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선전포고(3)]
“정현 헌터는 여기 가만히 계세요.”
그 말을 남기고 선두로 나선 이나은과 우산을 치켜든 채 그 뒤를 따르는 이화. 둘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깨진 유리창 너머 야외정원을 향해 나아갔다.
이나은의 말에 따라 가만히 둘을 지켜보는데 이화가 텐트 쪽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텐트 안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불빛으로 인해 밖에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그림자의 형태는 누워 있는 사람의 실루엣.
이런 소란 속에서 부하를 모두 내려보내고 본인은 텐트 안에서 맘 편히 쉬고 있다니. 부대장도 강이란 세력답게 단단히 꼬인 놈 같다.
강이란 세력의 이미지를 확고히 다지고 있는데 이나은이 멀리 떨어지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바로 싸울 생각인가 보네.”
SS급 헌터와의 전투를 앞둔 상황. 약속했듯 난 뒤쪽으로 빠졌다.
지금부터는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해 모든 상황을 두 눈에 담아야 하므로, 야외정원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으면서 전투를 지켜볼 수 있을 만한 장소에 숨어 있어야 한다.
주변을 살피다가 부서진 점포들 사이 과거 커피숍이었던 곳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쓰러져 있는 테이블 뒤라면 야외정원과 충분히 거리도 있으면서 시야를 가리는 게 없어 전투를 지켜보기에도 좋다.
적합한 곳을 찾아 그곳에 자리를 잡았을 때, 이화와 이나은은 야외정원 가장자리에 있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상태였다. 둘은 잔뜩 긴장한 채 텐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멋대로 자라난 나무들이 텐트를 부분부분 가렸으나, 상당히 큰 텐트 벽에 그림자가 비치는 것은 물론 고급 브랜드사 상표가 찍혀 있는 것까지 보였다.
“텐트 옆에 있는 건 또 뭐야?”
그림자가 비치는 면 옆에 놓인 건 캠핑용 의자였다. 그 뒤에 식기 기구들도 있었는데 하나같이 상당히 고급스러운 것으로 보아 부대장은 이곳에서 사치를 누리며 지낸 것 같다.
“팔자도 좋네.”
텐트 주변을 살피는데 별안간 이나은과 이화가 움직임을 취했다.
“뭘 하려는 거지?”
이나은이 주먹을 뻗자 그녀가 몸을 숨기고 있던 나무가 부러지며 그대로 텐트 위로 떨어졌다. 동시에 이화가 우산을 휘둘러 만든 거대한 얼음 창들이 비처럼 쏟아지며 그 위를 덮었다. 나무를 관통한 얼음 창들은 그대로 텐트 천까지 뚫고 바닥에 박혔다. 저 밑에 있다간 뼈도 못 추리겠다고 생각될 정도로 수많은 얼음 창들이 내리꽂힌 뒤, 이화는 마무리로 우산에서 엄청난 불길을 뿜어냈다. 이화가 만든 불길은 정원에 있는 모든 식물을 태우며 텐트에까지 옮겨붙었다.
두 사람은 부대장과 정면으로 맞붙는 대신 처음부터 화력을 쏟아부으며 기습을 통해 단숨에 처치하고자 한 것 같다. 실제로 그 계획은 성공한 것 같다. 갈기갈기 찢어진 채 불타고 있는 텐트 안에서 살아남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이렇게 간단히 끝났다고? 누군가 침입했다는 걸 알면서 곧이곧대로 야습당해줄 것 같진 않았는데….”
하지만 상대는 SS급 헌터인 부대장. 일행 모두가 저자에게 당한 전력이 있기에 긴장감을 놓칠 수 없었다. 이나은과 이화도 마찬가지였는지 전투 자세를 유지한 채 텐트 쪽을 주의 깊게 응시했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들지 말라는 말 안 들어봤나? 어렸을 때, 그런 것쯤은 다들 배울 텐데? 혹시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거야? 그래서 그런 간단한 속담조차 모르는 거야?”
