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선전포고(8)]
‘레비아탄’과의 거리가 좁혀졌을 때, 일부러 방송 톤으로 말하며 입을 크게 벌려 주었다. 특별히 많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 날, 입 주변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 방송 전에 습관처럼 했던 행동을 하고 나니 긴장이 풀리는 듯하다.
한편 ‘레비아탄’은 수많은 눈으로 나를 관찰할 뿐, 별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입을 오므렸다 벌리며 근육을 풀어주는 내가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나 보다.
“SSS급 괴수의 여유라는 건가.”
저 괴수가 여유라는 감정을 느끼긴 하는지 모르겠으나, 자신의 콧바람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나를 적으로 여기고 있지 않다는 것만은 명확했다. 상반신을 다리 위로 끌어 올린 이유도 그저 자신의 앞에 나선 존재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자신의 눈을 마주했는데도 ‘공포’에 질리지 않은 존재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거나.
이유가 어찌 되었든 적으로 여겨지지 않은 덕분에 오른손 위에 무사히 올라탈 수 있었다.
‘레비아탄’은 자신의 손에 내가 올라탔는데도 여전히 다음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괴수와 마찬가지로 초월자들도 내가 다음에 어떤 행동을 취할지 궁금했는지 주변에 시야를 가릴 정도로 무수히 많은 글씨가 새겨졌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당신이 술을 한잔 걸치지 않았는지 의심합니다.]
[‘허영의 사내’님이 완벽에 가까운 생명체에 흠집 하나 내지 못할 것을 장담합니다.]
[‘호색한 찬탈자’님이 당신의 명운이 끝났다고 판단합니다.]
보아하니 대부분 내가 정신 나갔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홀로 A급 괴수까지 쓰러뜨리는 모습을 봤을 텐데도 저들이 저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만큼 ‘레비아탄’이 강하기 때문. 이화와 이나은 같은 헌터들도 전혀 상대가 안 되었는데 고작 나 따위가 ‘레비아탄’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할 초월자는 없는 게 당연하다. 다들 ‘레비아탄’에게서 도망치기는커녕 가까이 다가간 날 미쳤다고 여길 테지.
지금부턴 그 생각이 바뀌겠지만.
식도를 높이 들어 올린 뒤, 발밑에 꽂아 넣었다. 조그마한 식도는 겉보기에도 강철 같아 보이는 ‘레비아탄’의 피부를 간단히 뚫고 오른손에 깊숙이 박혔다.
[‘허영의 사내’님이 얼굴을 찡그립니다.]
[‘폐허가 뒤따르는 자’님이 당신의 힘 스탯을 의심합니다.]
[‘알 수 없는 자’님이 스탯 오류 검사를 요구합니다.]
안타깝게도 내 스탯은 여전히 0인 채로다. ‘레비아탄’의 피부를 뚫은 건 전부 ‘괴수 요리사’란 직업으로 얻은 ‘이상식욕자’ 특성과 ‘대장금의 궁중 식도’ 덕분. 이러니까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에게 이 영광을 돌린다고 수상 소감을 말한 꼴이 된 것 같아 좀 기분이 그렇긴 하지만, 이 직업이 마냥 쓸모없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개똥도 약에 쓴다더니….”
부대장의 말투를 따라 하며 ‘레비아탄’에게 꽂은 식도를 살짝 비튼 뒤, 살점을 떼어냈다.
[‘허영의 사내’님이 미간을 찌푸립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허영의 사내’님의 표정을 따라 하며 낄낄 웃습니다.]
살점을 떼어낸 순간, 몸이 허공에 붕 떴다. ‘레비아탄’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거대한 몸집을 생각했을 때, ‘궁중 식도’로 입힌 상처는 고작 바늘로 찌른 수준에 불과하다. 그런 상처를 입고 보이는 격한 반응에 살짝 당황스럽긴 했지만, 허공에 내쳐지지 않도록 ‘궁중 식도’를 꽉 붙잡았다.
거대한 몸과 어울리지 않는 짤막한 팔로 격렬하게 다리를 내리치며 ‘레비아탄’은 기나긴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에 고막이 터졌는지 이명이 울리며 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귀를 막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대로 식도를 잃는다면 내게 승산은 없다. 지금은 ‘궁중 식도’를 놓치지 않는 데에 온 정신을 쏟을 때였다.
‘레비아탄’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검은 피가 얼굴을 적셔 시야도 점차 흐릿해져 갈 때, ‘궁중 식도’가 괴수의 손에서 삐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이 허공에 내쳐졌다.
