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선전포고(4)]
지금은 물러서는 게 낫다고 판단해 뒤쪽으로 빠져나왔다. 저 둘이 도망치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한시 빨리 여기서 벗어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이라니.
두 사람만 남겨두고 혼자서 편하게 도망치는 처지를 욕하며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실패했다는 사실부터 알려야겠지.”
부대장을 쓰러뜨리지 못해 여기서 도망치는 쪽으로 작전이 변경되었음을 알리고자 대합실로 달려가는데.
“뭐야?”
옥타곤이 보이질 않았다.
“그 큰 게 어디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적 헌터들을 밟지 않도록 주의하며 앞으로 나아가니, 옥타곤이 있던 자리에 뚫린 거대한 구멍이 보였다. 옥타곤은 그 구멍 아래에 가라앉아 있었다.
“갑자기 웬 싱크홀이?”
불길한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김화영과 김아람부터 찾았다. 차라리 여기서 무사히 도망쳐서 보이질 않길 바랐으나, 얼마 안 가 구멍 너머에서 쓰러져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그러나 송태섭이나 송지아 등의 다른 일행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송태섭 헌터가 붙잡힌 선수들 구출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왜 저 둘밖에 없는 거야?”
너무나 잘 보이는 곳에 눕혀져 있는 게 함정 같았지만, 두 사람을 이대로 놓아둘 순 없어 모습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을 믿고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별일은 없나.”
둘 앞에 섰는데도 주변에 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안심하고 서둘러 두 사람의 상태를 살폈으나,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두 사람 모두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이 어떻게 죽은 건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몸으로 김아람을 지키고자 한 건지 김화영의 등에는 창과 검 몇 자루가 꽂힌 상태였고, 김아람의 목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나 있었다.
“제길. 위험하면 굳이 버티지 말고 도망치라고 했는데….”
“그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여기 죽어 있는 거죠.”
그때, 뒤편의 깨진 유리 조각에서 강렬한 빛이 반사되더니 속삭임이 들려왔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니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모습 안 보이는 헌터님. 저도 ‘이면’에 있다가 모습 드러냈으니 그쪽도 공평하게 모습 보여주세요. 안 그러면.”
소녀는 탑승구 쪽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고속 열차 탑승구에선 한 소년이 송태섭과 송지아의 머리채를 붙잡고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저 두 사람도 죽일 거예요. 그건 싫죠?”
소녀가 싱긋 웃어 하는 수 없이 반지를 빼냈다.
“호오? 제 생각과는 다르게 생기셨네요. 다른 동료들이 당할 동안 헌터님께선 혼자 뭐 하고 계셨어요? 숨바꼭질?”
분한 표정이 맘에 들었는지 소녀는 손뼉을 짝짝 치며 주변을 산만하게 뛰어다녔다.
“이러다 구멍에 떨어지면 안 되지. 조심해야겠다.”
소녀는 구멍 아래를 바라보며 홀로 중얼거리더니 다시 내 앞으로 왔다.
“저 구멍 아래엔 엄청나게 큰 아가가 자고 있어요. 그 아가랑 같이 지하철 쪽에서부터 여기로 이어지는 큰 구멍을 파봤는데, 어때요? 깔끔하죠?”
“아가?”
“땅 파고 다니는 거대한 지렁이가 있거든요. 지하철 쪽에 누가 왔길래 홧김에 이곳에 불러 버렸어요.”
A급 괴수 ‘데스웜’을 말하는 건가. 빌딩 크기의 그 지렁이라면 이런 구멍을 팔 만하다.
“안타깝게도 이 두 사람은 구멍으로 떨어지지 않아서 다른 아가들을 보내서 직접 죽여야만 했어요. 너무 맘 아프죠?”
‘이면’이란 스킬을 쓰는 이 소녀는 괴수를 마구잡이로 소환할 수도 있나 보다.
“저 두 사람은 우리 오빠한테 스킬 하나 못 쓰고 있다가 당했고요. 웃기죠?”
‘이면’에 ‘스킬 반사’. 이 두 아이가 박 씨 남매였다.
주인장이 이야기해준 박씨 남매에 관한 소문대로 전투 능력이 전혀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냥 힘을 숨기고 있던 거였나.”
“맞다! 명령도 없었는데 스킬 썼다고 잔소리 듣긴 싫으니까 부대장님껜 비밀로 해주세요.”
부대장에게만 집중하고 박 씨 남매에겐 주의를 살짝 던 결과 이딴 일이 벌어졌다. 하필 지하철 쪽을 지키고 있던 게 박 씨 남매였다니.
