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선전포고(6)]
이윽고 깨진 스크린도어 조각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저를 상대하겠다는 헌터님.”
“등장 패턴은 그대로네.”
빛을 뿜어낸 게 유리 조각에서 스크린도어 조각으로 바뀌었을 뿐. 강렬한 빛 이후 등장해서 인사부터 하는 것까지. 첫 만남 때와 같은 패턴이다.
덕분에 ‘이면’이란 공간과 엮인 그녀의 스킬이 어떠한 원리로 작동하는 건지 대충 알 것 같다.
“김화영 헌터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한 게 얼추 맞았었네요.”
“응?”
“‘이면’이 어떤 곳인지 알 것 같아서요.”
땅에 널브러진 또 다른 스크린도어 조각을 집으며 눈치를 살피니 소녀는 살짝 당황한 듯 보였다.
“저를 상대하겠다는 헌터님, ‘이면’이 어떤 곳인지 알 것 같다고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이거랑 관련된 곳 아니야?”
스크린도어 조각을 살짝 흔들자 소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소녀는 표정에 자신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걸 감추지 못했다.
소녀의 표정으로 ‘이면’에 대한 내 생각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으니, 굳이 반응을 더 살필 필욘 없겠다.
그럼 ‘이면’의 비밀도 눈치챘겠다, ‘데스웜’이 나오기 전에 김화영과 송지아부터 1호선 승강장 쪽으로 보내볼까.
“송지아 헌터, 김화영 헌터 데리고 붙잡힌 선수들이 있는 곳으로 가주세요.”
“네? 그럼 정현 헌터는요?”
“조금 전에 말했듯이 저 여자아이 상대하고 있어야죠.”
“정말 현이 네가 맡으려고? 혼자서 괜찮겠어?”
“당연하죠. 김화영 헌터한테 싸우는 법 배웠는데, 이런 데서라도 써먹어야죠.”
“고작 하루 배운 걸로? 물론 내가 가르치는 데에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현이는 스탯도 낮은데….”
김화영은 가르친 보람이 있다고 뿌듯해하면서도 내심 걱정되는지 자리를 비켜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긴 나 같아도 항상 뒤에서 보호받던 사람이 고작 하루 검 휘두르는 법 배웠다고 헌터와 맞붙겠다고 나서면 걱정되긴 할 거 같다. 재료 손질 하루 해보고 메인 요리하겠다고 나서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하지만 저 소녀를 내가 맡지 않으면 모든 작전이 틀어지게 된다.
“두 분이 여기 붙잡혀 있으면 작전 전부 틀어져요. 애당초 제가 저 애 상대하려고 구출팀으로 온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1호선 승강장 쪽으로 가주세요. 붙잡힌 일행들을 서둘러 풀어줘야 부대장까지 쓰러뜨릴 수 있어요.”
무엇보다 두 사람이 여기 남아 있을수록 내가 얕잡아 보이게 된다. 소녀를 상대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내가 상당히 강한 헌터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 여기선 동료들을 먼저 보내고 홀로 남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소녀에게 어필할 필요가 있다.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까 또 신기한 거 준비했나 보네. 지아야, 가자.”
“정말 정현 헌터만 남겨두려고요?”
“응. 현이가 저렇게까지 말하면 혼자서도 괜찮다는 거거든. 현아, 이따 보자.”
가도 된다고 두 번이나 강조하자 김화영은 송지아를 끌고 저 앞에 보이는 연결통로로 향했다. 연결통로를 지난 이후 지하철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고 했으니 김화영이 박 씨 남매 중 오빠 쪽을 잘 맡아주기만 한다면 작전에 지장은 없을 거다.
“저 여자애가 내 생각대로 움직여 준다면 말이지.”
다행히 두 사람이 연결통로로 뛰어가는데도 소녀는 나를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응시할 뿐, 두 사람을 쫓으려고 하지 않았다.
“정말 저를 홀로 상대할 생각이신가 보네요.”
“그래야 시간 낭비가 없거든.”
“자신만만하시네요.”
소녀는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다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제가 이래서 맨날 말한 거예요.”
“말하다니? 어떤 걸?”
