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악몽(1)]
마포를 떠나 투기장을 향해 나아간 시점으로부터 네 시간 뒤. 주변이 완전히 캄캄해진 터라 우리는 빈 교회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해가 뜨는 대로 다시 출발하기로 정했기에 쉴 시간은 충분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방비를 소홀히 할 수도 없어 결국 두 사람씩 돌아가면서 보초를 서게 되었다.
첫 번째 불침번을 맡게 된 건 나와 김화영.
원래대로라면 김화영과 함께 불침번을 설 사람은 송태섭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반드시 김화영에게 부탁해야 할 게 있어 송태섭과 순서를 바꾸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떤 식으로 부탁하면 좋을지 할 말을 고르고 있는데, 정문 앞에 주저앉아 길거리를 바라보던 김화영이 물었다.
“용산역까지는 얼마나 남은 거야?”
“도화동을 벗어나서 청암동까지 왔으니까 하루나 이틀 정도 더 걸리겠네요.”
널브러져 있던 우편물에 적힌 주소로 남은 시간을 어림잡아 답하니 김화영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난 오늘 도착할 줄 알았어.”
“에이- 하루 만에 용산까지 가는 건 무리죠.”
“이상하네. 부대장한테 잡혀갔을 땐 몇 시간 안 걸려서 도착했는데, 왜 우리끼리 갈 땐 시간이 더 오래 걸릴까? 어디 지름길이라도 있나?”
그러고 보니 이상하긴 하다.
김화영이 정신을 차린 곳은 지하철 안이었으니 용산역까지 끌려간 건 분명하다. 문제는 거기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
김화영이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 시점은 강이란 헌터 세력이 등장하고 반나절이 채 지나가기도 전이었다. 즉, 부대장은 붙잡은 일행을 끌고 몇 시간 만에 용산역에 도착했다는 건데. 지금 우리의 이동속도와 비교했을 때 지나치게 빠르다.
그런 속도로 이동하기 위해선 적어도 괴수가 앞길을 막아서지 않았다는 게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벌써 괴수를 네 마리나 상대했던 걸 생각하면 그럴 리는 없을 것 같고. 뭔가 다른 수를 써 이동시간을 단축했다는 게 지금은 가장 그럴듯해 보인다.
“어쩌면 스킬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김화영 헌터가 순간이동 비스무리한 스킬을 쓰는 것처럼 다른 헌터도 그런 종류의 스킬을 쓸 수도 있죠.”
“그런가? 이런 유의 스킬은 나밖에 못 쓴다고 했었는데…. 하긴 그 세 사람 워낙에 신기한 스킬 많이 썼으니까 그런 스킬이 하나쯤은 더 있어도 이상하진 않겠다.”
“잘은 모르겠지만 엄청 성가실 것 같은 스킬이네요.”
어째 들으면 들을수록 부대장과 박 씨 남매는 엄청난 사기캐란 생각밖에 안 든다. 하기야 그런 사기캐들을 거느리고 있으니까 강이란이 서울을 먹을 수 있던 거겠지.
“근데 왜 나랑 불침번 서려고 했어?”
대화가 다른 쪽으로 새버려서 본래의 목적을 잊고 있었는데, 김화영이 화두를 던져 준 덕분에 떠올랐다.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서요.”
“나한테 부탁? 또 이상한 거 꾸미고 있구나! 내 말 맞지? 이번엔 또 뭐야? 우리 둘이 지금부터 용산역으로 가는 거야?”
쏜살같이 말을 쏟아낸 김화영은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죄송하지만,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뭔데?”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본론을 꺼내기 전 궁중 식도를 꺼내 들었다.
“그건 왜?”
“이거 쓰는 법 좀 알려주세요.”
“응? 요리 재료 손질은 네가 나보다 훨씬 잘하잖아. 난 그런 거 아예 못 해.”
“정정할게요. 이걸로 싸우는 법을 알고 싶어요.”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듯 김화영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검 쓰는 법을 배워두면 제 몸 하나 정돈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리고 갑자기 떠오른 부탁도 아니에요. 어제 정비할 때부터 부탁하려 했었어요. 강이란 세력의 헌터들이 난입해서 다 망쳐버렸지만.”
