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82화 (83/168)

[14. 악몽(9)]

나를 부르는 말이 들림과 동시에 머릿속에 울려 퍼지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얼마 안 가 목소리는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었고, 이제야 정신을 좀 차릴 수 있었다.

목소리를 지워준 데 고마움을 표하려고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난 또 다른 장소에 와 있었다.

내가 앉아 있는 곳은 영화관의 좌석. 눈앞의 스크린에는 이나은 뒤통수 위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장면이 비치는 중이었다.

“정현 헌터 맞죠?”

그리고 내게 말을 건 사람은 악몽의 주인, 이나은이었다.

“너, 내가 보여?”

“반지도 안 끼셨는데 당연히 보이죠. 귀신은 아니시잖아요.”

“응. 김아람 헌터의 스킬로 네 꿈속에 들어온 상태야.”

“제 꿈속에요?”

꿈속이라는 말을 들은 그녀의 눈엔 눈물이 고였다.

“역시 여긴 꿈속이 맞았구나. 그럴 줄 알았어요.”

“알고 있었던 거야?”

“어렴풋하게요. 제 친구랑 가족이 죽는 장면을 다섯 번쯤 돌려봤을 때 꿈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다행히도 악몽에 빠진 보통의 사람과는 달리 이나은은 꿈속임을 빨리 알아챘다.

“대화하기까지 오래 걸려서 걱정했는데, 내 말 들어줘서 다행이다.”

“그러면 다시 깨야 하는 거죠?”

“네 꿈을 지켜본 입장에서 이런 말부터 하는 게 미안하긴 하지만, 바깥 상황이 너무 급해. 최대한 빨리 S급 헌터와의 전투를 끝내야 하는 상황이라 네 도움이 절실해.”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건 알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여기 계속 남아 있고 싶긴 하네요.”

“뭐? 이 악몽을 계속 꾸고 싶다고? 난 네 꿈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는데 당사자라면…. 만약에 이화가 나 때문에 죽는 모습을 계속 지켜봐야 한다면 난 아마…. 아니다. 이런 말 해서 미안.”

“괜찮아요.”

이나은은 사과할 필요 없다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물류 창고 단지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지켜보는 건 확실히 힘들긴 해도, 이 영화관에서만큼은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가 안 들려요.”

“목소리라면 누구처럼 되고 싶다는?”

“하영이처럼 되어야만 해. 하율 언니처럼 되어야만 해. 도훈 오빠처럼 되어야만 해. 아빠처럼 되어야만 해. 헌터가 된 이후로 이 네 문장을 끊임없이 들어 왔어요. 분명 초월자님과 거래하면서 바친 대가 때문에 그 말이 들리기 시작한 것 같은데, 대가로 뭘 바쳤는지 잊어버린 탓에 목소리가 들리게 된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어요.”

저 때 이후로 그런 환청을 들으며 지금까지 버텨 왔던 건가? 나였다면 불가능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나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저런 목소리를 들으며 일상생활을 할 순 없다.

“요즘 들어서 저희 일행하고 함께 있을 땐 목소리가 덜 들려서 괜찮긴 해도, 이유도 모른 채 목소리를 듣는 건 너무 힘들어요. 저 말들을 들으면 죽은 사람들이 계속 떠오르거든요. 짐덩이 시절도 잊히질 않고. 무엇보다 저 목소리를 들으면 왠지 몰라도 그 사람들처럼 행동하게 되면서 저 자신을 잃는 느낌이 들어요. 다른 네 명의 삶을 동시에 연기하면서 저 자신을 유지하기란 힘들더라고요.”

이나은의 성격을 종잡을 수 없었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한 번에 강해지도록 네깟 것을 지키고자 희생한 미물들의 힘 또한 부여해줬다.」

「그들처럼 지내라. 그러면 더욱 강해질 테니.」

「이미 대가를 바쳤으니 그들처럼 지낼 수밖에 없겠지만.」

초월자가 바치게 한 대가, 그게 원인이었다.

“그래서 이젠 뭐가 제 본래 모습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꼬이고 꼬여서 완전히 망가진 것 같아요. 뭐, 불평하는 것도 웃기네요. 조건을 들은 이후에 거래한 거고 그 덕분에 서준우 헌터에게 복수할 수 있었던 건 맞으니까.”

