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89화 (90/168)

[15. 선전포고(7)]

A급 괴수 ‘스켈레톤’. 인간의 뼈가 살아 움직이는 모양새의 괴수. 특징은 검, 창, 활 등 개체마다 각기 다른 무기를 장비하고 있는 것. 약점은 뼈와 뼈 사이의 이음새. 퇴치 방법, 기척을 죽이고 접근해 두개골과 갈비뼈를 잇는 목뼈 부위의 이음새를 ‘궁중 식도’로 절단한다.

청각과 후각을 상실해 시력에만 의존하는 존재인 ‘스켈레톤’의 후미로 접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양손으로 기다란 창을 들고 있는 ‘스켈레톤’은 내가 바로 뒤에 서 있는데도 뼈를 덜그럭거리며 그저 앞을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뼈마디라는 명확한 약점이 있음에도 ‘스켈레톤’이 A급 괴수인 이유는 헌터에 버금가는 뛰어난 전투력과 낮은 힘 스탯으론 금 하나 가지 않는 뼈의 강도 때문. 워낙 뼈가 튼튼한 탓에 B급 헌터 정도의 힘 스탯으로는 뼈마디를 정확히 가격하더라도 전혀 피해를 줄 수 없다고 들었다. 다시 말해 약점을 알더라도 A급 헌터는 되어야 그 방법을 써먹을 수 있다는 거다. 물론 ‘이상식욕자’ 특성과 ‘대장금의 궁중 식도’를 갖춘 내 앞에선 아무 소용 없는 이야기지만.

‘스켈레톤’도 괴수인 이상 ‘궁중 식도’에 베이지 않는 일은 없었다.

‘궁중 식도’를 휘두르자 덜그럭 소리와 함께 두개골이 내 발밑에 떨어졌다.

[A급 괴수 ‘스켈레톤’을 퇴치하였습니다.]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차등 배분됩니다.]

[5만 포인트를 지급받습니다.]

[‘특급 냉장고’에 ‘스켈레톤의 뼛조각’이 보관됩니다.]

“같이 놀기에 이 친구는 나랑 잘 안 맞는 거 같은데? 다음.”

“혼자 숨바꼭질하시니까 그러죠!”

강렬한 빛 이후 장소가 바뀌었다. 마포와 용산 사이 어딘가에 있는 거리라는 점은 그대로였으나 길은 이전처럼 일직선으로 뻗어 있지 않고 왼쪽으로 꺾여 있었다.

[E급 괴수 ‘멘레이키’가 등장합니다.]

E급 괴수 ‘멘레이키’.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가면 형태의 괴수. 특징은 사람의 얼굴에 달라붙어 기생한다는 것. 약점은 기생하고 있는 사람이 헌터가 아닌 일반인이라는 점. 퇴치 방법, 정면 승부.

‘멘레이키’가 기생하고 있는 대상이 스탯이 존재하지 않는 일반인인 이상, 전투에서는 내가 더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난 모습이 안 보이는 데다가 무기를 장비하고 있으니까.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기괴한 표정의 가면을 바라보며 정면에서 달려들었다. 달려드는 와중 돌멩이를 찬 소리를 들었는지 ‘멘레이키’는 한 발짝 물러서 첫 공격을 피했으나, ‘좀비’처럼 느린 움직임 탓에 다음 공격은 피하지 못했다.

내가 휘두른 식도는 가면을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E급 괴수 ‘멘레이키’를 퇴치하였습니다.]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차등 배분됩니다.]

[500 포인트를 지급받습니다.]

“너무 쉬운 상대잖아. 다음.”

“실수였어요. 원래는 이 아가가 있는 곳으로 보내려고 했거든요.”

[B급 괴수 ‘라미아’가 등장합니다.]

B급 괴수 ‘라미아’. 인간의 상반신에 뱀의 하반신을 붙여놓은 괴수. 특징은 열 살 아래의 아이들을 산 채로 잡아먹기를 즐긴다는 것. 김요한 세력의 주둔지에서 지낼 때도 ‘라미아’에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부모를 종종 보곤 했다. 약점은 일정 시간마다 두 눈을 빼고 숙면에 빠진다는 점. 퇴치 방법, 두 눈을 빼고 숙면에 취할 때를 노려 목을 벤다.

[B급 괴수 ‘라미아’를 퇴치하였습니다.]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차등 배분됩니다.]