“흠. 그랬구나. 배워둔다고 딱히 의미가 있을까? 적하고 스탯 차이가 크면 검 쓸 줄 아는 건 아무런 의미 없을 것 같은데?”
“강이란 세력과의 본격적인 싸움에 들어가기 전에 쓸 만한 카드를 하나 더 만들어 둔다고 나쁠 건 없잖아요.”
“자! 그럼 스탠드 업!”
김화영은 손뼉을 짝짝 치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넌 나처럼 단검을 많이 갖고 있진 않으니까 던져서 맞추는 건 의미 없을 것 같고. 휘두르는 법을 알려주면 되려나?”
“도와주시는 거예요?”
“응. 맨날 배우기만 해서 한 번쯤은 선생님 역할도 해보고 싶었어. 재미있을 것 같잖아?”
단순명료한 이유이긴 하나, 나름 진지하게 임해주는 것 같아 다행이다.
“수업 시작해볼까? 학생, 저를 찔러보세요.”
“네?”
“이론적인 건 설명할 자신이 없고 애초에 나도 잘 모르니까, 그냥 바로 실습이야.”
일행 중에 단검을 쓰는 사람은 김화영뿐이라 따로 선택지가 없긴 했다만, 괜한 부탁을 한 건 아닌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설 수도 없으므로 난 김화영에게 다가가 식도를 뻗었-
“어라?”
“진지하게 해.”
앞으로 뻗었다고 생각한 팔은 미처 다 펴지기도 전에 김화영의 손에 붙잡혀 있었다. 그 상태로 김화영은 팔을 틀었다.
“컥!”
짧은 신음과 함께 손에서 식도가 떨어지자 김화영은 팔을 놓아주었다.
“그렇게 설렁설렁 공격하면 누가 맞아주겠어? 다시 처음부터 시작!”
식도를 주우려고 허리를 숙이니 김화영의 발등이 보였다.
“빈틈은 보이지 말 것.”
코끝에 닿을락 말락 하는 위치까지 뻗어진 발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건 나도 잘 못 지키고 있는 거지만, 빈틈을 보이지 않는 건 무척 중요하다고 했어.”
얼굴을 차일 뻔한 걸 염두에 두며 이번엔 조심스럽게 식도를 주워들었다. 몸을 숙이면서도 눈으로 김화영의 움직임을 계속 읽으려 한 덕택인지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을 뿐 아까와 같은 방해 동작은 하지 않았다.
“이제 제대로 시작해볼까?”
“잘 부탁드립니다.”
다시 공격해보라는 신호에 맞추어 최대한 빠르게 식도를 휘둘렀다.
“이러면 몸통이 비는데?”
어깨를 살짝 비틀어 궤적에서 벗어난 김화영은 내 복부를 발로 후려 찼다.
“흡.”
“오른손으로 검을 휘두를 거면, 왼손은 쉬게 두지 마. 이전에 ‘빙혈어’랑 싸울 때 했던 것처럼 몸을 지키는 용도로 써야지. 오케이?”
“네.”
“하나 알려줬으니까, 다시 시작!”
김화영의 충고를 받아들여 ‘특급 냉장고’에서 방패 대용으로 쓸 프라이팬 하나를 꺼내 왼손에 장비했다. 프라이팬으로 최대한 몸통을 가리고 오른손의 식도를 휘두를 타이밍을 살폈다.
“왠지 그러고 있으니까 요리 영화 포스터 찍으러 가는 사람 같아.”
김화영이 웃는 지금. 그녀의 빈틈을 노려 사선으로 궤적을 그었다.
“오! 이건 좋았다. 방심하게 만들고 공격한다. 굿! 스탯만 똑같았으면 닿았을지도?”
김화영의 칭찬을 받긴 했지만, 식도는 그녀의 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반면에 김화영은 어느새 내 뒤에서 목에 손날을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후속 동작이 없는 건 아쉽네. 네 공격이 안 통했을 때를 대비해서 상대방의 움직임에 바로 대응할 준비도 해야지. 여기서 내가 목 쓱 그으면 게임 오버잖아.”
