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악몽(4)]
“이나은 헌터의 꿈속인가 보네.”
김아람의 스킬이 성공했음을 알게 되자마자 이나은이 어디 있는지부터 찾았다.
“저기 있다.”
얼마 안 가 발견한 이나은은 제일 앞줄에 앉아 다른 학생들처럼 열심히 필기하고 있었다. 단발머리라 못 알아볼 뻔했으나 칠판을 응시하는 사나운 눈매와 교복에 달린 명찰은 그녀가 이나은이 확실함을 알려주었다.
악몽이라기엔 너무나 평화로운 풍경이 이상하긴 하지만, 꿈속에서 헤맬 일 없이 바로 이나은을 찾았으니 다행이다.
“뭔가 안 어울리긴 하네.”
의외로 얌전히 앉아 공부하고 있는 이나은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며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교실을 대놓고 가로지르는데 그 누구도 내게 시선을 주지 않는 걸 보니 꿈속의 존재들은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 사실을 깨닫고 다른 여학생들에게 방해받을 걱정 없이 편하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이나은의 앞까지 걸어갔다.
이나은이 필기하고 있는 건, 처음 보는 수학 기호들이었다.
“이과였구나.”
이나은의 공책을 들여다보며 자연스레 말을 건넸다. 하지만 이나은은 칠판과 자신의 노트를 번갈아 보며 필기를 이어나갈 뿐. 내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나은 헌터?”
바로 눈앞에서 손을 휘젓는데도 이나은은 그마저도 무시하며 엄청난 집중력으로 공부를 이어나갔다.
“지금 꿈에 취해있을 때가 아니야.”
바깥의 상황을 이야기해주는 것도 통하지 않아 인터넷 방송으로 갈고닦은 실력으로 관심을 끌 여러 가지 방법을 하나씩 시도해보았으나 결국 모두 무산으로 돌아갔다. 이쯤 되면 이나은도 의도적으로 나를 무시하는 건 아닐 거다. 그냥 다른 꿈속 존재들처럼 나를 아예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다.
“김아람 헌터가 이런 경우까진 설명 안 해줬는데…. 뭔가 잘못된 건가?”
김아람이 스킬을 쓰는 과정 중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 외에 이나은이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딱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서둘러 죽음을 택해 꿈에서 빠져나간 다음에 이나은을 깨울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
“궁중 식도 꺼내줘, 라고 말해봤자 남의 꿈속에선 소용없나 보네.”
‘특급 냉장고’는 써지지 않았기에 급한 대로 교실 안에서 날붙이를 찾기 시작했는데, 창밖에서 빵빵거리는 경적이 들려왔다.
오랜만에 들은 경적이 반가워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운동장부터 교문까지. 휴가철 고속도로를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차량이 한 자리씩 차지한 채 경적을 울려댔다. 몇몇 차량에선 학부모로 보이는 사람들이 내려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그에 맞추어 교실 안에서도 휴대폰 진동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며 도저히 수업을 진행할 수 없는 소음을 이루어냈다.
“다들 진정하자. 학교에서 아직 안내방송이 없었으니까 수업을 계속….”
선생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하나둘 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건 이나은도 마찬가지.
별안간 닥친 이변에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날붙이 찾는 걸 포기하고 이나은을 따라나서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소란인 거지?”
이나은을 따라 나온 복도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몰린 학생들로 바글대고 있었다. 이나은은 그들 무리에 껴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태였다. 그런 그녀의 곁에 다가가서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나은의 손에 들린 휴대폰에는 ‘지금 당장 교문으로 와.’라는 짧고 명료한 아버지의 문자가 와 있었다. 주변의 다른 학생들 역시 그런 비슷한 내용의 문자를 읽고 있었다. 모두가 연락을 받고 가족에게 가려다 보니 이렇게 정체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내가 아는 한 학생 대다수가 수업 도중 가족에게 불려 나갈 만큼 긴박한 사건은 단 하나밖에 없다.
“설마….”
혹시나 하는 생각에 창밖을 다시 내다보았다.
“제기랄. 이걸 또 볼 줄이야.”
