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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요리사-84화 (85/168)

[15. 선전포고(2)]

송지아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전 정말 괜찮으니까, 있는 힘껏 한 대만 쳐주세요.”

“갑자기 그런 이상한 부탁을 하시면….”

“그쪽이 절 때려줘야 신호를 보낼 수 있어요.”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며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내 가슴팍을 세게 쳤다.

“윽.”

“죄송해요. 너무 세게 때렸죠?”

“아니에요. 제가 부탁한 건데요.”

괜찮다곤 말했으나 예상보다 큰 고통에 신음이 터져 나오지 않도록 애를 써야 했다. 그렇게 속으로 끙끙 앓는 와중 기다리던 글씨가 새겨졌다.

[‘인스턴트’ 특성이 발동됩니다.]

[3분간 민첩 스탯이 50 상승합니다.]

물론 이 특성이 발동된다 해서 내 스탯이 오르는 건 아니지만.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사이’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플레이어 ‘김화영’과 보상을 나누어 받게 됩니다.]

[3분간 플레이어 ‘정현’이 획득한 민첩 스탯 50중 25 스탯이 플레이어 ‘김화영’에게 귀속됩니다.]

김화영에게 신호를 주는 용도로 이용하기엔 충분했다.

얼마 안 지나 김화영의 스탯이 상승한 것을 확인했는지 내 곁에 나머지 일행들이 나타났다.

“어라? 현아, 어디 맞았어? 왜 그런 표정이야?”

“잠 좀 깰 겸 송지아 헌터한테 한 대만 쳐달라고 했거든요. 그럼 전원이 모였으니 빠르게 최종 점검부터 할까요?”

김화영의 물음엔 대충 둘러대고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적진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김화영도 토 달지 않고 내 이야기에 집중해주었다.

“본인 역할은 다들 기억하고 계시죠?”

“응. 나랑 아람이는 소란 피워서 적 헌터들의 시선을 뺏는 역할이었어.”

“맞아요. 오면서 얼핏 보니까 대합실 쪽으로 적 헌터들을 불러들이는 게 나을 것 같더라고요. 일이 잘못되면 도망치기 편할 거예요.”

대합실은 외부로 나가는 출구를 비롯하여 지하철 승강장, 백화점 등의 여러 장소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 만큼 피치 못하게 도망쳐야 할 상황이 생겼을 때 대합실에 있다면 대처하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김아람 헌터는 스킬 쓰면 곧바로 잠드니까 김화영 헌터가 잘 엄호해줘야 해요.”

“걱정 붙들어 매셔.”

“저희가 적 헌터의 시선을 빼앗을수록 다른 분들이 행동하기 쉬워지니까 최대한 많은 헌터의 시선을 끌어야 한다고 하셨죠?”

“맞아. 굳이 적들을 쓰러뜨릴 필요까진 없으니까 다른 쪽에 개입하지 못하게 시선만 끌고 있어 줘.”

무리한 요구인 걸 알면서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우리 측의 인원이 적은 만큼 투기장 공략은 저 두 사람이 얼마나 어그로를 잘 끄는가에 따라 성패가 갈리니까.

두 사람도 본인들이 맡은 역할의 중요성을 아는 만큼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믿어. 현이가 초월자님들께 방송할 때마다 옆에서 구경했으니까 잘 할 수 있어.”

“기대하고 있을게요. 다음으로 송태섭 헌터는.”

“두 사람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지하철 쪽으로 가서 붙잡힌 사람들을 풀어준다. 잘 숙지하고 있어.”

“송태섭 헌터는 빠르게 움직이는 게 중요해요. 그래야 김화영 헌터랑 김아람 헌터가 부담을 덜 수 있어요.”

“어. 최대한 빠르게 할 일 마치고 대합실 쪽에 붙을게.”

송태섭은 붙잡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그들과 함께 대합실 쪽을 도울 예정이다. 선수들은 불리한 환경에서 싸우게 될 테니, 송태섭 측이 김화영 측에 합류하는 것만으로도 전력 차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때부턴 맘껏 적들을 쓰러뜨리세요. 평소에 좋아하시던 내기 하셔도 되고요.”

“그래, 우리 누가 적 헌터를 제일 많이 쓰러뜨리는지 내기하자. 야구 경기장에선 내가 졌으니깐 이번엔 반드시 이길 거야.”

“이번에도 내가 이길 게 뻔해서 내기하는 의미가 없을 텐데. 어쨌든 내가 할 일은 잘 알겠다. 현이는 계속 이야기 진행해.”

