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남겨진 사람들(6)]
“최악이네. 내가 오빠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지만 않았어도….”
이화는 말끝을 흐렸지만, 무슨 말이 이어졌을지는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나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일행이 강이란 세력에게 붙잡히지 않았을 거다. 이런 식의 자책하는 말을 하려던 거였겠지.
하지만 이화의 저 말은 전제부터 잘못되었다.
“그랬더라면 우리까지 전원이 붙잡힌 상태였겠지.”
15층부터 6층까지. 빌딩 안은 전투가 벌어졌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깨끗했다. 즉, 나머지 일행들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 하고 SS급 헌터에게 붙잡혔단 건데. 그렇게 강력한 상대인 부대장을 우리 셋이 함께 있었다면 쓰러뜨릴 수 있었다? 아무리 이화가 강하다곤 해도, 그건 무리였을 것 같다.
그러니 이화가 자책할 이유 따윈 없는 것이다. 우리가 있든 말든 부대장에게 패배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을 테니까.
“네가 잘못한 건 없어. 오히려 우리라도 그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하자.”
“현이 말이 맞아. 그리고 아저씨까지 붙잡혀간 이상, 누구의 잘못인지 따지면서 시간 낭비하고 싶진 않다.”
송태섭까지 내 말을 거들어주자 이화는 우산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그걸 이제 괜찮아졌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송태섭은 현재 상황을 정리했다.
“그래서 오준석이 다른 일행을 모두 붙잡아서 투기장으로 끌고 가는 중인 거지?”
이화는 자책은 그만두고 앞으로의 상황에 집중하기로 한 듯 송태섭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변해주었다.
“네. 그리고 박씨 남매? 그 사람들을 데려갔다고 들었어요.”
“그럼 우리가 할 건 간단하네. 저 밑의 헌터들을 제압한 다음 투기장의 위치를 알아내 그들을 쫓아간다. 맞지?”
“저희 셋, 우리 오빠 빼면 둘이네. 둘이서 저 밑의 헌터들을 어떻게? 아하, 지금 SS급 헌터는 없겠구나.”
이화는 반색하며 송태섭의 말에 동의했다. SS급 헌터가 이곳에 없는 이상 승산이 있다고 본 듯하다.
“투기장 위치까지는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긴 하겠네요. 근데 걱정되는 게 있어요.”
이화는 손가락 두 개를 펼치고 말을 이어 나갔다.
“부대장이 잡아간 일행들을 죽이진 않을지. 그리고 투기장에 간다고 한들 부대장을 쓰러뜨릴 순 있을지. 이 두 가지가 걸리네요.”
“잡혀간 일행들은 모두 살아있어. 그건 내가 장담해.”
“살아있다고요? 다행이긴 한데, 송태섭 헌터가 그걸 어떻게?”
“내겐 지켜야 할 사람들의 생사를 알게 해주는 특성이 있거든. 지켜야 할 사람이 이 세상에 없게 되면 그들의 존재를 인지할 수 없게 되는 식인데. 아직 특성의 적용 대상인 아저씨랑 김화영 헌터, 이나은 헌터, 임수연 헌터 모두 인지할 수 있어.”
송태섭의 말은 아직 그들 모두가 살아있다는 뜻으로 이어진다. 최악의 경우 택하려고 했던 귀환한다는 수는 선택지에서 제외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부대장을 쓰러뜨릴 수 있냐 여부는 말이지. 여기엔 현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우리 오빠요?”
“그 자식을 쓰러뜨릴 방법은 현이가 생각해 줄 거야. 아니면 쓰러뜨리지 않고도 일행을 구출할 방법을 생각해 주거나.”
송태섭은 정말 한 치의 의심도 섞이지 않은 톤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하기야 우리 오라버니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죠.”
“아니, 저한테 왜 그런 기대를….”
왜 그런 기대를 하는 거냐고 물으려는 찰나, 송태섭이 말을 끊었다.
“강이란 그 자식한테서 벗어난 이후 여러 곳을 떠돌다 김요한 세력의 주둔지에 이르게 되었어. 그사이 많은 그룹을 만났는데, 단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는 건 지금 이 그룹이 처음이야. 실제로 시련이 진행된 이후로 우리 일행만큼은 그 누구도 잃은 적 없잖아?”
“그건 저 때문이 아니라.”
어디 가서 쉽게 꿀리지 않을 전투력을 지닌 이나은과 송태섭. 순간이동이라는 사기적인 스킬을 지닌 김화영. 버퍼 쪽에 특화된 수연이. 그 누구 하나라도 없었더라면 이미 사상자가 나왔을 거다.