이번엔 운동장이 아닌 하늘 쪽을 바라보았는데 역시나 하늘은 살짝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즉, 이나은이 꾸는 꿈의 배경은 내가 자느라 보지 못했던 멸망 직전의 시점. 총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 괴수가 출몰하지 않은 것 같긴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다. 여기 있는 대다수는 곧 괴수에게 죽을 운명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멸망을 앞둔 이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는데 누군가 이나은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은아, 여기! 이쪽이야!”
이나은을 부른 사람은 머리를 한데 모아 묶은 여학생. 그녀의 교복엔 이하영이란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이하영? 이하영이라면 이나은이 입은 교복의 주인이잖아?”
이하영의 부름에 이나은은 쪼르르 달려가 품에 안겼다.
이나은이 다른 사람에게 안기다니. 지금의 이나은을 떠올리면 절대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다.
“하영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 다른 친구들도 잘 모르는 눈치고, 우리 아빠도 아무런 이야기 없이 교문으로 나오라고만 해서….”
“나오라고만 해서 무섭다고 하려고 했지?”
이하영은 울먹거리는 이나은에게 장난치듯 말했다.
“나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진 잘 모르지만, 우리 부모님한텐 아무런 연락도 없는 걸로 봐서 별일 아닐 거야. 우리 엄마 성격 알잖아. 모든 일에 호들갑이신 거. 수업 시간만 아니었으면 이미 나한테 전화해서 지구 멸망하느니 뭐니 하면서 호들갑 떠셨을걸?”
이나은을 토닥이던 이하영은 그렇게 걱정되면 아빠한테 직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겠다고 장담했다.
“여기 있다간 1층 가기도 전에 숨 못 쉬어서 쓰러질 것 같으니까 일단 나 따라와 봐. 관장님한테 데려다줄게.”
이하영이 이나은을 끌고 들어간 복도 반대편 끝에 있는 교실 안으로 따라가니 뜻밖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하영아, 그걸로 뭐 하려고?”
“도와줄 거 아니면 잠자코 보고 있어 봐.”
대담하게도 이하영은 창문에 달린 커튼을 뜯어 길게 묶고 있었다. 길게 묶은 커튼으로 무얼 할지는 쉬이 알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 보고 계시는데…. 이거 기물 파손….”
이나은은 불안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교탁에 엎드려 숨죽인 채 울고 있는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어이구, 이 범생아. 넌 이런 상황에서도 그게 걱정이냐?”
어이없어하던 이하영은 커튼을 창살에 묶어 아래로 떨어뜨렸다.
“자, 가자.”
“가다니? 다시 복도로?”
“나 사람 많은 거 싫어해서 콘서트장도 안 가는 거 잘 알잖아. 애들 우글우글한 데로 가긴 글렀고, 이게 제일 빨라. 어차피 2층이니까 후딱 내려가자.”
“정말 커튼 타고 아래로 내려가려고?”
이하영은 그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이미 창밖으로 반쯤 몸을 내민 상태였다.
“위험할 텐데, 그냥 다른 애들 따라서 일반적인 통로로 가자.”
“태권도만 10년 차라 엔간한 남자애들보다 팔뚝 힘도 더 세면서 뭐가 걱정이야. 내가 먼저 내려가서 받아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럼 선생님만 달래 드리고 가자.”
“뭐라고요?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죠? 선생님을 달래 드린다고요?”
“우리 담임선생님이셔. 울고 계시니까 휴지라도 갖다 드리는 게….”
“이럴 때까지 남 챙길 필욘 없는 것 같은데. 그건 선생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우린 우리 문제에나 집중하자. 아빠 보러 가야지. 빨리 따라와.”
이나은이 해야 할 법한 말을 하곤 이하영은 그대로 커튼을 잡고 아래로 내려갔다. 커튼 앞에 홀로 남은 이나은은 선생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아빠가 보낸 메시지를 보고 결심한 듯 창밖으로 나섰다.
2층이라 그리 높진 않았지만, 아직 스탯이란 게 존재하지 않던 시점임에도 둘은 아무 문제 없이 지상에 착지했다.