“교란팀과 구출팀 측은 끝났고,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들은….”

“부대장을 맡는 거죠.”

이나은은 그에게 패배했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근데 오빠, 괜찮겠어? 제일 위험한 곳에 비전투원이 가는 건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은데.”

“부대장이 싸우는 모습을 직접 봐야만 스킬 같은 걸 파훼할 방법이 떠오를 것 같아서. 그리고 S급 헌터가 둘이나 있는데, 제일 위험한 곳이라니?”

“부대장하고 싸울 때 오빠까지 봐줄 여력이 없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반지 끼고 있을 테니까 괜찮을 거야. 너네한테 방해될 것 같으면 바로 다른 곳으로 가서 숨어 있을게.”

“그 말 꼭 지켜. 위험해지면 바로 다른 곳으로 도망치는 거야.”

“알겠어.”

‘CONTINUE?’ 특성의 효율을 최대한 뽑아내는 방법은 제일 불안한 곳에 가서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다. 이번 투기장 공략에서 제일 불안한 곳은 부대장 쪽. 두 사람이 부대장을 이기지 못한다면 이 작전은 실패한 거나 다름없기에 부대장을 상대하는 쪽과 함께 움직이기를 고집했다.

“본인 역할은 다들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마지막으로 몇 가지만 더 확인해볼게요. 송지아 헌터, 밤에는 최소한의 보초만 남겨두고 나머지 인원들은 모두 잠들어 있다고 했죠?”

“네. 선수들 대부분 이 시간에는 백화점 어딘가에서 자고 있어요.”

“강이란 세력의 헌터들은요?”

“부대장이 백화점에 있는 야외정원 같은 곳에서 지내거든요. 그 근처에 있을 거예요.”

“몇 명 데리고 왔는지는 모르고요.”

“네. 보통은 서너 명 데려오는데 이번에도 그만큼 데려왔을진 모르겠네요.”

이나은과 이화가 부대장을 맘 편히 상대할 수 있게 하려면 나머지 인원들을 백화점 밖으로 빼내는 것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지하철 쪽을 지키는 사람은 몇 명이나 돼요?”

“밤에는 두세 명 정도 항상 남겨뒀어요.”

송태섭을 바라보자 그 정도 인원은 홀로 상대할 수 있다며 자신 있는 태도를 보였다.

“이나은 헌터랑 이화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부대장한테 가야 하니까 다른 사람들부터 출발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교란팀이 대합실 쪽으로 이동해서 백화점에서 헌터들을 끌어낸 다음에 이나은 헌터랑 이화가 움직이는 거로 하죠.”

“나는 어떻게 하면 되지?”

“송태섭 헌터는 교란팀하고 같이 나가되 바로 지하철 쪽으로 가세요. 이 정도면 이야기해야 할 건 다 한 것 같은데, 누구 질문 있나요?”

질문 있냐는 말에 이화가 손을 들었다.

“박씨 남매는 정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거 맞아?”

그런 동생의 의문엔 김화영과 김아람이 대신 답해 주었다.

“주인아줌마가 했던 말 기억 안 나? 부대장이 그 두 사람 엄청나게 아껴서 본인의 명령 없인 전투에 나서지 말라고 했다잖아.”

“거기에 덧붙여서 박씨 남매가 비전투원이라 부대장이 그런 지시를 내린 것이라는 소문도 있다고 말씀하셨죠. 실제로 저희가 상대했을 적에도 남매는 부대장의 명령에 따라 스킬을 반사하거나 ‘이면’이란 공간으로 저희를 옮겼을 뿐, 전투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었고요. 그래서 가게에서 작전을 짤 때 그 둘을 만나면 스킬에 당하지만 않게끔 주의하자고 했던 거였잖아요.”

“두 사람의 말대로 박씨 남매는 부대장에게 따로 명령을 받지 않는 이상 우리를 막아서지 않을 테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물론 부대장과 함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땐, 붙잡혀 있는 일행들을 구출한 뒤에 곧바로 도망치는 쪽으로 노선을 틀어야지.”

나까지 거들어 대장간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되풀이하자 이화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화 질문도 해결했고. 그 외에 질문 더 없으면 이야기 여기서 마칠까요?”

“잠깐 한마디만 해도 될까요?”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송지아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말했다.

“저, 저도 붙잡혀 온 선수들을 구하러 가볼게요.”

사전에 주인장과 약속했던 건 도착한 이후 송지아를 작전에서 배제하는 거였다. 그런데 본인이 직접 작전에 참여하겠다고 말할 줄이야.