텐트가 완전히 타버렸을 즈음, 뼈대만 남은 텐트 아래에서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부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뜨겁지도 않은 듯 부대장은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불붙은 나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하룻강아지들이 범 무서운 줄 모르네. 아니면 본인들이 하룻강아지란 사실을 모르는 건가? 딱 우물 안 개구리, 그 자체네.”
그의 손가락이 닿자마자 나무는 갈라지더니 말 그대로 재가 되어 버렸다.
“벼룩도 낯짝이 있지, 편히 쉬는 사람을 건드리면 안 되는 건 상식 아닌가?”
부대장은 모든 걸 초월한 듯한 말투를 유지하며 이화가 만들어낸 불길 속을 여유롭게 걸었다.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지던 실루엣이 완전히 드러나자 이화와 이나은은 살짝 당황한 듯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부대장의 헐벗은 상체엔 상처 하나 없던 것이다.
“화상조차 안 입었다고? 나처럼 ‘불 내성’ 특성이 있는 거야?”
끔찍하리만큼 튼튼한 그의 신체에 경악하는데 부대장이 이나은을 향해 말을 건넸다.
“넌 잠들어 있던 거 아니었나?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랫것들이 또 일을 거하게 그르친 거야? 강이란 헌터님께 보내야 하니 잘 지키라고 했건만.”
부대장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팔짱을 끼고 이번엔 이화에게 물었다.
“넌 처음 보는데? 마포에서 내가 널 놓쳤던가?”
“팔자 좋게 대화할 때는 아닌 것 같네요.”
사전에 계획했던 대로 불로 화상 입히는 방법이 통하지 않자 이화는 곧바로 부대장에게 달라붙어 우산을 휘둘렀다. 우산이 그린 붉은 궤적에 따라 불길이 이는데도 부대장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공격을 담담히 맞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것 몰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대화가 얼마나 가치 있는데, 팔자 좋게 대화할 때가 아니라니.”
S급 헌터다운 빠른 움직임으로 이화가 사방에서 공격을 퍼부었으나 부대장은 진지하게 대화가 중요하다며 설교할 뿐이었다.
“다 끝났어? 그럼 내 이야기에 집중해줄래?”
“망할.”
머리, 다리, 팔, 등, 옆구리 등등. 그 어떤 곳에도 자신의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이화는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오래도록 공격을 받아냈음에도 부대장의 몸에는 여전히 상처 하나 없었다. 저자의 몸은 어찌 된 게 물리적인 충격을 모두 흡수하는 것 같다.
‘뭔가 내가 던진 단검이 팔뚝에 꽂혔는데, 그런 적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돼버렸다고 해야 할까나?’
전에 들었던 김화영의 설명이 정확했다.
그녀의 말대로 현재까진 공격받았단 사실 자체를 아예 없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운 거란 것쯤은 알고 있겠지? 너희가 먼저 공격했으니까, 나도 그만큼 해주는 거야.”
부대장이 빠른 속도로 이화에게 달라붙어 가느다란 팔을 움직였다. 그의 조그만 주먹은 이화의 복부를 살포시 밀쳤다. 표정으로 보아선 모든 힘을 다한 것처럼 보이지만 근육이라곤 하나 없는 신체 덕분에 별다른 타격은….
“본인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도와주지.”
별안간 이화가 입과 코에서 피를 뿜었다.
“이화?”
“정이화 헌터한테 뭔 짓을 한 거야?”
“공격받았으니 나도 그에 맞춰줬는데?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것도 이참에 알려줬지.”
부대장은 피식 웃으며 이화를 밀쳤다. 아까처럼 살짝 밀쳤으나 이화는 순식간에 반대편에 쌓여 있는 잔해까지 날아가 굉음을 내며 그 속에 처박혔다. 그를 보자마자 이나은이 덤벼들었다.
“다음은 또 너냐? 나랑 싸우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이제 알 때도 되지 않았어? 차라리 둘이 같이 덤비든가. 하나씩 덤비니까 네 동료가 저렇게 된 거 아니야. 그러니까 전부 너 때문이란 거지. 알아?”
“닥쳐.”
이나은은 겨루기 자세를 취하며 빠른 속도로 공격을 이어갔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돌려차기’ 기술에 성공하였습니다.]
