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악몽(3)]
“주인아줌마가 도와줄 순 없는 거야?”
“직접 도와주고 싶어도 나한텐 그 사람이 가진 고유 능력이 없거든.”
저 말은 달리 말해 장비의 이름을 밝히는 건 고유 능력 차원의 문제라는 의미. 즉, 지금으로선 주인장에게 지인을 소개받는 것 외에 따로 장비의 이름을 밝힐 방법은 없는 거나 다름없다.
“어떻게 할래?”
이미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 반지가 제대로 된 기능까지 발휘한다? 강이란과의 싸움을 앞둔 입장에서 이건 못 참는다.
“일단 부탁이 뭔지나 들어보죠.”
“별건 아니야. 그냥 대장간 영업을 방해하는 놈들이 더는 그러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면 돼. 어차피 회사랑 맞서려면 투기장에 있는 놈들 정도는 쓰러뜨릴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좋아요. 부탁 들어드릴 테니 투기장에 관해서 알고 있는 건 전부 들려주세요. 그 정도는 해주실 수 있죠?”
“시원시원해서 좋네. 당연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차나 한잔하면서 이야기마저 할까?”
주인장은 점포 한가운데 놓인 탁자에 우리를 앉히며 남자 아르바이트생에게 차를 준비하라고 시켰다. 곧 녹차 내음이 점포 내에 퍼지고 주인장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궁금한 게 뭐지?”
“무기 납품할 때 어떤 식으로 투기장 안에 들어가죠?”
“그야 그놈들이 맡긴 무기 잔뜩 들고 당당하게 용산역 입구로 들어가지. 그러면 놈들이 알아서 무기고로 쓰고 있는 서점까지 길 안내해줘.”
“무기고가 따로 있는 거예요?”
“투기장은 강이란 세력의 헌터를 뽑기 위한 장소야. 그러니까 거기 있는 선수 놈들은 아직 강이란 세력이 되기 전 훈련을 받는 놈들이란 거지. 그놈들이 함부로 무기를 못 쓰게 하려고 무기고를 따로 만들어놨다더라.”
“꽤 자세히 알고 계시네요.”
“박수용인가 뭔가 하는 헌터 놈 덕분이야. 그놈이 있으면 너네랑 만나게 해줬을 텐데. 여기 올 때마다 궁금하지도 않은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해주거든.”
그 자식 안 그래도 말이 많다 싶더니 여기 와서도 정보를 나불댄 건가. 고유 능력으로 TMI 같은 거라도 있는 게 분명하다.
“투기장 공략에 성공하면 박수용 헌터의 공도 어느 정도 인정해줘야 할 것 같네요.”
“그럼 그럼. 그런 정보통 어디서 또 못 구한다고. 근데 이건 왜 물은 거야?”
“대장간에 온 덕분에 세우게 된 작전이 있거든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작전을 이야기하려는데 밖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
“또 놈들인가? 귀찮아 죽겠네. 지아야, 네 동생이랑 이 친구들 데리고 창고에 숨어 있어. 진상 상대는 내가 맡을 테니까.”
“알겠어요. 여러분, 이야기는 이따가 마저 하고 지금은 저 따라오세요.”
“주인아줌마, 혼자 괜찮겠어?”
“진상 상대는 멸망 이전부터 여러 번 해왔으니깐 걱정하지들 말고 지아나 얼른 따라가.”
지아라고 불린 키 큰 여성은 옆 점포 안으로 우리를 들여보내더니 셔터를 내렸다.
“저 문으로 들어가세요.”
그러곤 안쪽에 있는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는 어두운 방. 그 안에서 쪼그려 앉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자니 얼마 안 가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아지매! 오랜만!”
“다신 오지 말라니까 여긴 또 무슨 일이야.”
“워워, 무섭게 망치 들지 마. 아지매 죽였다간 부대장님한테 혼난단 말이야.”
“네깟 놈한테 쉽게 죽어주진 않을 테니 쓸데없는 소리 말고 무슨 용건인지나 말해. 또 지아 보고 싶다고 할 거면 그냥 꺼지고.”
주인장의 말에 여성 쪽을 바라보니 그녀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랑 동생 괴롭힌다는 사람이 지금 밖에 있는 방우준 헌터예요.”
이야기하면서도 몸서리치는 걸 보니 지독히도 괴롭혀온 것 같다.
