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남겨진 사람들(8)]
위층에 올라오자마자 이건우를 내팽개치고 심호흡부터 했다.
아무리 방송 체질이라곤 해도 중요한 제안을 즉석에서 생각해내 말하는 건 역시나 힘들었다. 더군다나 오준석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허세 섞인 태도를 유지하는 데에 온 신경을 쏟았으니 기가 완전히 빨릴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미션으로 받은 02 댄스 추는 것을 피하고자 시청자들하고 그 자리에서 흥정했던 경험이 없었더라면 제대로 된 거래 조건을 제시하기도 전에 탈진하고 말았을 거다.
“일단 막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는데, 저분들한테 제 뜻이 제대로 전해졌을까요?”
“적어도 나한텐 전해졌어. 다들 대강은 알아들었을 거야.”
숨을 고를 수 있도록 내 등을 쓸어주며 송태섭이 대답했다.
“저번에 실험실로 가면 우리를 도울 전력을 구할 수 있다고 했잖아. 그게 저 사람들이었어?”
“네. 저분들이라면 저희만큼이나 회사에 쌓인 게 많을 테니까 반드시 도와주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런가? 그동안 너무 힘든 일들을 겪으셔서 몸도 마음도 많이 상한 것 같던데, 우리를 도울 힘이 남아 있을까?”
지은정에게 들은 실험 내용은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로 너무나 끔찍한 수준이었다. 송태섭의 말마따나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한 저들에게 당장 반기를 들고 적에 맞서 싸우라고 하는 건 무리인 게 맞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거래를 제안한 이유는 내가 노리는 건 이들 모두가 전투에 참여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노리는 건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그들의 가족이나 애인.
신임 판사나 최주일을 떠올려보면 그들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본인의 업무를 다하고 있었다. 아마 인질로 잡아둔 실험체들을 빌미로 들면 그들을 건드리지 않고도 회사 업무를 시킬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실험체로 붙잡혔던 사람들이 우리 쪽에 합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당연히 우리를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설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그들이 우리에게 합류하게 된다면 자연스레 전력도 정보도 보충될 거다.
그게 이번 거래에서 내가 노리는 것.
“저분들이 돕는다는 뜻만 보여도 충분해요.”
“네가 그렇다면야 그런 거겠지.”
“물론 오준석 헌터를 저희가 쓰러뜨린다는 게 전제지만요.”
송태섭은 잠깐 생각하더니 의문을 표했다.
“그놈을 쓰러뜨리는 게 그렇게 의미가 클까? 그놈이 쓰러져도 강이란 놈이 남아 있잖아.”
“대화하는 동안 강이란에 대해 한 번도 언급 안 한 거로 보아선, 저들에게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은 오준석 헌터인 것 같아요. 실제로 도망치는 사람이나 구하러 온 사람들을 처치한 건 오준석 헌터이기도 했고.”
“그런가? 그래서 오준석을 쓰러뜨리는 거로 거래를 한 거구나. 그럼 그 자식 쓰러뜨릴 방법을 벌써 생각해낸 거야?”
“아니요.”
딱 잘라 말했다.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봐야죠.”
“분명 거래하자며 이야기할 땐 쓰러뜨릴 수 있을 것처럼 말했잖아.”
“그거야 허세 부린 거죠.”
“어쩐지 표정부터 어색하더니만.”
“그래도 어떻게든 쓰러뜨릴 생각이니까 됐어요. 그 방법을 생각하려면 저 인간이 뭐라도 말해주긴 해야 할 텐데….”
바닥에 철퍼덕 엎어져 있는 이건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박수용을 생각했을 땐, 이건우 역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자결하는 걸 택할 것 같긴 하다.
“아까 네가 대화하는 동안, 주머니를 뒤져서 리모컨을 찾긴 했거든.”
내 걱정을 눈치챘는지 송태섭은 바지춤에서 리모컨을 꺼냈다.
리모컨에는 딱 하나의 버튼만이 달려 있었다. 그건 바로 해골 그림이 새겨진 버튼. 이 버튼이 무슨 용도로 사용되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리모컨을 이렇게 전자발찌를 찬 사람한테 가져다 대면 버튼에 불빛이 들어와.”
리모컨을 이건우 쪽으로 향하자 버튼엔 붉은빛이 들어왔다.
“그 상태로 버튼을 누르면 꽥- 인 거겠죠?”
“그렇지 않을까? 그런데 전자발찌를 해제하는 버튼 같은 건 없더라고.”
“힘으로 풀어보는 건 어때요?”
