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72화 (73/168)

[13. 남겨진 사람들(7)]

스킬이 발동됨과 동시에 이건우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의 발등에도 송태섭의 발등에 난 것과 똑같은 상처가 새겨진 것이다.

“뭣?”

별안간 발등을 베인 이건우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게 두 사람의 승부를 가르는 지점이었다.

이건우가 휘청거린 틈을 놓치지 않고 송태섭은 거칠게 대검을 휘둘렀다. 이건우도 질세라 낫을 앞으로 뻗었으나, 균형을 잡느라 힘을 제대로 주지 못한 탓인지 이번만큼은 대검을 막아내지 못했다.

힘에서 밀린 낫은 핑그르르 돌며 저 멀리 날아갔고, 방어 수단을 잃은 이건우는 그대로 대검에 베여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죽이진 않았다. 잠시 기절했을 뿐이야.”

그렇게 말하며 송태섭은 쓰러진 이건우를 차 내 발치로 보냈다.

송태섭의 말대로 이건우의 상반신은 위아래로 미세하게 들썩이고 있었다.

“상처는 괜찮으세요?”

“신경 쓰지 마.”

송태섭은 익숙한 몸짓으로 소매를 찢어 자신의 발등에 붕대 대신 감았다.

“네 친구 없이도 이 정도 응급 처치쯤은 할 수 있으니까. 그보다 다른 사람들하고 이야기 안 해도 되겠어?”

응급 처치를 끝낸 송태섭은 이건우 옆에 선 채 대검을 바로잡았다. 내가 실험체들과 이야기할 수 있도록 주변을 경계해주려는 눈치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네 동생이 시선 끌어준 덕분에 여기로 더 올 헌터도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네 할 일 해.”

“그럼 깨어나면 불러주세요.”

“알겠어.”

기절한 사람이 깨어나길 멍하니 기다리는 것보다야 실험체로 붙잡혀 온 사람들에게 뭐라도 정보를 얻어두는 게 낫겠다는 판단하에, 이건우는 송태섭에게 맡겨두고 제일 가까이에 있던 청년에게 다가갔다.

“저희는 여러분을 해칠 생각이 없으니 겁먹지 않으셔도 돼요.”

청년이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어 최대한 미소 지으며 다가갔으나 그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뒤로 물러서기만 했다.

“저, 저는 안 돼요. 다른 사람에게 가주세요.”

“정말 해칠 생각 없어요. 봐요, 칼도 집어넣었잖아요.”

“제발 전 이대로 놔두세요.”

궁중 식도를 집어넣으면서까지 ‘난 전혀 위험하지 않은 사람이다.’를 온몸으로 표현해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청년은 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영문 모를 소리만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도저히 대화가 성립될 것 같지 않아 바로 옆의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녀 역시 겁에 질린 표정으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혹시 잠시만 대화 나눌 수 있을까요?”

“안 돼요. 대화 나눴다는 사실을 그 사람이 알게 된다면 저희 그이는…. 그것만은 절대 안 돼요.”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저희가 대화 나누었다는 사실을 강이란 세력의 헌터들이 알게 될까 봐 걱정이신 거라면 괜찮아요. 제 동생이 저 위에서 남은 헌터들을 전부 쓰러뜨리고 있거든요.”

“그 사람은 모든 걸 알고 있어요. 벗어날 수 없어요. 어떻게 해서도 벗어날 수 없다고요.”

“몇 가지만 물어본 뒤에 저희가 여기에서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드릴 테니까 진정하세요.”

“도망쳐봤자 의미 없어요. 그냥 저흰 대화했던 적 없는 거예요.”

분명 눈앞에서 자신을 잡아두던 헌터들을 쓰러뜨리는 걸 보았을 텐데도 이들은 너무나 비협조적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고맙다, 구해달라, 도와달라 등의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무기력하게 본인들을 이대로 놓아달라는 말을 하다니.

“대체 왜?”

이들의 이상한 태도에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무리에서 한 여성이 일어섰다.

“대화라면 저랑 해요.”