“이번엔 그런 거 아니니까 잘 들어봐. 몇 시간 전에 우리 애새끼 한 놈이 선수 한 명을 여기로 줬다는데, 맞아?”
“여자애 한 명 보내주긴 했지.”
“그거 돌려받으러 왔어. 애새끼가 실수로 우리의 소중한 선수를 줘도 되는 선수라고 착각했더라고. 귀찮아 죽겠다니깐! 아랫놈 뒤처리를 왜 내가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흐음, 내가 실수했다는 걸 듣자마자 그놈 죽여버려서 그런 건가?”
“이미 우리 아르바이트생이야. 네놈들 때문에 할 일도 태산인데 돌려줄 순 없어.”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러면, 어디 보자. 그래! 다른 선수랑 교환해줄게. 어때?”
“난 이미 말했어. 그 여자애는 이미 내가 거둔 아르바이트생이라고.”
선수? 여기엔 두 사람 말고 다른 아르바이트생은 안 보였는데?
“두 분 말고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또 있어요?”
“오늘 데려와서 정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없긴 한데….”
여성은 고민하더니 방 뒤편에 아무렇게나 덮여 있는 모포를 들쳤다. 모포를 들치자 그 밑에 감춰져 있던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나은 헌터?”
모포 밑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고이 잠들어 있는 이나은이었다.
“이나은 헌터가 왜 여기에?”
“시련 때문에 장비 제작 재료 못 구했다고 이번엔 선수 한 명을 풀어줬거든요. 잠든 채로 깨어나질 않아서 선수로는 도무지 쓸 수가 없다고 그쪽에서 풀어준 사람인데, 일행분이었나요?”
“네. 저희 일행이에요.”
김아람의 스킬이 반사된 게 이런 식으로 우리를 도와줄 줄이야.
“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 했는데, 제발 부탁할게. 그 선수 없어진 걸 부대장님이 알게 되면 난 끝장이라고.”
“그거 잘됐네. 꼴 보기 싫은 놈 하나 사라지는 거니.”
“진짜 너무하네. 그나저나 아지매, 어울리지 않게 웬일로 차 마셨대? 그러고 보니까 부대장님이 붙잡아뒀던 사람 중 두 놈이 도망쳤다고 하시던데…. 혹시 도망쳤다는 두 놈이 여기 왔나? 그래서 차 마신 거 아니야? 아지매, 여자랑 꼬맹이. 본 적 있어?”
“차는 아르바이트생들하고 마신 거야. 네 몫은 따로 없으니 관심 두지 마.”
“저렇게 쓴 거엔 관심 없거든? 어쨌든 선수도 안 돌려줄 거고, 정보도 안 주겠다 이거지? 얘들아, 이 아지매 좀 혼내주자. 보이는 대로 다 때려 부숴. 그러다 보면 이번에 데려간 선수도 찾을 수 있고 간만에 우리 지아도 볼 수 있겠지.”
대화는 거기서 끊기고 물건들이 이리저리 나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제, 제가 나가볼게요. 저를 본다면 방우준 헌터도 얌전해질 거예요.”
소란이 벌어지자마자 여성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으세요. 그쪽이 나선다고 저 사람들이 돌아가진 않을 거예요.”
“지금까지는….”
“이번엔 저희 일행을 찾으러 온 거예요. 쉽게 물러설 리 없어요. 김아람 헌터, 이나은 헌터 깨울 수 있어?”
내 말에 김아람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어렵긴 한데 방법은 있어요. 시간이 좀 걸리고 사람 한 명이 더 필요하긴 하지만요.”
“그럼 아람이가 나은이 깨울 동안 난 저놈들과 싸우고 있을게. 우리 때문에 벌어진 소동인데 책임은 우리가 져야지.”
“맞아! 주인아줌마 도와줘야 해.”
“그러면 저랑 김아람 헌터가 여기에 남아서 이나은 헌터를 깨워볼게요. 나머지 분들은 신혜진 헌터 도와주실래요?”
이화와 김화영은 이미 그렇게 하기로 뜻을 밝힌 뒤라 마지막 남은 송태섭을 바라보니 그는 대검을 장비하고 있었다.
“차 마신 값은 해야지.”