“직접 싸우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얕잡아 본다고요. 부대장님의 명령 없인 전투에 나서지 못하니까 저랑 오빠가 전투 능력이 없는 비전투원이라는 헛소문이 도는 거 아니겠어요?”
나를 상대할 마음이 들었는지 소녀는 나름 진지한 눈빛을 지었다.
“부대장님도 정말 과보호라니까요. 그래도 제가 그쪽 정도 되는 헌터를 홀로 쓰러뜨린다면, 부대장님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죠. 부대장님 생각이 틀렸다는 걸요. 그러면 저도 명령 없이 전투에 나설 수 있게 되고, 헛소문도 금방 사라지겠죠?”
‘그쪽 정도 되는 헌터’라고 말한 걸 보니 나름 강한 헌터로 여겨진 듯하다. 강이란이 자신의 부하에게 내가 F급 헌터임을 알리지 않았다는 데에 건 베팅이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있잖아요. 저 위에 너무 시끄럽지 않아요? 혹시 누구 더 데려오셨어요?”
소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뒤쪽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데스웜’인가?”
몸을 앞쪽으로 던지니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에서 거대한 갈색 기둥이 튀어나왔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데스웜’의 몸통은 끊임없이 오므렸다 펴지며 엄청난 진동을 일으켰다. ‘이면’에서 튀어나오자마자 대합실로 이어지는 구멍을 파는 듯하다.
“이러면 조용해질까요? 밤에 시끄러우면 부대장님께 혼난단 말이에요. 으- 또 속담 한 시간 동안 받아적게 시킬 거 생각하면 너무 끔찍해요.”
“위쪽엔 신경 쓰지 마. 지금은 나랑 둘이 놀아야지.”
궁중 식도를 장비하며 말하자 소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꺄르르 웃었다.
“좋아요. 뭐 하고 놀지? 아!”
소녀의 웃음소리가 끝나는 순간, 사방에 널브러진 스크린도어 조각에서 일제히 빛이 뿜어져 나왔다. 강렬한 빛에 눈을 감았다가 뜨니 바닥부터 천장에 이르는 모든 공간이 일렁이고 있었다.
“여기가 ‘이면’인가 보네.”
“예쁘죠? 여기서 저 대신 제 아가들하고 놀아주시면 돼요. 어때요? 재미있겠죠?”
“뭐? 그럼 넌?”
“전 직접 노는 것보다 지켜보는 걸 더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그쪽이 저보다 스탯이 높을 수도 있는데 함부로 싸워줄 순 없죠.”
뒤로 한 발짝 물러선 소녀의 몸은 바닥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아가들하고 놀아달라는 건 본인이 붙잡아 둔 괴수랑 싸우라는 의미겠지.”
소녀의 스탯이 어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정도는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김화영에게 단검 다루는 법을 조금 배웠다곤 해도 내가 F급 헌터란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를 잘 알고 있기에 소녀랑 직접 싸울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처음부터 내가 노렸던 대상은 소녀가 ‘이면’에 가두어둔 괴수들.
소녀가 괴수를 내보내게 만들 방법은 간단했다. 난 강하다는 인식을 소녀에게 심어주는 것이다. SSS급 괴수 ‘레비아탄’도 잡아두고 있는 마당에 본인이 직접 상대하기 힘들 정도의 헌터가 나타나면 괴수를 대신 내보낼 것은 뻔했다.
예상대로 소녀는 본인이 직접 나서는 대신 괴수를 내보내는 걸 선택했다.
[C급 괴수 ‘트롤’이 등장합니다.]
즉, 지금 저 멍청하게 생긴 괴수와 마주하고 있는 상황은 전부 내가 원했던 대로라는 거다.
“시간 없으니 바로 시작해볼까.”
[‘??? ???? ??’ 장비로 인해 플레이어 ‘정현’이 ‘은신’ 상태가 됩니다.]
반지를 껴 모습을 감추자 ‘트롤’은 침을 질질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거대한 주먹으로 천장을 치기 시작했다. ‘파괴 불가’ 속성이라도 부여된 건지 ‘트롤’의 거대한 주먹에도 일렁이는 천장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데스웜’이 판 구멍도 사라졌네. 고속철도 승강장 전체를 ‘이면’으로 옮겨온 것은 아닌 건가?”