나는 죽어서 귀환하는 특성 하나만으로 이들에 얹혀가는 신세일 뿐인데. ‘CONTINUE?’ 특성의 존재를 몰라서인지 나에 대한 송태섭의 평가는 과장되어 있다.
“본인을 과소평가하진 말자. S급 헌터가 속한 그룹도 전멸하는 와중에 우리 일행이 그런 꼴을 겪지 않은 건 네 덕분이라는 걸 모두가 알걸? 심지어 이나은 헌터마저 네 말은 완전히 믿어주는 눈치던데?”
다들 이유도 묻지 않고 내 말에 따라준 게 이런 이유에서였던가. ‘CONTINUE?’ 특성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친 건데 이런 신뢰를 보내줄 줄이야.
뭔가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 든다.
“그러니 염치없는 건 알지만 부탁할게. 아저씨는 내게 마지막으로 남은 가족이야. 나를 어떻게 굴리든 상관없으니까, 지금까지처럼 낙오자가 없도록 이끌어줘.”
송태섭은 고개까지 숙여가면서 부탁했다.
“낯간지러우니까 고개 숙이진 마세요. 그보다 그 말 진심이죠? 어떻게 굴려도 상관없다는 말.”
“어. 아저씨만 구할 수 있다면 상관없어.”
어차피 강이란을 꺾기 위해선 넘어야만 하는 관문. 부탁받지 않았어도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좋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부대장이란 큰 전력을 이참에 한 번 꺾어보죠.”
20분 뒤. 난 계단에서 제일 먼 곳에 납작 엎드려 아래층의 소리를 엿듣기 시작했다. 6층에 홀로 남아있는데 몸까지 제대로 숨기지 못하는 상황이라 불안감은 떠나가질 않았지만, 이번 작전에서 나 역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에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귀에 온 신경을 쏟았다.
다행히 강이란 세력에 들어가기 위해선 목소리가 커야 한다는 조건이라도 있는 건지 아래층 헌터들의 목소리는 너무나 잘 들렸다.
“방우준 헌터님은 언제쯤 오실까?”
“다음 실험체들 끌고 오려면 서너 시간은 걸린다고 그냥 내일 아침에 올 거라더라.”
“아오! 서너 시간이라고 하니까 또 화나네. 왜 우리가 이딴 실험체들이나 지키고 있어야 하냐고! 안 그래?”
“지금까지 오십 명 끌고 왔으니까, 이제 오십 명만 더 끌고 오면 돼. 공덕까지만 데려가면 끝나니까 조금만 더 참아봐. 그래도 저놈들 덕택에 지난번 시련은 손쉽게 끝났잖아.”
“그건 맞지. 실험체 한 놈만 꽁꽁 묶은 채 반대편 구역으로 넘기고 한 시간도 안 돼서 시련을 끝내긴 했지. 물론 박다현 헌터님이 그 악어를 ‘이면’으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큰일 났겠지만.”
저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으니 역겨움이 몰려왔다. 제대로 들은 게 맞았다면 저들은 네 번째 시련을 돌파하기 위해 단 한 명의 실험체만 반대편 통로로 보내는 방법을 쓴 것 같다. 쏟아지는 괴수 무리에게 그 사람을 바치는 것으로 본인들은 손쉽게 시련을 끝마친 것이다.
“그 사람들이 이래서 그렇게까지 걱정했던 거였구나.”
실험체들이 받는 처우를 듣고 나니, 최주일과 신임 판사가 실험체로 잡혀 있는 가족을 걱정했던 게 이해되었다.
만약 이화가 거기에 잡혀갔더라면. 그런 끔찍한 가정을 하며 인상을 찌푸릴 때, 계단 쪽에서 송태섭이 반지를 빼며 모습을 드러냈다.
“아래쪽 상황 다 보고 왔어. 사람들은 4층에 주로 몰려 있는데, 듣기로는 대다수가 붙잡혀 온 사람들인 것 같더라.”
“네. 공덕 실험실로 보내질 실험체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해봐야 열댓 명 정도야.”
“상대할 만한 거죠?”
“어. 그럼 시간 낭비할 것 없이 바로 시작한다.”
“네.”
송태섭은 다시 반지를 껴 모습을 감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참 쪽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났다. 모습을 감춘 송태섭이 대검으로 계단 손잡이 부근을 후려친 듯했다.
