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선전포고(1)]
“일단 급한 불은 껐네요.”
대장간 맞은편 벽, 얼음 더미 속에 처박혀 있는 방우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나은의 주먹에 당해 방우준이 쓴 방독면은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깨진 방독면 사이로 줄줄 흐르는 피만 보아선 숨이 끊어진 것 같긴 하지만, 혹시나 깨어난다고 해도 팔다리를 관통한 얼음 더미 때문에 문제 될 건 없어 보인다.
“덕분에 정리할 건 산더미처럼 늘었지만 말이야.”
쓰러지는 와중에도 격렬히 저항한 탓에 가게 곳곳은 불에 그슬렸고 장비들은 정돈되지 않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게 불만이었는지 주인장은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빈 스프레이 통을 걷어차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빨리 움직여!”
주인장의 재촉에 아르바이트생들은 몸을 움츠리며 장비를 정리했고, 송태섭은 쓰러진 헌터들을 대장간 밖으로 끌어냈다.
“조금이라도 다친 부상자들은 앉아서 쉬기나 해!”
송태섭을 도와주러 가던 이화를 호통만으로 다시 자리에 앉힌 뒤, 주인장은 내게 물었다.
“당돌한 꼬맹이는 괜찮은 거야?”
“네. 저대로 자게 두면 돼요.”
살짝 찢어진 이마를 김화영에게 치료받는 이나은 옆, 김아람은 소란 속에서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드림 워킹’ 스킬의 반동으로 입은 내상은 잠자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다고 했으니 일단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혹여나 또 피눈물이라도 흘리면 조치를 해야겠지만요.”
“행동대장 하나를 쓰러뜨리는 것도 이리 버거운데 투기장은 어떻게 공략하겠다는 거야?”
툴툴거리면서도 주인장은 김아람에게 모포를 덮어 주었다. 그런 다음 팔짱을 낀 채 김화영이 이화의 찰과상에 약을 발라주는 걸 지켜보더니 툭 하고 말했다.
“그래도 우리 아르바이트생 괴롭히는 놈 쓰러뜨려 줘서 고맙긴 하네. 그 보답이니까 투기장 가기 전에 저기 떨어져 있는 장비 중에서 필요한 거 있으면 챙겨가. 대신에 갔다 와서 돌려줘야 해. 투기장 공략할 동안에만 빌려주는 거야.”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투기장 놈들이나 확실하게 처리하고 와. 너희가 투기장 공략에 실패하면 나까지 귀찮아지거든.”
주인장은 송태섭이 모아둔 헌터들 쪽을 가리켰다.
“저놈들이 여기서 쓰러졌는데 우리 가게를 가만히 놔둘 린 없잖아.”
“하긴 그렇겠네요.”
주인장은 이나은을 감싸준 데다가 우리랑 함께 강이란 세력의 헌터를 쓰러뜨리기까지 했다. 본인의 의도가 어찌 되었든 간에 강이란 세력에겐 공식적으로 적이 되었음을 선언한 것처럼 보일 테다.
“가게를 옮기실 생각은 없으신 거죠?”
“왜 내가 가게를 옮겨? 그 망할 것들 때문에? 그럴 바에야 차라리 여기서 죽고 말지.”
“그러면 저한테 여기 있는 장비 절반을 빌려주시는 게 어때요?”
내가 봐도 뜬금없는 제안이다. 주인장 역시 그렇게 느껴졌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값은 반드시 치를게요.”
“고작 여섯 명이 그 많은 걸 어디다 쓰려고?”
“투기장 공략하는 데 쓰려고요. 장비 절반만 빌려주신다면 투기장 놈들이 다시는 여기에 얼씬도 못 하게 만들어 드릴게요.”
진지하게 말하자 주인장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장비 절반의 소유권쯤은 통 크게 넘겨줄게.”
“소유권을요?”
“투기장 놈들 쓸어주는 대가로 내 지인 소개에 장비 절반의 소유권. 이 정도면 거래 조건으론 충분한 것 같은데?”
주인장은 손을 내민 채 장비를 바라볼 때의 눈빛으로 내 위아래를 훑었다.
“거래할 거야? 말 거야? 빨리 정해.”
“받아들일게요.”
손을 잡자 그녀는 뜻 모를 말을 했다.
“…그 녀석이 원하던 인물 하나, 여기서 건질 수도 있겠네.”
“네?”
“거래 성립이라고.”