[1만 포인트를 지급받습니다.]

“다음.”

“계속 모습을 감추고 숨어계시니까 안 되겠네요. 이번엔 냄새를 잘 맡는 아가이니까 쉽지 않을 거예요.”

[B급 괴수 ‘검수’가 등장합니다.]

B급 괴수 ‘검수’. ‘검수 수프’ 레시피 덕분에 몸에 손을 갖다 대는 것만으로도 간단히 퇴치.

[B급 괴수 ‘검수’를 퇴치하였습니다.]

[레시피로 인해 보상이 지급되지 않습니다.]

“다음.”

그 뒤로 D급 괴수 ‘불쥐’.

“다음.”

B급 괴수 ‘성성’.

“다음.”

C급 괴수 ‘야마치치’까지.

승강장, 길거리, 그리고 다시 승강장. 장소가 바뀔 때마다 만난 괴수를 모두 쓰러뜨리고 나니 완전히 공포에 질린 듯 소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모습 안 보이는 헌터님, 대체 얼마나 강하신 거예요?”

“겨우 이게 끝이야? 고작 이딴 괴수들로 나를 막아보려 했다고? 이걸로는 부족하지. 이보다 더 강한 괴수를 데려오는 게 어때?”

괴수를 내보내지 않고 직접 나섰더라면 이미 나를 쓰러뜨리고 남았겠지만, 다양한 괴수를 쓰러뜨리는 모습을 본 지금에 와서 본인이 직접 나설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아마 이제 ‘레비아탄’을 내보내려 하겠지.

“제 아가들을 전부…. 이 아가는 나중을 위해서 아껴두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네요.”

사방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보니 또다시 장소가 바뀌는 듯하다. 길거리와 승강장의 반복이었으니 이번 차례는 다시 길거리.

“이 정도로 강한 아가를 붙잡아둔 건 처음이라 이럴 때 쓰고 싶진 않았거든요.”

빛이 잦아들 때쯤 눈을 뜨니, 내 예상과 달리 승강장이 아닌 다른 장소에 와 있었다.

“다리 위?”

“이 아가는 쓰러뜨리지 못할 거예요. 지금까지 제 아가들이랑 놀아주신다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SSS급 괴수 ‘레비아탄’이 등장합니다.]

새로이 바뀐 장소는 다리 위. 내 시선의 끝에선 거대한 악어가 다리의 철골을 씹어 먹고 있었다.

‘물론 박다현 헌터님이 그 악어를 ‘이면’으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큰일 났겠지만.’

“역시 ‘레비아탄’은 네 번째 시련에서 데려온 거였나.”

이 장소를 보니 뜬금없이 나타난 ‘레비아탄’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다. 네 번째 시련 당시 소환된 ‘레비아탄’을 ‘이면’에 가둔 다음, 용산역까지 데려온 뒤 구덩이에다가 푼 거였다.

“그나저나 ‘야누스의 출입문’은 보이질 않네.”

‘레비아탄’이 나에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을 때를 틈타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야누스의 출입문’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고 대신 길게 이어진 다리만이 보였다. 심지어 ‘레비아탄’이 씹어 먹고 있는 쪽도 일부가 끊겨 있을 뿐, 다리는 괴수 뒤쪽에서 다시 길게 뻗어져 나가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 뒤편으로도 다리가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그 끝은 육지에 닿아 있지 않았다. 저 멀리 다리 끝에서 보이는 건 또 다른 ‘레비아탄’의 뒷모습.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지만 위아래로 들썩이는 입을 통해 그 ‘레비아탄’ 역시 다리를 씹어 먹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푸른 강물 너머 보이는 또 다른 다리에도 철골을 씹어 먹고 있는 ‘레비아탄’이 달라붙어 있었는데, 한 마리가 아니었다. 끝없이 길게 이어진 다리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레비아탄’이 일정 간격으로 달라붙어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저 다리 너머 보이는 또 다른 다리 역시 ‘레비아탄’의 파티가 열린 듯하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다리들도 마찬가지의 상황.

“왼쪽만 그런 게 아니라 오른쪽까지 똑같은 풍경이네.”

똑같은 풍경이 무수히 이어지는 광경을 보니 거울로 둘러싸인 방 안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실제로 이런 장소가 존재하지는 않을 테고….”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김화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11층에서 계단을 오르니까 다시 6층이 나왔다고 했었지.”