주변에서 만류했으나 그녀는 꿋꿋하게 내 앞까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전 지은정이라고 해요.”

“네?”

지은정이라면 신임 판사가 구해달라던 사람.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제 이름에 이상한 데라도?”

“아니요.”

애써 놀란 마음을 감추며 지은정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전 정현이에요.”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대답해드릴게요. 다만, 다른 분들은 정현 헌터님과 대화하지 말라고 저를 뜯어말린 거예요. 이것만큼은 확실히 해주세요.”

“일단 알겠어요. 그런데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저희를 이송하는 헌터들을 쓰러뜨린 사람하고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가족이 무사하지 않을 거거든요.”

“여기서 도망친 후에 회사에서 일하는 가족에게 빠져나오라고 하면….”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요. 저희라고 도망친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껏 도망친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오준석 헌터에게 붙잡혀왔어요. 그리고.”

지은정은 뒤쪽의 사람들을 힐끗 바라보더니 목소리 낮추어 말했다.

“그리고 오준석 헌터는 붙잡아온 사람들의 눈앞에서 그들의 가족이나 애인을 고문하고 양다리를 잘라버렸어요.”

“도망친 사람이 아니라 가족을요?”

“네. 오히려 도망친 사람들은 다시 멀쩡하게 실험실로 돌려보내졌어요. 실험체를 훼손할 순 없다면서…. 그런 사람들을 워낙에 많이 보다 보니까 이젠 다들 본인의 처지를 받아들이게 됐어요. 여기서 다시는 벗어날 수 없다는 걸요.”

그래서 지금도 도망칠 생각조차 안 하고 무기력하게 있던 건가.

“자, 본론으로 돌아가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한 거죠?”

“혹시 투기장이란 곳을 알고 계시나요?”

“죄송해요. 그건 모르겠네요.”

“그러면 실험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시나요?”

지은정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공덕역 지하라고 조그맣게 답했다.

“꼴 보기 싫은 놈들을 치워주셔서 알려드리긴 했는데, 실험실하고 엮여서 좋을 건 없을 거예요.”

“안타깝게도 이미 엮일 대로 엮여서….”

“붙잡힌 사람을 구하러 온 헌터들 전부가 오준석 헌터한테 살해당했어요. 설령 그럴 생각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접는 게 좋아요.”

지은정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실험실에서 무슨 실험을 하길래 그렇게까지 하면서 당신들을 가두어두는 거예요?”

지은정은 대답 대신 자신의 팔뚝을 보여주었다. 앙상한 그녀의 팔뚝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주삿바늘 자국이 있었다.

“저한텐 알 수 없는 약물을 주사하고 있어요. 저분한텐 매일같이 끓는 물을 끼얹고 있고. 그리고 저 뒤의 분한텐 얇은 옷만 입은 채 며칠 동안 냉동고에 들어가 있게 해요.”

한 명 한 명 어떠한 고통을 겪고 있는지 지은정은 담담하게 열거했다.

“마지막으로 주무시고 계신 어르신은 며칠 동안 잠을 못 자게 해요. 그런 고문을 실험이라면서 하고 있어요.”

“왜 그런 짓을?”

“스탯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네요. 제물에 적합한 신체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자세한 건 몰라요. 설명해준 적이 없으니까. 아! 그리고 강남 쪽의 실험실에선 정반대의 실험을 하고 있다는데, 두 곳의 실험이 성공하기만 하면 인류에게 다시 희망이 생긴다고 했었어요.”

“강남 쪽에도 실험실이 있어요?”

“듣기로는 그런 것 같더라고요. 이딴 실험으로 무슨 희망이 생긴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이런 끔찍한 실험을 하는 곳이 공덕에만 있는 게 아니라 강남에도 있다니.

“물어보실 건 이게 다인가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혹시 최유라라는 분 여기 계신가요?”

“유라라면. 서강대교 쪽에서 여기로 오는 중일 거예요. 유라랑 아는 사이신가요?”

“간접적으로는 아는 사이죠.”

“간접적으로요?”