“그랬다간 폭발하거나 자동으로 독이 주입되지 않을까? 그러지 않고서야 전자발찌를 부하에게 채울 이유가 없잖아. 혼자 풀어버리면 그만인데.”
“그렇긴 하네요.”
“어쨌든 전자발찌가 있는 한 저 자식이 그냥 죽어버릴 가능성도 놓을 순 없을 것 같다.”
그럴 일은 없길 바라지만, 이대로 이건우에게 투기장 위치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결국 이화 쪽에 기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화 쪽은 아직 해결 안 됐을까요?”
“며칠 동안 네 동생 전투하는 거 봤을 땐 이미 끝났을 것 같긴 한데. 늦는 걸 보니 따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아직도 질문하고 있다던가, 뭐 그런 이유?”
“그렇겠죠?”
그때 이건우 쪽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 자식한테 알아낼 수 있는 것부터 전부 알아낸 다음에 네 동생한테 가 보자고.”
송태섭은 내려뒀던 대검을 다시 들어 이건우의 목에 겨누었다.
“제기랄. 왜 죽이질 않았지?”
“쓸데없는 말 말고 묻는 말에만 답해.”
이건우가 입을 열자마자 송태섭은 곧장 투기장의 위치를 물었다.
“푸흐흐흐.”
“뭐가 웃긴 거야?”
“부대장님께 붙잡혀 간 네 동료를 구하기라도 하려고? 무리야, 무리. 지금이라도 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망치는 게 나을 텐데? 아하!”
정말 웃긴 말을 들은 양 미친 듯이 웃던 이건우는 송태섭의 얼굴을 보고는 이제야 알아차렸다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 송태섭이잖아. 푸흐흐흐. 그러면 투기장 위치를 알려줘도 되겠네. 부대장님이 네 녀석만큼은 죽이지 않고 살려둘 테니까 말이야. 이래 봬도 ‘옛 친구의 정’ 같은 게 있지 않겠어?”
그 뒤로도 한참을 웃던 이건우는 투기장의 위치를 말해주었다.
“투기장에 가고 싶으면 용산역으로 가면 돼. 근데 너 외에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아닌가? 어쩌면 선수로 지내게 될지도.”
“선수? 그게 무슨 소리야?”
“직접 가서 알아보든가. 난 여기까지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송태섭이 멱살까지 잡아가며 다그쳤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이건우의 몸은 파래져 있었다.
“뭔가를 더 말해줄 것 같진 않네요.”
“오준석에 관해서도 알아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그래도 투기장 위치는 어딘지 알아냈잖아요. 그거로도 큰 소득이에요.”
오준석 공략의 힌트는 이화 측에서 얻길 기대해봐야 하나.
“여기서 더 할 건 없으니, 일단은 이화한테 가죠.”
이화와 다시 합류한 곳은 옥상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아래인 12층. 옥상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던 중, 이화의 부름에 우린 그곳에서 멈춰 섰다.
“이쪽이야.”
우리가 빤히 바라보자 이화는 옥상 쪽은 다 정리되었다며 지금은 여기가 더 급하다고 우리를 끌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이화가 발걸음이 멈춘 곳은 김화영의 표식이 발견된 장소. 그곳엔 아까 없던 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곧 두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자 입이 떡 벌어졌다.
쓰러져 있던 사람은 김아람과 김화영이었다.
“어디서 만났어?”
“옥상 쪽에 올라온 헌터들 정리하고 오빠네 만나러 아래로 내려가는 길에 아람이가 계단에 쓰러져 있던 걸 발견했어. 나를 보자마자 큰일 났다는 말만 하고 바로 기절해서 혹시나 해서 여기로 오니까 김화영 헌터도 있더라고.”
두 사람의 상태는 얼핏 보기에도 심각해 보였다. 상·하의 모두 피에 물들어 원래의 색을 잃어갈 정도였으니, 두 사람이 얼마나 힘든 일을 겪었을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나머지 일행은?”
송태섭의 물음에 이화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탈출한 사람은 둘뿐인 건가.”
“…응.”
안타까움 속 내뱉은 말에 김화영이 답했다. 그녀의 목소리에선 천진난만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오로지 피곤함만이 배어 나왔다.
“정신이 좀 드세요?”
“아파.”
몸을 일으키려던 걸 포기하고 김화영은 바닥에 드러누운 채 호흡을 골랐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지나가고, 김화영은 기합과 함께 벽을 붙잡고 일어섰다.
“다른 사람들은 못 데려왔어. 미안해.”