김화영에게 들었던 이야기랑 지금 보이는 풍경, 그리고 ‘이면’에 오기 전 했던 추측까지 모두 결합하면 한 가지 결론이 나온다.

바로 ‘이면’은 거울의 방이라는 것.

‘이면’은 ‘현실’의 한 장소를 구현하면 거울에 반사된 것처럼 그 모습이 무수히 반복되는 곳이다. 그게 11층에서 한 층 올라간 김화영 일행이 6층에 도달한 이유이자 현재 내 눈에 무수히 많은 ‘레비아탄’이 보이는 이유다.

“이전 장소에 벽이나 건물이 없었더라면 더 빨리 눈치챌 수 있었을 텐데…. 어쨌든 여기선 도망칠 수 없다는 거지.”

‘레비아탄’의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는 건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이다. 결국엔 저 ‘레비아탄’ 바로 뒤로 뛰어가는 셈이니. 강에 뛰어들어 옆의 다리로 헤엄쳐 가는 것도 마찬가지. 그래 봤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된다.

“뭐, 어차피 저 괴수를 쓰러뜨리려고 여기 온 거지만.”

각오를 다지고 ‘궁중 식도’를 바로 잡았다. 반지로 모습을 감추고 있는데도, 내 움직임을 알아챘는지 ‘레비아탄’은 다리를 씹어 먹는 걸 멈추었다. 동시에 돌기들이 갈라지며 수많은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플레이어 ‘정현’이 ‘레비아탄’과 눈을 마주쳤습니다.]

[‘공포 내성’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두려움을 떨쳐냅니다.]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 보네.”

날카로운 눈과 마주한 뒤로 공포에 질려 기억을 잃은 게 태반이라 모든 눈을 뜬 ‘레비아탄’을 맨정신으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미리 사둔 공포 내성으로 공포에 잠식되는 걸 막아냈다고 해도 ‘레비아탄’을 다른 괴수처럼 쉽게 쓰러뜨릴 순 없다. 저 정도로 거대한 괴수 상대로는 ‘이상식욕자’ 특성과 ‘대장금의 궁중 식도’ 장비의 조합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모습을 감추고 다가가 식도로 찌르는 데 성공했더라도 몸을 베어내기까지는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릴 텐데, 그동안 ‘레비아탄’이 한 번이라도 몸부림친다면 난 그 충격에 즉사할 게 뻔하니.

누가 자기 몸을 찌르는 데 가만히 있을 리도 없고, 이번엔 다른 수를 써야 한다.

“저 덩치는 어떤 맛일지 다들 궁금하지 않나요?”

반지를 벗고 느긋하게 외치자 ‘레비아탄’은 수면 위로 모습을 더 드러내 상반신을 다리 위에 올린 꼴이 되었다.

“본래라면 재료를 손질하고, 조리하고 간을 보는 과정을 거쳐서 요리를 완성하여 먹는 게 정석이지만. 가끔은 생식도 좋잖아요?”

궁중 식도 하나만을 장비한 채 ‘레비아탄’을 향해 걸어가자 수많은 글씨가 새겨졌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드디어 이성을 상실한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허영의 사내’님이 당신을 경계합니다.]

[‘부동의 노인’님이 변기에서 내려옵니다.]

F급 헌터인 내가 홀로 SSS급 괴수에게 맞선다는 상황이 신선했는지 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초월자까지 내게 관심을 보내주고 있었다.

[‘폐허가 뒤따르는 자’님이 10초 뒤 당신이 죽을 것에 1만 포인트를 겁니다.]

[‘호색한 찬탈자’님이 무모함을 비웃으며 당신의 죽음에 4만 포인트를 겁니다.]

[‘풍요와 파괴의 군주’님이 식탐의 위대함을 칭송하며 당신의 생존에 2만 포인트를 겁니다.]

대부분은 내가 죽을지 살지로 내기하는 데에 집중하는 듯했으나, 그중 몇몇은 응원해주기도 했다.

[‘빛나는 눈의 전략가’님이 당신이 지혜를 발휘해 생존할 것을 기대합니다.]

[‘번개의 아내’님이 ‘호색한 찬탈자’님의 사람 보는 눈이 없음을 비난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슨 내용인지 다 읽지도 않고 글씨에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중요한 건 식사를 무사히 마치는 것뿐.

“그럼 잘 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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