“어쨌든! 여기까지 오셨는데 숨바꼭질만 하셔선 안 되죠. 제 아가랑 잠깐만 놀아주세요. 그러면 저 두 사람 살려줄지 고민해볼게요.”
소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구멍 아래로 날 밀었다. 소녀의 몸과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힘에 난 저항도 못 하고 구멍 아래로 떨어졌다.
“컥.”
허우적대며 떨어지다 다리가 먼저 옥타곤 천장에 부딪혔다. 모든 충격을 받아낸 다리는 기이한 형태로 꺾였다.
“얼마 전에 외출하고 와서 귀여운 아가들이 많거든요! 그중 가장 귀여운 아가는 이 아가예요!”
소녀가 구멍에 대고 외치며 내 옆에 무언갈 떨어뜨렸다.
“유리 조각?”
소녀가 떨어뜨린 유리 조각에 비추던 내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강렬한 빛이 반사되었다. 순간 뿜어져 나온 빛에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내 앞엔 거대한 괴수가 있었다.
[SSS급 괴수 ‘레비아탄’이 등장합니다.]
“레비아탄….”
비좁은 공간이 불편했는지 끔찍한 괴성을 내지르는 악어, ‘레비아탄’은 온몸의 돌기에 달린 눈을 떴다.
[플레이어 ‘정현’이 ‘레비아탄’과 눈을 마주쳤습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공포에 잠식됩니다.]
‘레비아탄’이 거대한 입을 쫙 벌리고, 그 입이 다물어졌을 때. 난 이성을 잃었다.
[플레이어 ‘정현’이 ‘레비아탄’의 시선에서 벗어났습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공포에서 벗어납니다.]
다시 정신이 들자, 옥타곤을 씹어먹고 있는 ‘레비아탄’의 모습부터 보였다. 괴수는 나한테 흥미를 잃었는지, 돌기에 달린 눈을 감은 채 옥타곤을 먹는 데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도망칠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고 생각해 일어서려는데, 이상하게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윽.”
하반신을 바라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른 다리는 아까의 충격으로 기이하게 꺾인 상태였고, 왼 다리는 반쯤 ‘레비아탄’에게 씹어 먹힌 상태였다.
“끝났네.”
외통수다. 이럴 때마다 드는 직업의 제약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으며 ‘레비아탄’이 숨을 끊어주길 기다리는 것 외에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젠 직접 이유라도 듣고 싶네. 왜 나한테 이런 직업을 준 건지.”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낄낄대며 웃습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꺾인 다리를 가리키며 1 포인트를 플레이어 ‘정현’에게 후원합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옆으로 누운 채 8 포인트를 플레이어 ‘정현’에게 후원합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족발을 뜯으며 11 포인트를 플레이어 ‘정현’에게 후원합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본인과 대화하고 싶으면 포인트나 효율적으로 쓰라고 조언하며 0 포인트를 플레이어 ‘정현’에게 후원합니다.]
[‘빛나는 눈의 전략가’님이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의 악취미에 분노합니다.]
고작 20 포인트 후원해놓고 본인과 대화하려면 이걸 효율적으로 쓰라고?
“1 포인트. 8 포인트. 11 포인트. 0 포인트. 이걸로 뭘 어쩌라고. 상점에서 살 수 있는 것도 없는데, 왜 지난번처럼 이딴 식으로 포인트를 후원해서….”
지난번하고 같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전속 계약을 기린다고 포인트를 후원했을 때도 딱 저 숫자였던 것 같다. 그리고 옆으로 누워서 8 포인트를 후원한 것까지 똑같다.
“뭔가 의미가 있는 건가? 옆으로 누운 채 8 포인트?”
20 포인트를 저런 식으로 나누어 두 번씩이나 후원한 게 단순히 미친 짓만은 아닌 것 같아 생각에 잠겼다.
옆으로 누워서 8 포인트를 후원. 옆으로 누워서. 8을 옆으로 눕힌다. 그러면 ∞.
1, ∞, 11, 0. 이걸로 뭘 어쩌라는 거지?
∞가 무한대를 뜻하는 게 아닌가? 그게 아니라 그냥 0 두 개를 옆으로 나란히 붙인 거라면.
1, 00, 11, 0.
“…설마. 정신 나가서 이딴 식으로 후원한 게 아니었다고?”
혹시나 해서 머릿속 어딘가에 있던 모스부호 관련된 지식을 끄집어냈다. 어렸을 적 머리 쓰는 걸 좋아했던 이화랑 모스부호로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있기에 저 정도 해석은 금방 해낼 수 있었다.