“그분 아버지께 부탁받은 게 있거든요. 그래서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부탁이요? 할 수 있다면 제가 전해드릴까요?”

“괜찮아요. 제가 다음에 직접 전할게요.”

지은정은 ‘다음에 직접’이라는 부분을 읊조리더니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기서 후발대가 도착하는 걸 기다리려는 거예요? 안 돼요. 당장 서울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치셔야 해요. 안 그랬다간 오준석 헌터에게….”

“후발대가 도착하는 걸 기다리진 않을 거예요. 붙잡혀 간 일행들을 구하러 가야 하거든요.”

말을 끊자 지은정은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다음에 직접 전한다는 건?”

“일행들을 구한 뒤엔 공덕 실험실에 갈 거거든요. 거기서 얼굴 보고 직접 말 전하려고요.”

“방금까지 제가 한 말 못 들으셨어요? 붙잡힌 사람을 구하러 온 헌터들 전부가 오준석 헌터한테 살해당했다니까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지은정 뒤쪽의 무기력한 사람들 얼굴을 하나하나 보았다. 그런 다음 그들을 향해 말했다.

“전 당신들을 구해줄 생각이 없으니까요. 제가 왜 처음 보는 사람들의 힘이 되어주겠어요? 그래서 득 보는 게 어디 있다고? 오히려 그 반대예요. 당신들이 저한테 힘 좀 보태주어야겠어요.”

내 말에 그들의 표정에서 공포가 지워지기 시작했다. 대신에 당혹감, 분노, 놀람 등의 새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의 감정이 어찌 되었든 지금은 상관없다. 내 말을 듣기 시작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제가 실험실에 가는 이유는 간단해요. 실험실을 운영하는 쪽이 저희를 건드렸거든요. 그놈들한테 복수하려면 실험실을 망가뜨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해서 실험실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 걸리는 게 있어요. 실험실을 망가뜨린다고 해도 저희 쪽수로 그놈들한테 복수할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서요. 그래서 당신들한테 힘 좀 빌릴 생각이에요.”

지은정이 어이없다며 따져 들려 했으나 서둘러 말을 이어 그를 제지했다.

“그러니 여기서 저랑 거래하죠.”

“거래?”

“그놈의 오준석 헌터가 지금 제일 문제인 거잖아요. 도망쳐도 오준석이 막고. 구하러 와도 오준석이 막고. 그딴 놈 저희가 쓰러뜨려 줄게요. 이게 제가 내걸 조건.”

“오준석 헌터는 쓰러뜨릴 수 없….”

“쓰러뜨릴 수 있죠. 당연히. SS급 헌터라 해도 결국엔 인간인데, 당연히 쓰러뜨릴 수 있어요.”

다소 억지 부린 감이 있긴 했지만, 지은정은 입을 다물어 주었다.

“저희가 오준석 헌터를 쓰러뜨리고 실험실로 가면 그때 당신들은 선택하면 돼요.”

“선택이라면 어떤 걸?”

“저희를 도와 실험실을 망가뜨린 다음에 당신들과 가족들을 힘들게 만든 놈들까지 함께 쓰러뜨릴지 말지를요.”

내 이야기를 들은 모두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 예상 밖의 이야기에 놀란 듯하다.

“이대로면 저희 쪽의 조건이 살짝 약할 수도 있으니까 오준석 헌터를 쓰러뜨린다는 거에 한 가지 조건을 덧붙일게요. 치료, 스탯 상승, 무기 제공 등. 차후 실험실을 만든 놈들하고 맞붙는 데 필요한 건 전부 저희 측에서 준비할 겁니다. 그리고 실험실을 망가뜨린 직후엔 서울 전역에 그 사실을 알려서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여러분의 가족도 무사히 도망치도록 돕겠습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걸 수 있는 조건인데, 잘 생각해보세요.”

거기까지 말하고 송태섭에게 돌아가 쓰러져 있는 이건우를 들쳐 멨다.

“대답은 실험실에서 듣도록 할게요.”

그리고 저들끼리 놓아둔 채 이건우를 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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