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75화 (76/168)

[14. 악몽(2)]

“저희는 그런 것 때문에 온 게 아니고요.”

하다못해 이화가 나섰으나 성격 급한 주인장은 동생의 말마저 끊어 먹었다.

“그게 아니면 뭐? 또 무기 내뱉으라고? 그것도 분명 말했을 텐데. 네놈들한텐 공짜로 무기 내어줄 생각 없다고! 네놈들이 서울을 난장판으로 만들어서 손님이 완전히 끊긴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시련 끝나고 가게 정리하느라 바쁘니까, 그만 방해하고 당장 꺼져!”

급기야 우리에게 망치를 겨누기까지. 저 잔뜩 구긴 인상으로 주인장은 이미 우리를 강이란 세력으로 규정했음을 알렸다.

“성격 화끈하시네.”

“어차피 우리 말 들어주지도 않을 것 같은데 그냥 갈까?”

이대로 대치하는 건 투기장에 가기도 전에 힘만 빼는 일. 아무 의미 없이 대치할 바엔 이화의 말대로 발길을 돌리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러자. 괜히 여기까지 와서 시간만 낭비했네.”

푸념하며 뒤로 돌아서려는데 김아람이 내 옷깃을 붙들었다.

“잠시만요.”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김아람은 자신의 두 다리를 주인장 쪽으로 쭉 뻗고 있었다.

“이것 좀 봐주세요.”

“다리 짧은 거 자랑이라도 하는 거야?”

“아직 아홉 살밖에 안 돼서 키는 더 클 거거든요! 그리고 제가 보라는 건 다리 길이가 아니라 발목이에요.”

“발목?”

김아람의 행동이 무얼 의미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주인장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잘 보세요. 전자발찌 같은 건 안 차고 있죠? 혹시 모르니 팔도 보여 드릴게요.”

김아람은 자신의 소매까지 걷어붙이며 전자발찌를 차고 있지 않음을 주인장에게 확인시켜주었다.

“뭐야, 네놈들 강이란의 부하 아니었어? 다른 사람들도 팔뚝하고 발목 좀 보여줘 봐.”

참 빨리도 묻는다고 따지고 싶었으나 괜한 시비만 붙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러는 대신 주인장의 말에 순순히 따라 주었다.

그렇게 나머지 사람들 역시 전자발찌를 차고 있지 않음이 확인되자 주인장은 그제야 망치를 내려놓았다.

“미안하게 됐네. 요새 하도 그놈들이 우릴 귀찮게 해서 말이야. 그나저나 손님도 아니고, 우릴 괴롭히려고 온 것도 아니면. 여기엔 무슨 일로 온 거야?”

우리를 보자마자 강이란 세력이냐며 쫓아내려 한 사람이다. 딱히 우리를 속이기 위해 연기하는 것 같지도 않고, 순전히 강이란 세력에게 나쁜 감정을 가진 것 같으니 그들과 적이라는 정도는 말해줘도 되겠지.

결론을 내리고 답하려 하는데 김화영이 선수를 빼앗았다.

“동료들이 투기장에 잡혀가서 구하러 가던 길에 이상한 검은 망토 뒤집어쓴 사람들을 봤거든. 그래서 그 사람들 따라가다 보니까 여기 오게 됐어.”

김화영의 말에 주인장은 건물이 떠나가라 웃었다.

“난 재미난 말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이딴 세상에 이렇게나 솔직한 사람이 남아 있었다니.”

의논도 하지 않고 먼저 입을 열어서 뭐라 말하려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주인장은 김화영의 솔직함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리고 이 나이 먹고 반말 듣는 것도 오랜만이네.”

“주인아줌마는 존댓말 써서 굳이 속일 필요 없으니까…. 나 혹시 실수한 거야?”

“기분 나쁘셨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이화의 재빠른 사과에 주인장은 어리둥절한 김화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됐어, 우리 딸내미 다시 보는 거 같고 기분 좋으니까.”

“딸내미? 아까 우리가 쫓아온 사람 말하는 거야?”

“그놈들은 내가 거둔 아르바이트생이고. 딸내미는 잠깐 밖에 나가 있어.”