저 숫자들을 알파벳으로 바꾸어보면.
1이 ‘T’.
00이 ‘I’.
11이 ‘M’.
0이 ‘E’.
‘T’, ‘I’, ‘M’, ‘E’.
“TIME. 시간?”
시간과 연관된 신이라는 뜻인가? 시간과 연관된 신이 누가 있지? ‘크로노스’? 그 외에 생각나는 신은 딱히 없는데.
“크로노스?”
조심스레 이름을 언급해보았으나,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어깨를 으쓱합니다.]
“망할 자식! 이런 상황에서도 놀리는 거였냐!”
욕설에 ‘레비아탄’의 시선이 끌렸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손을 흔들며 배웅합니다.]
‘레비아탄’의 입은 이번엔 내 머리 쪽을 향해 쩍 벌어졌다.
[죽음의 경계로 이동합니다.]
***
눈을 뜨자, 무기고가 보였다.
“이번 귀환 지점은 여긴가.”
죽음을 되짚어보니 화부터 치밀어 올랐다.
“망할 자식.”
이상한 직업을 줄 때부터 알아봤는데, 죽음 직전까지 장난감 취급이나 하고.
「그 덕분에 자네가 여태껏 살아남은 건데,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깜짝이야!”
갑자기 저 멀리서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주변 모든 풍경에 금이 갔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모든 풍경이 산산조각이 나며 무너져 내리더니 결국 완전한 어둠이 닥쳤다.
「자네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무척 놀라 했던 게 기억나서 이번엔 귀환한 것처럼 주변 풍경을 꾸며봤다만. 맘에 안 들었나?」
“초월자가 만든 공간 속이었나. 그럼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 크로노스가 맞았던 거야?”
「그 친구는 자네에게 전혀 존중받지 못하나 보군. 나름 초월잔데 이런 취급을 받을 줄이야.」
“네가 나한테 지금껏 해온 걸 생각하면!”
「진정하게나. 이 몸은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가 아니라네. 그 친구와 잘 아는 사이이긴 하다만.」
“뭐야, 그럼 난 왜 여기에….”
「이 몸의 이름은 ‘크로노스’. 본래 농업을 관장하는 신이지만, 이 지구에서는 시간을 관장하는 신으로 더 널리 알려져 시간을 다루는 힘을 쓰고 있다네. 그래 봤자 죽음의 경계에 갇힌 처지지만.」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가 본인 이름이 아닌 다른 초월자의 이름을 알려준 건가.”
「그야 ‘이름 없는 자’라는 이명을 쓰는 이 몸이 직접 부탁했으니까.」
“‘이름 없는 자’라면 맨 처음 죽었을 때 나한테 포인트를 후원한….”
「기억하고 있다니 보람이 있구먼. 본래 거기에선 죽지 않았어야 했는데, 멍청하게 죽음을 맞이했길래 그만 포인트를 후원하고 말았다네.」
“가, 감사합니다.”
「속으론 초월자에 대한 존중이 하나도 없으면서, 어울리지도 않는 존칭은 사용하지 말게나. 이전처럼 편하게 대해도 된다네. 어차피 이곳엔 자네와 이 몸밖에 없으니.」
“그럼 편하게 대하라고 하셨으니 존칭은 안 쓰겠습니다. 저는, 아니 난 죽었을 텐데 어떻게 이 공간에 있는 거지?”
「자네가 참으로 신기한 처지에 있어서 가능했다네.」
「지상의 상황을 살피고자 만든 괴수인 ‘불사조’를 먹어 치우더니, 운 좋게 이 몸이 ‘불사조’에게 부여한 특성인 ‘CONTINUE?’를 귀속 받은 탓에 자네는 죽음의 경계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거든.」
「덕분에 ‘죽음 직후, 귀환 직전’에 놓인 자네를 여기로 초대할 수 있었지. 이 설명만 벌써 두 번째 반복하는데, 같은 말을 하는 건 그다지 이 몸에겐 맞지 않는 듯하군.」
‘크로노스’가 하는 모든 말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내 특성 ‘CONTINUE?’는 저자가 부여한 거나 다름없다는 것만은 이해했다.
「그나저나 자네에게 요리사 직업을 준 친구를 너무 미워하진 말게나.」
“그 직업 때문에 스탯이 0이 돼서 지금까지 수십 번 죽은 걸 생각하면!”
「아니, 반대지. 그 덕분에 자네가 지금까지 수십 번 되살아날 수 있었던 거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