모두가 동의하자마자 김화영은 이화와 송태섭의 손을 붙잡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 세 사람이라면 크게 걱정되지 않긴 하지만, 우리도 서두르자.”
이화와 방우준. S급 헌터끼리 맞붙는다면 단순한 소란 정도로 끝나진 않을 것이다. 결국엔 용산역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대판 싸움을 벌일 텐데. 우리가 일행을 되찾으러 왔음을 용산역에서 눈치채는 순간 기껏 생각해낸 작전은 쓸 수 없게 된다. 그러니 그 정도로 큰 싸움이 벌어지기 전, 이나은을 깨워 이화를 도와 방우준을 제압하도록 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무사히 투기장 안에 들어갈 수 있어.”
“동감이에요.”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김아람은 서둘러 이나은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면 이나은 헌터님 깨울 방법을 설명해드릴게요.”
시키는 대로 이나은 옆에 눕자 김아람이 설명을 이어갔다.
“제 스킬 ‘악몽’은 말 그대로 상대에게 악몽을 꾸게 해요. 꿈속에선 최악의 기억을 되풀이해서 경험하게 되는데, 스킬을 해제하기 위해선 꿈속에서 죽어야만 해요.”
스스로 스킬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있으나, 보통은 꿈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여 죽음을 택하지 못해 악몽 속에 갇히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비장의 수인 거구나.”
“네. 꿈속에 한 사람을 가두어두는 거니까요. 다만, 한 달에 한 번밖에 쓸 수 없어서 아껴두었다가 강이란 헌터에게 쓰려고 했는데…. 이렇게 됐네요.”
“어찌 되었든 스킬에 대한 설명은 끝났고. 우리는 어떻게 이나은 헌터를 깨울 거야?”
“‘드림 워킹’이란 스킬을 쓰려고요.”
“그건 또 뭐야?”
“그 스킬을 써서 정현 헌터님을 이나은 헌터님의 꿈속에 들여보낼 거예요.”
“아- 거기서 이나은 헌터를 죽인 다음에 나도 죽어서 빠져나오면 된다는 거지?”
내 이해가 잘못되었는지 김아람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주의하셔야 할 게 있어요. 꿈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이나은 헌터님이 깨 버리면 정현 헌터님은 그 꿈속에 갇히게 돼요.”
저 말은 이나은에게 꿈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알린 다음에 먼저 죽어서 꿈에서 빠져나와야 한단 뜻.
“무슨 뜻인지 이해했어. 내가 이나은 헌터를 설득할 수 있냐가 관건이겠네.”
“그렇죠. 꿈속임을 인지시켜야 하니까요. 그래도 정현 헌터님이니까 이 부분은 잘 해결될 거예요.”
“나도 이나은 헌터한테는 자주 휘둘려져서….”
다른 일행들과 달리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소유한 이나은이다. 그런 사람에게 지금 꿈이니까 스스로 죽어야 한다고 설득해야 한다니 벌써 걱정이 앞선다.
“제멋대로이긴 해도 정현 헌터님 말은 들어줄 거예요. 그러면 이나은 헌터님 손잡으시고 눈 감으세요.”
“바로 하려고?”
“네. ‘드림 워킹’도 이나은 헌터님이 정현 헌터님한테 마음을 열어뒀을 때만 쓸 수 있어서 스킬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그러면 바로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하니 시간이 없어요.”
“알겠어.”
손을 잡고 눈을 감자 이마 쪽에서 김아람의 손길이 느껴졌다.
“됐다. 잘 기억해두세요. 꿈속에서의 한 시간은 현실에서의 1분과 같아요.”
그 말을 신호로 갑자기 등 뒤가 푹 꺼지더니 난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참 동안 이어지던 추락이 마침내 멈추었다.
“이제 눈 떠도 돼?”
아무런 대답이 없어 살며시 눈을 뜨자 붉은색 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텅 빈 허공이 보였다.
“스킬이 통한 건가?”
둥둥 뜬 채 눈앞에 문을 둔 상황. 내가 다음에 해야 할 건 뻔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여니 주변 풍경이 확 바뀌었다.
“여긴 또 어디야?”
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책상에 앉아 선생님의 판서를 따라 적는 여학생들.
별안간 바뀐 풍경에 당황하여 뒤돌아보니 붉은색 문은 어느새 평범한 교실 문으로 바뀌어 주변 풍경에 어우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