‘궁중 식도’는 여전히 손 안에 있었으나 다리 위에 던져지는 신세를 피하지는 못했다.
왼쪽 팔이 먼저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혀 충격을 감쇄해주었으나, 꽤 높은 곳에서부터 떨어졌기에 뼈가 완전히 부러진 듯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허영의 사내’님이 행운이 끝났음을 고합니다.]
이 정도로 작은 상처에 저렇게까지 몸부림칠지는 몰랐지만, 언젠간 다리 위에 내쳐질 것쯤은 예상하고 공격에 임한 것이다. 당연히 다시 전투를 이어갈 방법쯤은 생각해두었다.
‘궁중 식도’를 잠시 놓고 왼손에 쥔 살점을 오른손에 넘겼다.
“맛은 없겠지.”
‘레비아탄’의 살점을 입 안에 넣자 미적지근한 열기가 느껴졌다. 예상대로 끔찍한 맛이다. 타이어를 태워서 씹는듯한 식감에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으나 꾹 참고 억지로 삼켰다.
[미식 수치가 1 상승합니다.]
[고유 능력 ‘식탐’으로 ‘레비아탄’의 특성이 귀속됩니다.]
[‘라우테’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레비아탄’을 섭취하여 신체가 재생됩니다.]
이번 전투 방식으로 택한 것은 ‘궁중 식도’로 괴수의 몸을 찢고 살점을 먹어 ‘라우테’ 특성으로 신체를 재생하는 것.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일격에 즉사하지만 않는다면 괴수 상대로는 필승 전략이나 다름없다.
멋도 없고 더러운 전투 방식인 건 알지만, 이런 방법이 아니고서야 SSS급 괴수를 쓰러뜨릴 수는 없다.
“고유 능력으로는 무슨 특성을 얻었지?”
‘레비아탄’이 미친 듯이 날뛰는 동안 이번에 얻은 특성을 확인해보니, 그 이름은 ‘시기’.
[정보 접근 권한이 부족합니다.]
당연히 그 효과를 볼 순 없었다.
특성을 보고 나니, ‘레비아탄’의 움직임은 잠잠해져 있었다. 괴수는 이제 나를 상대할 마음이 생겼는지 내 쪽으로 입을 벌렸다.
“그럼 다시 시작해볼까.”
이번에 내가 노릴 부위는 머리 위쪽. 짧은 팔은 ‘레비아탄’의 머리 위에 닿지 않을 게 뻔하니, 저기서 살을 파먹기 시작한다면 꽤 큰 상처를 입힐 수 있을 거다.
다음 공격 부위를 정하고 거기에 도달할 방법을 생각하는데, 열기가 느껴졌다.
“뭐야?”
곧 ‘레비아탄’의 코에서 연기가 삐져나오더니 목구멍 안에 붉은빛이 감도는 게 보였다.
열기의 정체는 화염. ‘레비아탄’은 다리마저 녹일 엄청난 불길을 내뿜었다.
물론 지옥불에도 타지 않은 내 신체가 ‘레비아탄’의 불길에 당할 일은 없었다. ‘불 내성’ 특성이 있는지도 모르고 ‘레비아탄’이 화염을 내뿜는 데 집중하는 동안, 난 괴수의 어깨 위에 편하게 올라탔다.
입을 벌린 상태라 머리 한가운데까지 가는 건 무리라고 판단해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궁중 식도’로 찌르고 물어뜯기를 반복해 꽤 깊은 상처를 입히자 ‘레비아탄’은 공격 노선을 바꾸었는지 입을 다물고 몸을 뒤집어 그대로 강물 밑으로 빠졌다.
물속에 빠질 순 없어 다리 위로 몸을 던진 후 살점을 먹는 것으로 부상을 회복했다.
“이대로 물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괜한 걱정이라고 말해주는 듯 발밑에서 진동이 일었다.
“…설마. 아니지?”
진동이 일어나는 이유가 뭔지 알아채고 진원지에서 멀리 떨어지기 위해 뛰었다.
조금만 판단이 늦었더라면, 즉사했을 뻔했다.
진원지가 갈라지며 다리를 뚫고 ‘레비아탄’이 튀어 오른 것이다. 강 쪽으로 추락하는 다리의 파편에 휩쓸렸다면 멀쩡히 살아남지 못했을 거다.
