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87화 (88/168)

[15. 선전포고(5)]

“무슨 소리야? 내가 살아난 건 전부 ‘CONTINUE?’ 특성 때문인데. 그쪽 덕분에 수십 번 되살아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거면 몰라도, 그 자식 덕분이란 말은 듣기 좀 그러네.”

「이 몸의 말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았네. 모든 스탯이 0이 아니었다면, 자네의 존재는 인과율에 의해 이미 소멸했을 터.」

「모든 스탯이 0인 하찮은 존재이기에 귀환하더라도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고 판단해 인과율이 자네를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거라네.」

「물론 이 몸이 이렇게 말해봤자 자네는 그 친구를 계속 싫어하겠지만, 진실은 그렇다네.」

인과율이란 게 대체 뭐길래?

「이 세계가 돌아가게끔 만드는 장치지. 이번 만남에서 더 이야기할 주제는 아닌 것 같군. 곧 자네가 떠날 시간이거든.」

“떠날 시간?”

「마지막으로 우리의 오랜 친구에게 전해줬으면 하는 말은 없나?」

우리의 오랜 친구라면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를 말하는 거겠지.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가 들어줬으면 하는 게 몇 가지 있긴 하다. 다만, 정신 나간 그 초월자가 내 부탁을 곧이곧대로 들어줄지가 문제라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만 하는 상태였다.

“우리의 오랜 친구라 부르진 마. 그쪽의 오랜 친구일지는 몰라도 나한텐 아니니까. 어쨌든 지금은 딱히 전할 말 없어. 아니, 하나 있다. 이제 나랑 좀 안 엮였으면 좋겠다고 전해줘.”

초월자는 크게 웃으며 물었다.

「정말 그거면 되겠나? 꿍꿍이로 가득 찬 자네 속내에 있는 말은 그게 아닐 텐데? 실험실을 무너뜨리는데 필요한 카드라고 생각하면서도 쓰지는 않으려는 건가?」

“그걸 네가 어떻게?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내 생각이라도 읽을 수 있는 거야?”

「자네가 속에 감춰둔 말은 전해주도록 하겠네.」

「걱정하진 말게나. 이번 죽음까지 벗어나는 걸 보고 나면 그 친구도 자네의 부탁을 순순히 들어줄 수밖에 없을 거라네.」

「그것이 우리의 약속이니.」

「그럼 다음에 더 긴 이야기를 나누어보자고.」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거냐니까?”

“어? 네 생각?”

눈앞에 당혹스러워하는 송태섭이 있다.

“왜 송태섭 헌터가….”

“장비 가져오라며. 나야말로 묻고 싶다. 네 생각을 읽을 수 있냐니? 무슨 말이야?”

“정현 헌터님, 무슨 일이에요?”

주변을 둘러보니 장비를 집던 김아람을 비롯한 일행들이 일제히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음 직후, 귀환 직전에 놓였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곧 떠날 시간이라더니 ‘CONTINUE?’ 특성으로 귀환한 시점으로 온 것 같다. 다들 서재에 진열된 장비를 옮기는 걸 보니 이번 귀환 시점은 무기고의 장비들을 ‘특급 냉장고’에 넣을 때, 작전 시작 직전이다.

“전 신경 쓰지 마세요. 잠깐 넋을 놨었어요.”

별안간 초월자가 만든 공간에서 내쳐져 귀환한 탓에 송태섭에게 뜬금없이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냐고 윽박지른 꼴이 되었다. 내가 본인이었어도 당황스러울 법하다.

“잠깐 넋을 놓은 사람이 할 법한 대사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전 정말 괜찮아요. 괜찮은데….”

초월자와의 대화에 그만 본 목적을 놓칠 뻔했다. 이대로 장비를 다 옮기면 바로 작전에 나서게 된다. 그래서야 귀환한 의미가 없다.

“저희 작전 좀 변경해도 될까요?”

“갑자기 작전을 변경한다고? 최종 점검까지 다 끝나서 장비만 오빠 특성으로 챙기고 나면 바로 출발하기로 했잖아. 혹시 작전에 문제라도 있는 거야?”

지난번 작전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박 씨 남매와 아무런 공격이 통하지 않던 부대장, 이 세 사람 때문.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세 사람을 돌파하는 게 필수적이다.

