 그러다 얼마 안 가 수색하는 게 질렸는지 지금은 설렁설렁 돌아다니며 시간만 죽이고 있는 상태다. 송태섭의 말대로 저놈들을 신경 쓸 필욘 없을 것 같다.

“아까 본 서른 명 외에 추가된 인원도 없고요.”

“어.”

“그나마 다행이네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두 사람 다 고소공포증 없죠?”

나와 송태섭의 침묵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이화는 우산을 꺼내 들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우산 끝에선 얼음 결정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럼 이야기한 대로 일행과 합류하러 가요.”

이화는 허공에 뜬 얼음 결정을 발판 삼아 선 채 자신의 앞에 다음 얼음 결정을 만들었다.

“떨어지지 말고 잘 따라오세요.”

조심하라고 단단히 주의시킨 뒤, 이화는 얼음 발판을 늘어놓으며 허공을 건너 반대편 빌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저희도 가볼까요?”

“그러자.”

이화를 따라 떨어지면 즉사할 높이에서 이동하다 보니 강이란 세력에게 발견될 일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반대편 빌딩 옥상에 도착했다.

빌딩 옥상엔 오래전 버려졌으리라 생각되는 담배꽁초뿐, 우리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주변을 살피는데 이화가 우리를 불러 모았다.

이화는 얼음 결정을 없애며 우리가 세운 방침을 상기시켜 주었다.

“저희의 방침은 일행을 데리고 다시 옥상에 복귀. 그리고 방금과 같은 방식이나 김화영 헌터의 스킬을 써서 다른 건물로 벗어나는 거예요. 들키는 순간 가만히 도망가게 놓아두지 않을 테니, 핵심은 놈들에게 절대 걸리지 않는 것. 이 점 명심해 주세요.”

“알겠어. 먼저 들어가지.”

이화의 작전 브리핑 이후 송태섭이 앞장서 조심히 옥상 문을 개방했다.

“내려가도 될 것 같다.”

송태섭의 말을 듣고 계단 틈새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저 밑에 희미한 빛이 있을 뿐, 강이란 세력의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저희가 불침번 서던 6층까지 가보죠.”

아군도 적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황. 우리는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최상층인 15층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15층. 14층. 13층.

별다른 소득 없이 한 층씩 내려가며 수색을 이어가던 중, 12층 구석의 사무실에서 이화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거 보세요.”

이화가 보여준 건 벽에 그려진 조그만 수레바퀴 그림. 김화영의 표식이었다.

“표식이 여기 있단 건 이 근처에 일행이 있을 수 있단 거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12층에선 그 누구와도 만날 수 없었다.

“이 층에도 없었네요.”

“자정이 지나면 김화영 헌터의 스킬로 일행들이 이곳에 돌아올 가능성은 없을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자정까진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아래층 더 살펴보다가 여기로 돌아오죠.”

김화영이 왜 이런 뜬금없는 장소에 표식을 남겼냐는 의문점만 얻은 채 우리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11층에 도착했을 때, 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이 우리를 맞이했다.

“여긴 또 왜 이래?”

11층엔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잔해, 물건을 비롯하여 하다못해 먼지까지 그 무엇 하나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빈 곳이었다는 듯이.

“처음 빌딩에 왔을 땐 안 이랬잖아?”

“어…. 그랬지.”

첫날 빌딩을 수색할 때 이곳 역시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여러 물건이 있었고, 비록 문이나 벽이 멀쩡하진 않았지만 여러 개의 방이 존재했었다. 그랬던 곳이 하루 만에 이렇게 깨끗해졌다니.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야? 오빤, 짐작 가는 거 있어?”

“나도 전혀 감이 안 잡힌다. 일단 아래로 더 내려가자.”

불길한 느낌이 엄습하는 걸 애써 뿌리치며 10층으로 내려갔다.

“뭐야? 여기도 똑같잖아.”

그러나 10층부터 6층까지. 모든 층이 11층과 마찬가지로 깨끗이 비어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바로 밑이 5층이니까, 거기도 한 번 가보자.”

“잠깐만요.”

혼란 속 아래로 내려가려는 송태섭을 이화가 멈춰 세웠다.

“5층에 사람들이 있어요.”

이화는 바닥에 귀를 대어 보더니 그렇게 단언했다. 이화 옆에 엎드려 바닥에 귀를 대니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부대장님은 출발한 건가?”

“그렇다. 숨어있던 쥐새끼 다 잡았다면서 박씨 남매 데리고 투기장으로 가셨다.”

“진짜? 난 왜 못 봤지?”

“‘이면’에 계실 거다. 지금쯤 ‘현실’로 돌아오셨을지도 모르겠군.”

“그러면 이해되네. 뭐, 나야 좋네. 부대장님 안 계시니까 난 좀 잔다.”

알 수 없는 단어들이 튀어나오는 가운데 한 가지 의미는 명백하게 전해졌다.

“…SS급 헌터한테 일행이 전부 붙잡혔단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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