“저 뒤로는 어떻게 되었어?”

“아시는 대로 물류 창고 단지를 떠난 뒤에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김요한 세력의 주둔지로 갔어요.”

“네가 이전에 말했던 대로라면 저곳을 지킬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였지?”

기억을 더듬으며 물으니 이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허영의 사내’님께 후원받아서 강해지긴 했지만, 제가 S급 헌터인 서준우 헌터를 일격에 쓰러뜨린 건 고유 능력의 힘이 컸으니까요.”

“고유 능력?”

“제 소중한 사람을 직접 죽인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고유 능력이거든요.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쓸 수 없는 고유 능력이니 저 혼자만으론 물류 창고 단지를 지키기 힘들겠다고 판단했어요.”

이나은이 지키고 싶었던 정확한 대상은 물류 창고 단지가 아닌 냉동 창고 안의 시체였을 것이다. 신체가 온전해야만 모든 시련이 끝난 이후 그들을 되살릴 수 있다고 했으니. 그러나 그 부분을 지적하진 않았다. 강이란 세력에 의해 모든 게 불타버린 지금은 그들을 되살릴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건데, 그를 굳이 떠올리게 할 마음은 없었다.

“이젠 다 불타 버려서 의미가 없어졌지만요.”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어.”

악몽을 보고 나서야 이나은이 강이란 세력과 엮일 때마다 분노하며 무모한 행동을 해왔던 게 이해가 갔다.

“그래도 정현 헌터한테는 고마워하고 있어요. 그때 복수해주신다고 말씀하시는데 마치 하영이를 다시 보는 것만 같아서….”

눈물을 훔치며 이나은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건 몰라도 김아람 헌터 덕분에 정현 헌터한테는 고맙다고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되었네요. 여기서 나가면 저한테 고맙다는 말 듣기 힘들 걸요. 또 머릿속에 그런 목소리들이 울려 퍼질 테니까.”

“여기서 들었으니까 됐어. 네가 고마워할 만한 일을 아직 한 것도 아니고. 강이란도, 회사도 멀쩡히 남아 있잖아.”

게다가 이나은이 겪은 모든 일의 원흉인 우리 삼촌도 멀쩡히 남아 있다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정성훈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족하다.

“그건 그렇네요.”

“그러니까 이만 여기서 나가자. 물론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 때문에 한동안 힘들긴 하겠지만, 어떻게든 찾아보면 그 목소리가 안 들리게 만들 방법이 있을 거야.”

“초월자님과의 전속 계약 때문인데, 가능할까 싶긴 하네요. 그래도 정현 헌터 말이 맞아요. 여기 안에 남아서 일행의 짐이 될 순 없으니까 꿈에서 깨야죠.”

이나은은 다짐한 듯 두 주먹을 쥐었다. 다시 그 목소리가 울리는 세상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 것 같다.

“돌아갈 방법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거야.”

“…목숨을요.”

“김아람 헌터의 스킬로 만들어진 꿈속에서 목숨을 끊는다고 실제 목숨이 끊어지는 건 아니야. 죽으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거라는 건 알겠는데 내 말 믿어줘.”

꿈에서 깰 방법을 들은 이나은은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스크린에선 멸망 이전 학교의 모습이 다시 비추고 있었다.

“저를 지켜준 사람들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건 슬프지만.”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다시 나를 바라보는 이나은은 평소의 날카로운 눈매를 띤 채 허공에서 검을 만들어 냈다.

“돌아가는 게 맞죠. 정현 헌터 말 믿어요.”

“그러면 나부터 할게. 네가 깨기 전에 꿈에서 먼저 빠져나와야 한다고 했거든.”

이나은에게 검을 받아들고 내 목을 향해 겨눴다. 이전에 ‘빅풋 털옷’을 벗는 것으로 스스로 죽음을 택했던 적이 있었지만, 한 번 해봤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쉽지는 않았다.

잠깐 망설이다가 눈을 질끈 감고 검을 움직였다.

***

“정현 헌터님, 성공하신 거예요?”