그를 신호 삼아 바깥에선 엄청난 붉은빛이 일었다. 최대 화력으로 불길을 쏘아 올리겠다는 말에 걸맞게 열기가 여기서도 느껴졌다.
순식간에 근방의 하늘을 메운 이화의 불길이 이목을 안 끌 순 없었는지 아래쪽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곧 헌터 몇몇이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허겁지겁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로써 우리 계획의 첫 번째 단계, 적을 분산시키는 건 성공했다. 제법 많은 수의 헌터가 이화에게 향한 것 같긴 해도 실험체들을 지키기 위한 헌터들이 여전히 남아있긴 할 거다. 그들을 제압하는 게 우리 계획의 다음 단계.
더는 계단을 오르는 헌터들이 없음을 확인한 뒤, 난 재빨리 4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앞서 송태섭이 정찰했던 대로 4층엔 수많은 사람이 암울한 표정을 지은 채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런 사람들 사이 오직 세 사람의 표정만이 밝다. 실험체들을 지키는 역할을 맡은 건 무장한 채 시시덕대는 저 헌터들인 것 같다.
상황 파악을 마친 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궁중 식도를 장비했다.
“아름다운 밤이죠?”
최대한 목소리를 깔아서 말하자 세 사람의 인상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넌 또 뭐냐? 저 위 것의 동료라도 되냐?”
“아니면 이미 붙잡힌 놈들의 일당?”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저놈 죽여버려. 부대장님께 놓친 놈들 있다는 걸 들키면 우리 다 죽은 목숨이니까.”
“네네. 이건우 헌터님 분부대로 해야죠.”
“저렇게 아름다운 불꽃이 하늘을 수놓고 있는데 그런 험한 말은 안 어울리지 않나?”
내 말에 콧방귀를 끼며 명령을 받은 두 헌터가 각자의 무기를 겨누며 내게 다가왔다.
“검에 찔리면 아파. 여러 번 찔릴 바엔 한 번에 죽는 걸 추천해.”
“잘 알고 계시네요. 검에 찔리면 아프죠. 저도 여기 검 하나 들고 있는데, 안 보이시나요?”
타이르는 말투를 하자 원했던 대로 두 헌터는 약이 바싹 올랐다.
“고작 식도로 우릴 겁주는 거냐?”
“전 경고했어요.”
두 헌터가 앞뒤 가리지 않고 내 바로 앞까지 달려들었을 때.
“검에 찔리면 아프다고요.”
두 사람의 복부에 붉은 선이 새겨졌다. 검에 베여 피를 철철 흘리는 자신의 복부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두 사람은 허무하게 쓰러졌다. 그제야 반지로 모습을 감추고 있던 송태섭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단순한 놈들이네요. 간단한 도발에도 넘어와 주고.”
“저 한 놈은 죽이지 않고 제압한다?”
“네. 그래야 투기장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알겠어.”
반지를 내게 던져 준 뒤, 송태섭은 곧장 대검을 끌며 홀로 남은 이건우에게 나아갔다.
“모습을 감춰둔 건가? 비겁한 놈들.”
이건우는 욕설을 내뱉으며 낫 두 자루를 겨눴다.
다른 두 헌터에게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던 만큼 이건우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송태섭의 대검이 그리는 묵직한 궤적을 낫에 살짝 걸쳐 비튼다든가. 대검이 급소를 긋기 직전에 몸을 틀어 사선에서 벗어난다든가. 이건우는 요가라도 배운 건지 무척이나 유연한 몸놀림과 수준급의 낫 놀림으로 공격을 하나하나 회피해나갔다.
몇 번 검을 휘두르고는 전투가 난전으로 이어질 것이라 예상했는지 송태섭은 대검을 반 바퀴 크게 휘두르며 적과의 거리를 벌렸다.
“너도 행동대장 선거에 나서는 후보인가?”
“당연하지. 근데 그걸 어떻게 알았지? 또 멍청한 놈 중 하나가 나불거린 건가? 나불거리길 좋아하는 놈이라면 네놈들한테 당한 박수용 놈이겠군.”
“네놈이나 그놈이나 실력은 고만고만해서 예상해본 거야.”
“고만고만? 네 자식이 말할 건 아닌 것 같은데?”
필요한 만큼 시간을 벌었는지 송태섭은 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에 내 쪽을 얼핏 보고는 다시 대검을 들었다.
“제정신으로 하는 행동이야.”
그러곤 자신의 발등을 검으로 베었다.
[스킬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발동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