주인장은 손가락으로 바깥쪽을 가리키고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옆 점포의 셔터를 두드렸다.

“겁쟁이들! 당장 나와서 일이나 마저 해!”

주인장의 호통에 셔터가 올라가더니 두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두 사람은 로브를 벗고 점포 곳곳의 장비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놈들은 어찌 된 게 나보다 겁이 많으니 원. 이런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겠어?”

가까이에서 장비에 쌓인 먼지를 털던 키 큰 여성의 등을 후려치며 주인장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동료들이 붙잡혀 갔다면, 그놈들하곤 적대 관계인 거지?”

“네. 투기장에 가서 일행들을 구한 다음에 할 수만 있다면 놈들까지 쓰러뜨릴 생각이에요.”

“그러면 회사랑은? 이상한 실험하는 놈들하고도 맞설 생각이야?”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주인장은 이번엔 내 등을 후려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고작 다섯 명이? 목숨을 너무 쉽게 버리려는 거 아니야? 이런 사람들은 또 오랜만이네.”

주인장은 잠깐 생각하더니 선심 쓰듯 말했다.

“투기장 갔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놈들한테 내 목숨을 걸 순 없고, 조그만 선물 정도는 해줄게. 평소에 주로 쓰는 무기가 뭐야?”

“제가 쓰는 건 이거예요.”

궁중 식도를 꺼내니 주인장의 눈빛이 바뀌었다.

“잠깐 봐도 될까?”

“네.”

궁중 식도를 작업대에 내려놓고 이리저리 살피던 주인장은 뜬금없이 망치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사정없이 식도를 내려쳤다.

‘깡-’

“갑자기 뭐 하시는 거예요?”

내 목소리는 칼날에 망치가 부딪치며 나는 명쾌한 소리에 묻혀 버렸다.

한참 휘둘러지던 망치가 마침내 멈추었을 때, 식도의 칼날은 푸르스름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강화 성공!]

[‘대장금의 궁중 식도’의 내구도가 복구됩니다.]

[‘대장금의 궁중 식도’]

- 사용 가능 직업 : 요리사

- 장비 등급 : 전설

- 강화도 : +1

- 내구도 600 공격력 100 방어력 0

- 모든 식자재를 벨 수 있다.

“조금은 쓸 만해졌지?”

내구도와 공격력 100 증가. 이 중 장비의 공격력은 1/10 수치로 힘 스탯에 더해지니, 주인장은 대가 없이 힘 스탯을 10 증가시켜준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내 경우엔 스탯이 0에 고정되어 있으니 아무런 의미가 없긴 했지만, 무상으로 장비를 강화해준 주인장에겐 감사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조그만 선물이라고 할 수 없겠는데요?”

“대장장이가 망치질 몇 번 한 거 갖고 생색 부릴 순 없지. 그리고 까먹고 말 안 했는데 성공 확률이 60%밖에 안 되니까 까딱 잘못했으면 장비 파괴될 수도 있었어.”

“네? 성공 확률이 60%라고요?”

“그래도 넌 좀 운이 좋네. 그럼 다음 사람.”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주인장은 김화영의 단검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60%라는 건 신혜진 헌터가 괜히 부끄러워서 한 말이고, 첫 강화는 99% 확률로 성공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멍하니 궁중 식도를 들고 있자 키 큰 여성이 투구를 진열하며 조용히 말했다.

“그런 간단한 정보도 모르는 걸 보니, 대장장이를 만나본 적 없으신가 보네요?”

“이전에 지내던 주둔지에 있던 대장장이는 강화 같은 걸 안 해줬거든요.”

이화의 불평을 떠올리며 답하자 여성은 그런 사람도 다 있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때, 장비 강화 대기 줄의 제일 끝에 서 있던 송태섭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까는 뭐 하고 있던 거였어요?”

“용산역에 가서 장비 납품하고 왔어요.”

“용산역이라면 강이란 세력의 헌터들한테요?”

나와 송태섭이 이상하게 여기는 걸 눈치챘는지 여성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저희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그 사람들이 괴수한테서 제작 재료를 구해오면 장비를 수리해주고 있거든요. 아무리 신혜진 헌터가 엄청나게 강하시다 하더라도 수적 차이는 어쩔 수 없으니까 그렇게 협의 봤다고 들었어요. 무엇보다….”