“거봐,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나중에 커튼 제대로 달아둬야 해.”
“잔소리는. 근데 하늘 처음 보는 색이네. 노을 져서 그런 건가?”
“그러기엔 너무 새빨갛지 않아?”
“그런가? 예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둘은 하늘에 관해 감상을 늘어놓으며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저기 있다.”
차 사이를 누비며 교문으로 향하던 중, 이하영이 먼저 이나은 아버지를 발견했다. 태권도 도복을 입은 그는 교문 바로 앞에 서 있었는데, 눈매가 이나은과 똑 닮아서 한눈에 그녀의 아버지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아빠, 도장에 있다가 바로 온 거야?”
두 사람의 인사에 그는 뻣뻣한 미소를 지으며 손만 흔들 뿐이었다.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우리 부모님만 빼고 다들 여기에 모이신 것 같네.”
“그게 말이다.”
이나은 아버지는 입을 삐죽 내민 이하영에게 무언갈 말하려다가, 그 대신에 두 사람의 어깨를 붙잡았다.
“일단 차에 가서 이야기하자. 하영이도 아저씨 따라오면 돼.”
“아직 수업 안 끝났는데?”
“나은아, 이럴 때 땡땡이 안 치면 언제 또 치겠어. 이 교복 입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이잖아. 바른말 말고 빨리 가자. 차 어디 있어요?”
“교문에서 좀 멀리다 댔는데, 시간 없으니까 우리 살짝만 뛰자.”
둘은 치마를 입었다며 불평했지만, 이나은 아버지는 묵묵히 그들을 데리고 저 멀리 보이는 태권도장 차량까지 달려갔다.
“아버지께선 뭔갈 알고 계신 건가? 하긴, 이쯤이면 이미 괴수 몇 마리 정도는 소환된 시점이겠지.”
내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는 듯, 교문 쪽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하필 또 저 괴수네.”
교문 쪽에 소환된 괴수는 나랑 악연이 깊은 A급 괴수, 히드라. 히드라는 아홉 개의 머리를 들이대며 주변에 녹색 연기를 뿜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연기에 닿은 사람은 온몸이 녹아내려 즉사했다. 간혹 연기에 살짝만 닿아 즉사하지 않은 사람들은 피를 토하다 히드라에게 잔인하게 물어뜯겨 죽음을 맞이했다.
그 장면을 이 일대의 모든 사람이 지켜보았고 공포는 삽시간에 퍼졌다.
히드라의 공격에 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앞사람을 밀치며 교문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달아나거나, 차 빼라고 경적을 울리거나, 아무것도 못 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거나, 기도를 올리는 등 각기 다른 행동을 하며 혼란을 더욱 가중했다.
그런 와중 이나은 일행이 택한 건 태권도장 차를 타고 도망치는 것. 다행히도 이나은 아버지가 차를 멀리에 주차한 덕분에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차량은 없었다.
이나은 아버지가 뒤돌아보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여 그들은 그나마 공포에 덜 질린 채 차까지 달려갔다.
이나은 아버지가 운전대를 잡고 시동을 걸 동안, 이하영이 먼저 차에 올라탔다. 그다음으로 이나은이 차에 올라타려던 순간.
“살려, 사, 살고 싶어….”
피를 철철 흘리는 남성이 이나은의 발목을 붙잡았다.
“나은아, 빨리 타! 이럴 시간 없어!”
“지금 밖에 피 흘리는 사람이 있는데….”
당황한 듯 무얼 해야 할지 몰라 이나은이 안절부절못하던 와중, 살려달라고 말하던 남성의 입에서 가시 달린 녹색 식물이 솟아났다.
인간의 몸속에서 급속도로 자라나는 식물형 괴수 ‘기생초’의 공격에 당한 남성은 당연히 즉사했다.
남성의 얼굴이 찢기며 튄 피에 이나은이 기겁할 때, 이하영이 황급히 남성의 손을 떼어내 차 문을 닫았다.
“아저씨, 출발하면 돼요!”
이하영의 말에 그들은 교문에서 멀어졌고, 그에 맞추어 세상은 점차 어두워지더니 완전한 암흑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