“역시 스탯 차이가 크긴 하네요. 움직임이 보이지도 않았어요.”
“스탯이 전부인 세상이니까. 그럼 어떻게 할래? 여기서 그만둘까?”
“아니요. 조금 더 상대 부탁드릴게요.”
“그럼 칼 휘두를 때 자세부터 고쳐보자. 뭔가 너무 엉성해.”
“그래서 김화영 헌터한테 한 번이라도 공격 성공했어?”
“아니.”
결국 불침번이 끝날 때까지 김화영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그럼 오빠만 멍투성이 된 채로 끝난 거야?”
“보이는 대로 엄청나게 얻어맞고 끝났지.”
식도를 휘두를 때마다 김화영이 자세를 교정해준다며 여기저기를 때려, 멍투성이가 된 채 훈련이 끝나고 말았다.
“어쩐지 교대하자마자 쥐 죽은 듯 자더라.”
“그래도 무기 다루는 모양새 정도는 따라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마냥 헛된 훈련은 아니었단 거네.”
“두 분 이야기 끝나셨어요? 그러면 저 좀 내려주실래요?”
이화와 밤중의 훈련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등 뒤에서 김아람이 끼어들었다.
“저 진짜 혼자 걸을 수 있어요.”
“안 돼.”
김아람은 김화영보다 더 큰 중상을 입은 터라 최소한 용산역에 갈 때까지만이라도 내가 업고 이동하기로 했다. 홀로 걷게 하기엔 다리의 부상이 너무 심했다.
“용산역에 도착하면 바로 내려줄게.”
“정현 헌터님 힘드시지 않아요? 벌써 저 업고 이동하신지 하루가 다 되어가는데.”
“우리 오빠 요새 훈련하고 있거든? 지금도 체력 훈련하는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렇게 말하며 이화는 눈을 찡긋했다. 이화의 지원 사격에 김아람은 알겠다며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난 진짜 괜찮아. 그리고 저기 전자상가 보이니까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
“그러네?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
“해 뜨자마자 출발해서 밥 먹을 때 빼곤 쉬지 않고 걸었으니까.”
그때 제일 선두에 있던 송태섭이 멈춰 섰다.
“무슨 일 있어요?”
송태섭은 우리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하며 전자상가 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몸을 웅크린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두 명 있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그들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김아람이 말했다.
“투기장 근처니까, 강이란 헌터의 부하들이겠죠?”
“그럴 가능성이 크지. 전자상가 안에는 왜 들어간 걸까? 저기도 주둔지 중 하나일까?”
이화의 물음을 확인할 방법은 하나뿐.
“뒤따라가자.”
“저기가 주둔지라면 다른 헌터들도 있을 텐데? 너무 위험하지 않아?”
“강이란 세력의 헌터들이었다면 저렇게 모습을 감추지 않고 당당하게 돌아다녔을 거야.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 로브를 뒤집어썼겠지.”
내 말이 일리 있다고 여겼는지 이화는 반박은 그만두고 우산을 장비했다.
“저 둘한테서 정보 좀 들을 수 있으면 좋겠네.”
“만나봐야 알겠지.”
그 말을 신호로 우리는 상가 쪽으로 걸어갔다.
전자상가에 점차 가까워질수록 낯선 소리가 귓가를 울리기 시작했다.
‘깡-’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검은 로브를 쓴 사람들이 들어간 건물.
우리는 각자의 무기를 단단히 쥔 채 소리를 따라 건물 안을 이동했다. 3층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대장간?”
검, 창, 활 등 여러 무기가 진열된 점포에서 한 중년의 여성이 망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칼을 벼리는 중이었다.
그녀 쪽으로 다가가자 망치 소리가 멈추었다.
“손님?”
호탕한 그녀의 물음에 얼떨결에 손님은 아니라고 답했다.
“손님은 아니라고? 그럼 방해 말고 갈 길 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떻게 할지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 김화영이 먼저 말을 걸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뭐? 설마 또 자릿세 내라고 온 거야? 내가 말했잖아! 강이란 그딴 놈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왜 자릿세를 내야 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