다리가 무너지며 떨어져 나간 파편 일부는 ‘레비아탄’의 몸에 부딪혔으나, 괴수의 등에 닿은 파편은 반으로 갈라지며 ‘레비아탄’에겐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레비아탄’의 몸에는 오로지 내가 입힌 상처만이 있었다.
이화와 이나은이 ‘레비아탄’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던 이유는 아무래도 저 단단한 피부 때문이었던 것 같다. ‘궁중 식도’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피해를 주지 못하고 그대로 죽고 말았겠지.
헌터가 된 직후부터 나와 함께해준 식도에게 감사를 표하며 다시 자세를 취했다. 물속으로 들어간 ‘레비아탄’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강을 바라보니 이상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뭐야?”
다리에서 떨어져 나간 파편들이 수면 위에 그대로 쌓여 있었다. 강물 역시 ‘레비아탄’이 몸을 담근 부분만 파여 있을 뿐, 수면엔 물결 하나 일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면’이란 공간에 ‘파괴 불가’ 속성이 걸려 있는 게 아니었나? ‘레비아탄’은 ‘파괴 불가’ 속성이 걸려 있는 것마저도 부술 수 있는 건가?”
그 어떤 괴수도 벽이나 건물 등 주변 공간을 부수지 못했던 걸 떠올리면, ‘레비아탄’만이 ‘파괴 불가’ 속성이 걸린 장소도 부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긴 하다.
“끔찍하네.”
그 사실을 눈치챘을 때, ‘레비아탄’은 다시 다리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이랬다간 몇 년이 지나도록 싸우고만 있겠네.”
이대로 조그마한 상처를 입히고 엄청난 공격 세례를 당하는 걸 반복하고 있을 순 없다.
“될 대로 되라지.”
눈을 질끈 감고 쩍 벌어진 ‘레이바탄’의 입 안으로 뛰어들어가 혓바닥에 검을 찔렀다.
그 뒤론 같은 행위만을 반복했다.
‘레비아탄’이 목구멍 안에서 불을 뿜든, 물속으로 기어들어 가든, 다리에 몸을 부딪치든 간에 ‘궁중 식도’로 내부를 찌르고 살점을 파먹었다.
목구멍 안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하며 살점을 파먹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괴수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검은 피와 내가 흘린 땀에 범벅이 되었을 때 즈음, ‘레비아탄’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입천장 쪽을 집요하게 공략한 결과 머리 위를 뚫고 밖으로 나온 탓이었다.
그 과정에서 얼떨결에 뇌까지 맛본 덕택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지만, 한참 만에 맡은 상쾌한 공기 덕분에 다시 맨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입속으로 들어간 다음에 두 시간 동안 잠잠하길래 하늘나라에 갔다고 생각했는데.”
멀리서 들려오는 소녀의 말은 무시한 채 묵묵히 ‘레비아탄’ 위를 걸어 다니며 돌기에 달린 눈을 하나하나 찔렀다. 오랜 전투로 인해 몸이 몹시 피로했으나 이대로 멈출 순 없었다. ‘레비아탄’이 움직이지 않을 때, 완전히 숨통을 끊어야 했다.
머리부터 목덜미까지. 돌기에 난 눈을 모두 찔렀을 때 드디어 글씨가 새겨졌다.
[SSS급 괴수 ‘레비아탄’을 퇴치하였습니다.]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차등 배분됩니다.]
[50만 포인트를 지급받습니다.]
[‘특급 냉장고’에 ‘레비아탄의 가죽’이 보관됩니다.]
[‘풍요와 파괴의 군주’님이 식탐의 위대함에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립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구역질이 올라왔다.
해외여행을 갔다가 돼지 뇌를 먹어보긴 했어도, 조리조차 안 된 악어 뇌는…. 그것도 나만큼이나 거대한 뇌를 파먹었다니…. 다시는 생각하기 싫다.
속에 들어간 걸 전부 내뱉고 있으니 초월자들이 앞다투어 포인트를 후원했다. 호기롭게 잘 먹겠다고 말해놓고 먹은 걸 다 토해내는 꼴이 보기 좋았나 보다.
“제기랄.”
짧은 욕설을 내뱉을 때, 강렬한 빛이 일었다.
서둘러 ‘레비아탄’의 시체를 ‘특급 냉장고’에 챙기고 나니 빛이 사라지고 처음 ‘이면’에 왔을 때의 장소가 나왔다.
“SSS급 괴수까지 쓰러뜨릴 정도면….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거야….”
고속철도 승강장 한가운데에는 벌벌 떠는 소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