부대장을 돌파할 방법은 지난 싸움을 지켜보면서 대충 그려뒀으니, 남은 건 박 씨 남매의 귀찮은 능력을 상대할 방법인데. ‘스킬 반사’, ‘이면’, ‘괴수 소환’, ‘데스웜’, ‘레비아탄’. 그것들을 상대하려면.

“내가 지하철 쪽으로 가야 해.”

“오빠가?”

“이대로 작전에 나서면 너랑 이나은 헌터가 나 때문에 부대장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할 거야.”

“그건 그렇지. 아무리 오빠가 멀리 떨어져서 지켜본다고 해도 안전한지 계속 신경 쓰일 테니까. 범위가 큰 공격도 맘껏 못 할 테고.”

“그러니까 너희가 부대장과의 싸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인원 배치를 바꾸는 게 나을 것 같아.”

‘CONTINUE?’ 특성과 엮여 언급할 수 없는 내용을 배제한 채 인원 배치를 바꾸는 이유를 설명했는데, 다행히 다들 어느 정도 받아들인 것 같다.

“그렇게만 바꾸면 작전 변경은 끝나는 건가요?”

“그건 아니야.”

“그러면 또 어떻게 바뀌는 거예요?”

질문을 던진 이나은은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을 보아하니 이번에도 뭔가 떠올렸다고 기대하는 듯하다. 그건 김화영 역시 마찬가지.

“나도 궁금하니까 빨리 말해줘. 현이가 이렇게 갑자기 작전 바꾼다고 하면 항상 재밌는 일 생겼으니까 이번에도 기대하고 들을게.”

“구출팀은….”

작전이 실행되었을 때, 박 씨 남매는 이유는 몰라도 지하철 쪽에서 나왔었다. 그러니 그 둘을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을 구출팀에 배치하는 게 맞다.

“저랑 김화영 헌터, 그리고 송지아 헌터예요.”

“나?”

“네. 김화영 헌터랑 송지아 헌터가 지하철 쪽에 있는 헌터 상대로 시간 끌어주는 동안, 제가 반지 끼고 붙잡힌 선수들을 풀어줄 거예요.”

“정현 헌터가 모습을 감추고 움직이면 확실히 시간 단축되긴 하겠네요. 송태섭 헌터 대신 김화영 헌터랑 가는 이유도 그래서예요?”

“어. 장비도 가볍고 민첩 스탯도 더 높으니까 좀 더 빠르게 지하철까지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설명을 들었음에도 김화영은 여전히 자신을 구출팀으로 바꾸었다는 점이 의문이었던 듯 그 이유를 물었다.

“정말 내가 가도 괜찮은 거야?”

“괜찮은 정도가 아니죠. 작전이 제대로 진행되려면 김화영 헌터가 지하철 쪽으로 가야만 해요.”

“가야만 한다, 이거지? 또 내가 해야 할 재미난 일이 있나 보네. 알았어, 지금 이야기 안 해줄 거면 이따가 해줘.”

김화영은 만족했다는 듯 미소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럼 아람이랑 같이 가는 사람은 태섭이인 거야?”

“네.”

장비가 없는 선수들뿐이라면 송태섭과 김아람, 둘 조합으로도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다.

“교란팀 두 분, 옥타곤 안으론 절대 들어가지 마세요. 거기 들어갔다가 포위당할 수도 있거든요.”

“알겠어.”

옥타곤 밑, ‘데스웜’이 팔 구덩이에 빠지지 않도록 간접적으로 경고도 했으니 남은 건 부대장 쪽.

“마지막으로 이화랑 이나은 헌터는 부대장 상대로 시간만 벌다가 내가 신호를 주면 옥타곤 쪽으로 도망쳐.”

“쓰러뜨리는 게 아니라 도망치라고요?”

“물리적인 타격뿐만 아니라 화상마저도 부대장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면 상대할 방법이 없는 거잖아.”

“지금으로선 그런 셈이죠.”

기존 작전을 짤 땐, 물리적인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화가 화상을 입히는 쪽으로 전투 방향을 잡았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그 방향을 고집할 수는 없다.

“그 자식을 쓰러뜨리려면 두 사람의 힘으론 부족할 거야.”