***
저녁을 먹자마자 상가에서 나와 장비를 잔뜩 실은 수레를 끌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해가 완전히 져버렸다.
“한 시간이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하지 않았어요?”
주인장의 말과는 달리 한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여전히 용산역을 향해 수레를 끄는 처지인 데에 불평하자 미안하다는 투의 대답이 돌아왔다.
“신혜진 헌터의 힘 스탯이라면 한 시간 안에 도착했을 건데, 제가 워낙에 스탯이 낮은 탓에…. 죄송해요.”
송지아의 사과에 할 말이 없었다. 시간을 초과한 것은 어떻게 보아도 힘 스탯이 0인 내 문제가 더 컸다.
“아니에요. 오히려 별 도움 안 되는 건 저죠. 그냥 답답해서 아무 말이나 한 거였어요.”
“아무래도 날도 어두운데 로브까지 쓰니까 더 오래 걸리는 것 같네요.”
“지금껏 로브 쓰고 어떻게 다니신 거예요? 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는데요?”
“처음에는 시야가 가려져서 불편할 텐데 익숙해지면 괜찮아요. 이제 오른쪽으로 꺾을 거예요.”
송지아의 지시에 수레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로브를 뒤집어써 시야가 가려진 상태라 만약 주인장이 함께 수레를 끌라고 아르바이트생 중 한 명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길을 잃고 말았을 거다.
“차라리 ‘특급 냉장고’라도 쓸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제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강이란 세력의 헌터들이 곳곳에서 감시하고 있으니까 그건 안 된다고 하셨죠?”
“네.”
아무런 의심을 사지 않고 장비를 날라야 하는 상황이기에 ‘특급 냉장고’를 쓰지 말라는 주인장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쁜 의미로 말하는 건 아니지만, 정현 헌터 대신 힘 스탯이 더 높은 헌터가 이 역할 맡아도 되는 거 아니었나요?”
“남동생분하고 체형이 비슷한 사람은 저밖에 없었으니까, 그건 안 될 것 같네요.”
용산역에 침투하기 위한 작전으로 내가 제시한 것은 장비 납품. 장비를 납품한다는 명목하에 용산역 안으로 들어가면 김화영이 스킬을 써 내 몸에 새겨둔 표식으로 이동하는 것이 내 계획이었다.
이 작전의 핵심은 의심받지 않는 것.
따라서 처음엔 평소 장비를 납품할 때처럼 보이도록 두 아르바이트생과 체형이 그나마 비슷한 나와 이화가 장비를 옮기는 역할을 맡으려 했다. 그러나 주인장은 이화 대신 송지아에게 그 역할을 맡도록 했다. 송지아의 키가 이화보다 크기도 했고, 아는 얼굴이 하나쯤은 있어야 의심을 덜 받을 거란 게 그 이유였다.
한편 체형이 비슷한 것만으로 나를 송지아의 남동생인 송우석이라고 속이기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여 작전 실행 시간을 해가 질 때로 잡고 로브를 완전히 뒤집어써 얼굴을 가린 채로 이동했다. 덕분에 이동 시간이 늦추어져서 나머지 일행과 약속했던 시간인 자정 전에 제때 도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강이란 세력에게 의심받지 않는다는 목적은 달성한 것 같다.
“자정 전엔 도착할 수 있겠죠?”
“네. 아무리 늦어도 그 전엔 도착하죠. 근데 용산역 안에 들어가기 전에 다른 분들이 여기로 이동하시진 않겠죠?”
“혹시 몰라서 제가 신호를 주면 이동하기로 했으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세요.”
“알겠어요. 로브 조금만 더 내리실래요? 용산역 근처에 왔거든요.”
송지아는 내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로브를 잡아당기며 주변을 살폈다.
“이대로 쭉 나아가죠.”
그 뒤로 10여 분 정도 걸어가자 송지아는 다음 지시를 내렸다.
“이제 용산역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올 거예요. 계단 근처에는 순찰하는 헌터들이 항상 있으니까 여기서부턴 고개 숙이시고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송지아의 말대로 곧 저 멀리 용산역이 적힌 팻말과 함께 계단이 보였다. 계단 앞에는 무기를 장비한 채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헌터들이 있었다.
헌터 셋은 곧 우리가 든 횃불을 발견했는지 이쪽으로 다가왔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절대 말하면 안 돼요.”