여성은 뭔가 말하려다가 화제를 돌렸다.

“아까는 도망쳐서 죄송해요. 저랑 남동생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서요.”

“아니에요. 그쪽 입장에선 저희가 수상한 사람이었을 텐데 도망치는 게 맞죠.”

“그리고 들어보니까 붙잡힌 동료들을 구하려는 것 같은데, 강제로 선수가 된 사람들은 지하철 안에 갇혀 있을 거예요.”

“지하철 안이요? 그건 어떻게?”

“저희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거기에 붙잡혀 있었거든요. 신혜진 헌터가 무기를 만들어주는 대신 저희를 빼내어 준 덕분에 여기서 일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여성은 여전히 붙잡혀 있는 사람들이 많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는 그중에서 가장 약해서 풀어준 거예요. 풀어줘도 자신들한테 아무런 위협이 안 될 걸 아니까.”

“지하철 안엔 몇 명이나 갇혀 있어요?”

“한 열댓 명 될 거예요.”

강제로 선수가 된 사람이 열댓 명. 잘하면 우리를 도와 강이란 세력과 싸워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일이나 마저 해!”

“네!”

주인장의 호통에 여성은 다시 쌓여있는 장비들 쪽으로 이동했다.

“이제 네 대검만 강화하면 끝나니까 얼른 와.”

마지막으로 송태섭의 대검까지 강화를 끝낸 주인장은 이마에 고인 땀방울을 훔치며 망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나은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가져온 물 한 잔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그나저나 신기는 어디 있어? 한 번도 본 적 없어서 구경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장비도 하나씩 강화해줬는데 그 정도는 보여줄 수 있지 않아?”

모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주인장은 왜 그러냐며 넉살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건 함부로 손 안 댈게. 정말 구경만 하려고 그래.”

“신기란 게 진짜 있는 거였어요?”

“뭐야? 본인들이 갖고 있으면서 신기가 뭔지도 모르는 거야?”

주인장은 한 명, 한 명을 살피더니 나를 자신 쪽으로 잡아끌었다.

“너한테 있는 것 같은데?”

“저요?”

“딴 건 몰라도 대장장이의 감만은 확실해. 의심되는 장비 없어?”

나한테 있는 장비는 식도랑 프라이팬, 한솥 그리고….

“혹시 이거예요?”

반지를 꺼내 들자마자 주인장은 그를 낚아챘다.

“역시 갖고 있었잖아! 이 반지를 장비하면 어떻게 돼?”

말로 들려주는 것보다 보여주는 게 나을 것 같아 직접 반지를 껴 모습을 감추었다.

[‘??? ???? ??’ 장비로 인해 플레이어 ‘정현’이 ‘은신’ 상태가 됩니다.]

“이게 끝?”

“네. 반지를 끼면 모습을 감춰줘요. 소리나 기척까지 감출 수 있는 건 아니어서 몇몇 헌터들한텐 소용없는 것 같긴 하지만요.”

“그럴 리가 없는데. 혹시 장비 이름이 뭐야?”

“이름이 물음표로만 되어 있어요.”

“그러니 모습만 감춰주는 거지.”

혀를 끌끌 차더니 주인장은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신기를 쓸 자격도 갖추고 있지 않으면서 이건 어디서 얻은 거야?”

“어쩌다 보니까 얻긴 했는데…. 신기를 쓸 자격이란 게 따로 있는 거예요?”

“당연하지. 대장장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을걸? 이걸 제대로 쓰려면 장비의 이름을 알아야 해. 장비를 하사한 초월자님의 허가도 받아야 하고.”

이화도 처음 들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김요한 세력의 주둔지에 있던 대장장이가 어지간히도 일하지 않은 것 같다.

“초월자님의 허락은 그렇다 치고. 장비의 이름은 어떻게 알 수 있어요?”

“잘 때려 맞춰야지. 물론 내 지인이 도와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주인장은 인심 썼다며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그 사람을 소개해줄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