의문은 어찌 되었든 눈앞의 ‘트롤’을 쓰러뜨리는 게 우선이다.
[‘방구석 만화가’님이 당신의 움직임을 기록합니다.]
[‘빛나는 눈의 전략가’님이 당신의 용기가 무모한지 가늠합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오랜 친구가 주먹에 짓이겨진 모습을 기대합니다.]
“오랜 친구는 무슨.”
새겨지는 글씨를 애써 무시하며 천천히 ‘트롤’ 쪽으로 향했다. 내 키의 세 배 정도 되는 ‘트롤’은 여전히 천장을 주먹으로 치는 데에 열중하고 있었다.
“‘트롤’의 약점은 발목 부근이라고 했지.”
이화에게 주워들은 ‘트롤’의 약점을 상기하며 하체를 살폈다. 근육을 전부 팔 쪽에 몰아준 건지 거대한 몸통을 지탱하는 ‘트롤’의 다리는 얄팍하기 그지없었다. 발목을 자르면 균형을 잃고 그대로 쓰러지고 말 것이다.
“발목을 잘라 쓰러뜨리고. 그다음에 심장에 식도를 찔러 넣어 숨통을 끊으면 되겠지.”
‘트롤’을 쓰러뜨릴 계획을 세우자마자 실행에 옮겼다.
지능이 낮은 탓인지 ‘트롤’은 내가 가까이 접근하는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관건은 궁중 식도로 ‘트롤’의 피부를 뚫고 발목을 자를 수 있느냐는 건데.”
걱정이 무색하게 내가 휘두른 식도는 너무나 깔끔하게 ‘트롤’의 발목을 잘랐다.
“끼이이-!”
칠판 긁는 듯한 소리를 내지르며 ‘트롤’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트롤’이 쓰러지자마자 몸통 위에 올라타 식도를 심장 부근에 찔러 넣었다. 이번에도 ‘트롤’의 피부를 간단히 뚫은 식도를 비틀자 녹색 피가 뿜어져 나왔다.
[C급 괴수 ‘트롤’를 퇴치하였습니다.]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차등 배분됩니다.]
[2,000 포인트를 지급받습니다.]
[‘특급 냉장고’에 ‘트롤의 가죽’이 보관됩니다.]
“되긴 되는구나.”
모든 괴수가 식자재 취급되는 ‘이상식욕자’ 특성과 모든 식자재를 벨 수 있는 ‘대장금의 궁중 식도’. 0인 스탯으로도 모든 괴수를 벨 수 있게 만들어주는 조합이다. 그 사실을 알고 ‘트롤’을 상대한 거였지만, 실제로 괴수를 쓰러뜨리고 나니 기분이 묘하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당신이 멀쩡히 살아남은 데에 실망합니다.]
[‘빛나는 눈의 전략가’님이 지혜에 깃댄 당신의 용기에 감탄하며 1,000 포인트를 후원합니다.]
“다음 상대는 누구야?”
‘트롤’의 몸에서 식도를 뽑고 기다리니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정도 아가로는 전혀 상대가 안 되는구나. 저를 상대하겠다고 말한 이유가 있었네요. 그러면 좀 더 강한 아가랑 놀아볼래요?”
다시 사방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강렬한 빛이 잦아들었을 때, 주변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여긴 또 어디야?”
일렁거리는 주변 풍경을 둘러보니 표지판 하나가 보였다. 표지판에 적힌 도로명 주소가 맞는다면 이곳은 마포와 용산 사이 어느 길거리인 것 같다.
“용산역으로 오는 길에 만난 아가들이 몇 있거든요. 이번엔 그 아가들하고 놀아주세요.”
어떻게 해야 마포에서 용산역까지 그렇게 빨리 이동할 수 있는지 궁금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길을 가다 만난 괴수마다 ‘이면’에 집어넣은 거다.
“그 스킬 진짜 편해 보이네.”
“그럴까요?”
소녀는 애매하다고 중얼거리다 말 돌리지 말라고 외쳤다.
“지금 중요한 건 그쪽이 아가들이랑 놀아주는 거예요.”
[A급 괴수 ‘스켈레톤’이 등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