“뭐야, 지아냐? 밖에 돌아다니던 놈들이 너희 오고 있다길래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히 있겠다고 답하기도 전 순찰하던 헌터가 말을 건넸다.
“근데 무기 수리 맡긴 건 이미 다 보내줬잖아. 수레에 실은 건 또 뭐야?”
“수리하다가 망가진 장비들이 몇 개 있었던 게 기억나셨다면서 미안하다는 의미로 이거 전부 갖다 드리라고 했어요.”
송지아는 몸을 떨면서도 자신이 할 말을 무사히 마쳤다.
“망가진 장비들이 있었다고? 전부 제대로 온 거 같던데?”
“야, 그 아줌마가 전문간데 너보단 더 잘 알겠지. 그리고 망가진 장비가 있든 없든 간에 이렇게나 많은 장비를 안 받았다간 부대장님한테 크게 혼날걸?”
“그렇긴 하네. 장비 준다는 데 우리야 좋지. 그나저나 지아, 넌 우리 좀 그만 무서워해라. 뭘 그리 벌벌 떨고 있냐? 선수 아닌 사람은 안 건드린다니깐. 안 그러냐, 우석아?”
송지아가 눈짓해 당부받은 대로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있었다.
“얜 어째 옛날부터 아무 말도 없냐. 됐으니까, 수레 놓고 돌아가. 장비는 우리가 알아서 옮겨 놓을게.”
“그, 그게….”
예상했던 시나리오는 수레를 끌고 무기고 안까지 들어가는 거였는데,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망가진 장비들 수리해드린다면서 찾아오라고 하셨어요.”
“이야, 아줌마 웬일로 착해졌대? 죽을 때 된 거 아니야? 올라가, 그럼.”
다행히 송지아가 황급히 지어낸 말에 넘어간 헌터들은 기뻐하며 뒤편에서 수레를 밀어주었다. 헌터 셋이 달라붙은 덕분에 계단 위까지 금방 올라갈 수 있었다.
“길은 알지? 우린 밑에 계속 지키고 있어야 하니까 둘이 알아서 장비 정리하고 수리해야 할 장비 찾아가.”
“네.”
“딴 데로 샜다간 다른 놈들이 너희 둘 다 죽일 거니, 할 일만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송지아의 등을 툭툭 치며 웃더니 셋은 다시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잘 넘어가서 다행이네요.”
“네. 긴장돼서 혼났어요.”
“무기고는 어느 쪽이에요?”
“여기가 1번 출구니까 대합실 쪽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서 왼쪽으로 쭉 가면 돼요.”
“그럼 가보죠.”
송지아의 안내에 따라 대합실 안으로 수레를 끌고 가니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옥타곤이 보였다. 대합실 공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옥타곤 군데군데에는 피가 묻어 있어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혹시 선수들이 저 안에서 싸우는 거예요?”
“…네. 괴수랑 맨몸으로 싸우거나 다른 선수랑 무기를 든 채 싸우거나. 일주일에 한 번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저 안에서 싸워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오준석 헌터에게 죽임을 당하거든요.”
“그래야 하는데 선수를 자원한 사람들이 있다고요?”
“저 안에 들어가서 스무 번 이상 살아남으면 강이란 세력의 헌터와 싸울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거든요. 거기서 이겨야만 강이란 세력의 헌터가 될 수 있어서 자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로 알아요.”
옥타곤을 바라보는 송지아의 눈빛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여서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가 무기고예요.”
송지아가 가리키는 곳에는 서점 입구가 있었다. 서점의 이름이 있어야 할 곳엔 스프레이로 ‘펜이 칼보다 강하겠냐?’라고 쓰여 있었다.
서점 앞에는 헌터 둘이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평소 송지아가 자주 들락거린 덕분인지 별말 없이 내부로 들여보내 주었다.
서점 안에 들어오자 수많은 서가가 보였다. 그러나 책은 단 한 권도 보이지 않았다. 서가엔 책이 아닌 각종 장비가 채워져 있었다.
“장비가 꽤 많네요.”
“선수들이 쓰는 장비가 전부 여기 있는 거니까요. 그럼 이제 할 일 하세요. 제가 밖에 잘 보고 있을게요.”
“그 전에 송지아 헌터가 해주셔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어요.”
“제가요? 신혜진 헌터께선 무기고까지만 안내하면 된다고 하셨는데….”
“별 건 아니고 그냥 저 한 대만 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