“S급 헌터인 우리 둘로도 안 되면 무슨 수로 부대장을 쓰러뜨리려고? 오빠 말은 일행만 구하고 도망치자는 거야?”

“아니. 두 사람으론 안 되니까 아래층에 다 함께 모인 다음에 힘 합쳐서 쓰러뜨려야지.”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걸 보니, 뭔가 방법이 떠오르셨나 보네요.”

“어. 밑에서 부대장 쓰러뜨릴 준비 마치고 신호 줄 테니까, 그 신호 따라서 옥타곤 쪽으로 부대장 유인 좀 해줘.”

“알겠어요. 도망치는 척하면서 유인해볼게요. 다만, 저희끼리 최대 화력으로 공격해도 통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예요.”

“좋아. 작전 변경은 여기까지. 그럼 나머지 장비 남김없이 모두 챙기고 바로 출발하자.”

다행히 다들 인원 변경에 관해 더 묻지 않고 무기고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 사실을 감사히 여기며 서둘러 상점에서 내가 살 수 있는 특성과 스킬을 확인했다. 그러던 중, 내가 찾던 특성이 보이자마자 포인트 따지지 않고 바로 구매했다.

[‘공포 내성’ 특성이 귀속됩니다.]

이로써 작전에 돌입할 마무리 작업까지 끝냈다.

“남은 건 내가 배운 걸 잘 써먹느냐인가.”

“노량진 쪽으로 이어진 1호선 철도를 따라 걷다 보면 붙잡힌 선수들이 갇혀 있는 지하철이 나와요. 그런데 1호선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통로가 완전히 무너져서 거기에 가려면 고속철도 승강장 쪽으로 먼저 가야 해요. 그쪽에 1호선 승강장하고 이어진 연결통로가 있거든요.”

용산역은 다양한 노선이 지나가던 곳이라 개찰구를 넘은 이후부터 송지아의 길 안내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잔해로 뒤덮여 미로처럼 변한 승강장 속에서도 막힘 없이 길을 찾아냈다.

“송지아 헌터만 믿고 따라갈게요. 그나저나 김화영 헌터,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묻고 싶은 거? 뭔데?”

“전에 야구경기장에서 있었던 일 기억하세요?”

“야구경기장? 어떤 일? 워낙에 거기서 일이 많았어야지.”

“이상한 포즈 취하기 싫다고 생각하니까 계약이 없던 걸로 된 거요.”

‘계약이 이행된다면 김화영 헌터도 몸이 굳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이상한 포즈 취하기 싫다고 생각하니까 계약이 없던 걸로 되던데?’

당시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물으니 김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거! 당연히 기억하지.”

“혹시 스킬을 무효로 할 수 있는 특성이나 스킬을 지니고 계신 거예요?”

“그건 왜?”

“김화영 헌터가 상대방의 스킬을 무효로 할 수 있다면, 박 씨 남매를 상대하기 수월할 것 같아서요.”

“그렇구나. 어…. 나도 저번에 그 일이 있고 나서 그런 스킬이나 특성이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봤거든. 그래서 알게 됐는데, ‘나를 대상으로 하는 스킬’ 중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 스킬’을 무효로 할 수 있는 스킬이 있더라고.”

예상은 했었는데 정말로 스킬 무효화까지 쓸 수 있었다니. 이런 사람이 나랑 같은 일행이라 다행이다.

“근데 그런 스킬이 있으시면서 ‘이면’엔 왜 갇혔던 거예요?”

“방금 네가 말해줘서 그런 스킬이 있다는 게 떠올랐어.”

아, 본인에게 그런 스킬이 있다는 것을 까먹고 있던 건가.

“한 번에 몇 개까지 무효로 할 수 있어요?”

“하루에 스킬 한 종류.”

그러면 계획대로 김화영에겐 오빠 쪽 상대를 맡길 수 있다.

“이제 곧 박 씨 남매를 만나게 될 거거든요. 그 둘을 마주하면 김화영 헌터가 남자 쪽을 맡아주세요. 스킬 반사하는 걸 무효로 하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예요.”

“그게 날 구출팀에 배치한 이유였구나. 그럼 다른 한 명은 어떻게 해?”

“그쪽은 제가 맡을 거예요.”

그때 가까이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누굴 맡는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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