[2점 득점으로, ‘힘’이 2.5배 적용된 피해를 입힙니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정권 지르기’ 기술에 성공하였습니다.]
[1점 득점으로, ‘힘’이 2배 적용된 피해를 입힙니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뒤후리기’ 기술에 성공하였습니다.]
[2점 득점으로, ‘힘’이 2.5배 적용된 피해를 입힙니다.]
“공격이 통한 건가?”
내 앞에 새겨지는 글씨들이 이나은의 스킬이 적중했다는 걸 알렸음에도 부대장은 한심하다는 듯 자신을 공격해오는 상대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게 다야?”
“왜, 왜, 왜! 대체 왜 공격이 안 통하는 건데!”
“겨우 이 정도면서 나한테 다시 찾아온 거야? 기회가 있을 때 도망쳤어야지, 멍청하네.”
부대장은 자신의 정면에서 뻗어오는 이나은의 주먹을 딱밤으로 쳐냈다. 그러자 이나은의 왼 주먹이 끔찍하게 뒤로 꺾였다.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없었는지 이나은은 그 자리에 쓰러진 채 비명을 질렀다.
“장비를 통한 물리적인 공격만 안 통하는 게 아니라 스킬까지 포함한 물리적인 공격 자체가 안 통한다고? 이화의 불, 얼음 모두 안 통하고 이나은의 공격까지 전혀 안 통하면….”
우리로선 이길 방법이 전혀 없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저 자식도 인간인 이상, 분명 뭔가 방법이….”
“나은아, 몸 숙이고 있어!”
이나은이 오른손으로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일어설 때, 뒤에서 엄청난 양의 얼음 더미가 쏟아졌다. 얼음 더미는 그대로 부대장의 상반신을 덮쳤다.
“그런 공격으론 안 돼요.”
“나도 그건 알고 있어.”
이화는 얼음 더미를 뿜어내는 우산을 양손으로 힘겹게 붙잡은 채 저편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얼음 더미로 타격을 입히는 건 못 해도 저렇게 헐벗었으니까 저체온증이나 동상 걸리게 한다면.”
“소용없어. 화상, 동상, 감전, 중독 같은 모든 상태 이상과 관련된 내성 특성은 갖춘 지 오래다. 이런 걸 두고 유비무환이라고 하지.”
[‘낮은 시선의 소유자’님이 포인트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음을 어필합니다.]
“방법을 생각해야….”
모든 물리적 타격 효과 없음.
스탯은 SS급.
모든 공격을 막는 동시에 살짝만 쳐도 엄청난 피해를 주는 사기캐.
“그런 데다가 모든 상태 이상 내성 특성까지 보유하고 있다니. 어?”
뭔가 걸린다.
“저자가 무슨 스킬을 갖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완전히 무적 상태로 만들어주는 건 아닌 건가? 상태 이상 내성 특성을 전부 샀다는 건, 물리적인 타격만 막아주고 그 외의 것은 막아주지 못한다는 거니까.”
이미 부대장이 모든 상태 이상 내성 특성을 보유한 이상 무적인 거나 다름없다는 게 문제긴 한데.
방법이 없는 건 아닌 것 같다.
“나은아, 시간만 벌어야 할 것 같지?”
“네. 두 번이나 상대하는데도 아직도 쓰러뜨릴 방법이 생각 안 나요. 신체의 강도를 극한으로 올린 건지 제 공격이 전혀 통하지도 않고.”
“그래. 그럼 시간만 벌다가 도망치는 거야.”
부대장을 상대하던 이화와 이나은이 뜬금없는 대화를 했다.
부대장은 어리둥절한 채 둘을 바라보았으나, 난 그 대화의 의미를 듣자마자 알아차렸다. 자기들이 시간을 벌 테니 난 도망치란 거다.
“하필 떠올린 방법을 지금 쓸 수 없어서….”
내가 떠올린 방법은 시간도 오래 걸릴뿐더러 저렇게 심하게 다친 두 사람이 실행에 옮기지도 못한다. 분하지만 이번엔 붙잡힌 동료들을 구출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부대장을 쓰러뜨리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굳이 여기서 무리하게 부대장을 쓰러뜨리려다가 두 사람이 더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