“괜찮겠어요? 아무리 교란팀이 시선을 끌어준다고 하더라도 싸움은 피할 수 없을 텐데.”

“…네. 지하철 선로를 따라서 조금 더 들어가야 붙잡힌 사람들이 있는 지하철이 나오거든요. 제가 함께 가야 길 안 잃고 시간도 아낄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주기만 한다면 저야 고맙죠.”

본인도 위험함을 인지하고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고 송태섭도 괜찮다고 하니 송지아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제 최종 점검은 끝났네요.”

“그럼 바로 나가면 되는 거야?”

“그 전에 여기서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어요.”

근처의 서가에 올려진 장비를 잡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장비 전부 다 ‘특급 냉장고’에 넣어둘 거니까 제 앞으로 옮겨와 주세요.”

선수들이 사용하는 장비들을 전부 챙긴 뒤, 다시 로브를 쓰고 무기고 밖으로 나왔다.

“수리할 장비 가지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왜 빈손이지? 네 누나는 어디 갔고?”

“장비 다 챙겼는데 안 보이나요?”

로브를 벗으며 말하자 두 보초는 당황한 듯 물었다.

“너 누구야?”

그러나 내 뒤편에서 날아온 단검 두 자루에 목을 관통당해 대답을 듣지 못하고 쓰러졌다.

“오호, 용산역은 이렇게 생겼구나.”

자신의 단검을 회수하며 김화영은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럼 출발할게.”

“다들 조심하세요. 특히나 정현 헌터님, 제일 위험한 곳에 가시니까 정말 조심하셔야 해요.”

김아람은 마지막 말을 강조하곤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대합실 쪽으로 향했다.

“저희도 이동하죠. 저기면 괜찮을 것 같네요.”

무기고 앞에 남겨진 우리는 이대로 있을 순 없었기에 근처의 무너진 잔해 뒤에 모습을 감추었다.

“바로 옆이 백화점하고 연결된 통로니까 상황 지켜보다가 들어가면 되겠네요.”

“자! 지금부터 다시 경기 시작이야!”

모습을 감춘 직후, 옥타곤 쪽에서 김화영의 외침이 들려왔다.

“강이란 세력의 헌터가 되고 싶다면서 침입자를 허용하면 안 되지! 어서 와서 나 붙잡아!”

용산역이 떠나가라 소리 질러대는 김화영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는지 백화점 밖으로 헌터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눈을 비비며 상황을 확인하곤 무기고 쪽으로 뛰어갔다. 그러다 입구에 쓰러진 두 보초를 보고 욕설을 내뱉고.

“뭐야, 얘네 왜 쓰러져 있어?”

텅텅 비어 있는 무기고 내부를 보고 한 번 더 욕설을 내뱉었다.

“장비는 또 어디다 갖다 판 거야? 왜 하나도 없어?”

결국 그들은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대합실 쪽으로 갔다.

“대다수가 무장 안 한 헌터니까 교란팀 둘이서도 한동안은 버틸 수 있겠네요.”

“그래도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우리도 빨리 움직여야 해.”

“지금 가는 게 어때요? 백화점에서 나오는 사람 이제 없는 거 같은데요?”

“가자.”

백화점에서 나오는 사람이 더 보이지 않자 우리도 행동에 들어갔다.

김아람이 ‘호접지몽’ 스킬로 조종하는 거대한 코끼리 그림에 온통 시선이 쏠린 터라,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는 우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백화점 안에 들어서니 바로 에스컬레이터가 나왔다.

“내 기억으론 야외정원은 한 층만 위로 올라가면 나오거든?”

“그래? 여기 와 본 적 있어?”

“멸망 전에 남자친구랑 몇 번. 영화관도 있고 밥도 먹을 수 있으니까.”

순간 이화에게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얼어붙을 뻔했으나 그 자식에 대해 추궁할 땐 아니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고 일단은 위로 올라가자. 길 안내해줘.”

“깨진 지 오래됐는데 이야기할 게 뭐 있다고. 어쨌든 이제부터 오빤 반지 껴.”

내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이화는 에스컬레이터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도착한 4층엔 잔해가 잔뜩 쌓여 있었다.

“저쪽이다.”

잔해를 치우며 이화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니 야외정원이 나왔다. 야외정원은 야외 숲이라고 명칭을 바꿔야 할 만큼 큰 나무들이 자라나 있었는데, 그 나무들 뒤로 텐트 하나가 보였다.

“부대장은 저기서 지내는 것 같네요.”

“가까이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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