“저희가 없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김화영에겐 미안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강이란 세력의 다음 무리가 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어림잡아 10시간 정도라고 해도, 부대장이 탈출한 두 사람의 부재를 눈치채고 이곳으로 오고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송태섭이 상처 부위를 치료해주는 동안 질문을 강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고맙게도 김화영은 힘든 와중에도 자신이 겪은 일을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너네도 봤을 거야. 밖에 처음 보는 헌터들이 퍼레이드처럼 걸어오는 거. 그래서 우린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거든. 근데 이 건물로 들어오는 거 있지?”
그 뒤로 일행은 6층에 숨어있다가 기회를 봐서 우리랑 합류하려 했는데, 그만 부대장에게 들키고 말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부대장이랑 싸우기 시작했어.”
“건물 안에서요?”
“음- 맞는데 틀려. 이 건물에서 싸운 건 맞는데, 여기서 싸운 건 아니야.”
김화영은 한참 동안 단어를 고르다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건물에 있었는데 여자애가 스킬 쓰니까 갑자기 주변이 온통 일렁이는 거야. 여자애 말로는 ‘이면’으로 왔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런 이상한 세계에서 싸웠지.”
별안간 6층부터 11층까지 완전히 빈 곳이었던 게 떠올랐다.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건가?”
“어! 나은이도 그런 이야기 했어. 뭔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것 같다고. 난 그거 같더라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내가 앨리스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어.”
“느낌이 많이 달라진 것 같긴 하지만, 대충 느낌은 알겠어요. ‘이면’과 관련된 부분은 여기서 넘어가죠. 그래서 싸움은 어떻게 됐어요?”
“수연이 도움으로 나은이가 엄청나게 강해진 다음에 부대장이랑 싸웠거든. 그런데 너무 이기적이었어.”
김화영은 굉장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당시 상황을 묘사하려고 애를 썼다.
“우리 공격은 하나도 안 닿는데, 자기 공격은 반드시 닿는 느낌. 이게 맞겠다.”
“무슨 느낌인지 잘 모르겠어요.”
“나도 잘 설명 못 하겠어. 뭔가 내가 던진 단검이 팔뚝에 꽂혔는데, 그런 적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돼버렸다고 해야 할까나? 어쨌든 싸움이 시작되고 얼마 안 지나서 순식간에 나은이랑 성수가 당해버려서 나머지는 일단 도망치기 시작했어. 그런데 11층에서 계단을 오르니까 다시 6층이 나오더라고.”
11층 이후 6층. 완전히 빈 곳이었던 층과 일치한다. 이게 ‘이면’이라 불리는 공간을 알아낼 키가 되어줄 것 같다.
“그때 또 부대장을 만나는 바람에 결국 다시 싸울 수밖에 없었지. 그리고.”
김화영은 거기에서 모두가 당해 버렸다고 이야기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뜬금없이 지하철 안이었어. 그 칸엔 나, 아람이, 나은이밖에 없었어. 그리고 문 쪽에선 어린 남자애랑 부대장이 대화하고 있었고. 투기장 상황 좀 둘러본다고 말했었나?”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데 김아람과 이나은도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아람이가 비장의 수를 쓸 테니, 두 사람을 쓰러뜨린 뒤 다른 사람들을 찾아서 내 스킬로 도망치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나은이가 비장의 수를 쓸 시간을 억지로라도 벌어주려고 다시 부대장하고 싸웠지. 남자애가 아람이가 쓴 스킬을 나은이한테 반사해버려서 시간을 벌어준 의미가 없긴 했지만.”
이상한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능력에 스킬까지 반사한다? 이렇게 사기적인 조합을 데리고 다닐 줄이야.
“아람이 스킬 맞고 나은이는 곧바로 잠들어버렸어. 그래서 이건 어쩔 수 없다 싶어서 되는 대로 아람이만 붙잡고 여기로 도망친 거야.”
“그러면….”
“오빠, 나머지 이야기는 이따 아람이까지 깨어나면 하자.”
묻고 싶은 건 많았으나, 이화의 만류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여기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 하잖아.”
이화의 말대로 아침에 합류하게 될 강이란 세력의 헌터들과 마주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이동하긴 해야 한다.
“알겠어.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미안해. 다른 사람들을 데려오지 못해서….”
김화영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두 분이라도 도망치신 게 어디에요. 이따 김아람 헌터 깨어나면 적에 대한 정보를 더 들을 수 있으니까, 저희끼리라도 부대장을 쓰러뜨릴 묘수를 떠올릴 수 있을 거예요.”
김화영에게 사과할 필요 없다고 언질 준 뒤, 김아람을 업어 들었다.
“그러니 일단 용산역으로 출발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