김아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현실로 돌아온 것 같다. 다행히도 목을 그을 때 고통은 없었다.

꿈에서 깼을 때처럼 자연스레 눈을 뜨자 피눈물을 흘리는 김아람의 모습이 보였다.

“너 눈 왜 그래? 괜찮아?”

“‘드림 워킹’ 스킬의 반동이에요. 피는 곧 멎을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 이나은 헌터님은 깨우셨어요?”

“응. 곧 일어날 거야. 내가 잠든 이후로 시간은 얼마나 지났어?”

“10분 살짝 지났어요.”

본래 이나은을 깨우는 데 쓰려고 했던 시간은 10분. 그보다는 살짝 시간을 더 썼다.

“그동안 별일 없었지?”

“아직 싸움은 크게 안 났어요. 방우준 헌터도 오준석 헌터한테 이나은 헌터를 넘겨준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소란 일으키지 않으려는 것 같아요. 언제까지 그래 줄지는 모르겠지만요.”

김아람의 말대로 작은 소란은 조금씩 들렸지만, 용산역까지 들릴 정도의 소음은 아니었다.

“다행이네.”

안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날 때, 아르바이트생 중 남자 쪽이 다급히 말했다.

“누군가 오고 있어요.”

귀를 기울이자 셔터를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큰일 났네. 이나은 헌터는요?”

붓을 꺼내며 던진 김아람의 질문에 이나은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아직 잠든 상태 그대로였다.

“내게 분명 일어나겠다고 말했어.”

현실로 돌아오면 들리게 될 목소리 때문에 아직 망설이는 중인 듯하다.

“일단 제가 막아보고 있을게요.”

김아람은 눈을 끔뻑이더니 그대로 벽에 기대어 잠들었다. 두 아르바이트생에겐 스킬을 쓰려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궁중 식도를 장비해 나름대로 대비할 준비를 했다.

“여기 맞냐?”

“너 진짜 생각이 짧다. 물어보면 되잖아.”

“아, 맞네. 혹시 오늘 보내진 선수 여기 있으면 대답해봐.”

“자고 있는데 여기 있다고 대답하겠냐? 혹시 오늘 보내진 선수 여기서 자고 있는지 물어봐야지.”

“너 똑똑하다.”

처참한 지능을 가진 듯한 두 헌터의 대화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더니 문이 열렸다.

“저기 있다.”

“데려가자.”

문을 연 건 두 명의 헌터. 그중 한 명은 문을 열자마자 덮친 호랑이에 물려 쓰러졌다. 스킬 ‘호접지몽’에 의해 김아람이 그린 호랑이 그림이 살아 움직인 결과였다. 줄무늬를 포함한 생김새가 엉성하긴 했으나 이빨만큼은 날카로워 적의 목숨을 끊는다는 제 역할을 다했다.

“뭐야, 이게?”

그러나 옆의 헌터가 장비한 창으로 내리찍자 호랑이 그림은 고통스러워하며 테두리가 지워지기 시작했다.

“너희가 내 친구를 죽인 거야?”

딱 봐도 힘깨나 쓸 것 같은 덩치의 헌터는 창을 비틀며 호랑이 그림의 테두리를 완전히 지웠다.

“김아람 헌터가 다음 그림 그릴 때까지 시간 걸릴 텐데…. 다른 두 분은 제 뒤로 가 계세요.”

김아람이 스킬 ‘호접지몽’을 다시 쓰기 위해선 그림 그릴 시간을 벌어주어야 한다. 그 역할을 할 사람은 지금 나밖에 없다. 1초 이상 벌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걸면 김아람이 그림을 완성할 시간을 어떻게든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안 어울리네요.”

궁중 식도를 단단히 잡는데,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정현 헌터도 뒤로 빠지세요. 괜히 방해돼요.”

퉁명스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나를 거칠게 밀치더니, 앞으로 나섰다.

“꿈속에서 살짝 망설인 값은 제대로 치를게요.”

악몽에서 깨어난 이나은은 앞으로 뛰쳐나가며 일격에 창 든 헌터를 쓰러뜨렸다.

“김아람 헌터랑 여기 계세요. 밖에 정리하고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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