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91화 (92/168)

[15. 선전포고(9)]

내가 다가가자 소녀는 뒷걸음질 치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오지 마세요!”

소녀의 시선은 내 입과 ‘궁중 식도’에 고정되어 있다. 아무래도 내가 자신을 해치리라고 생각해 공포에 질린 모양이다.

SSS급 괴수를 쓰러뜨렸음에도 저 소녀와 싸웠다간 손쉽게 패할 거란 아이러니한 사실을 아는 난 이 상황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네가 이대로 우릴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면 나도 널 해치지 않을게.”

그러나 내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 소녀는 울먹거리며 뒷걸음질만 쳤다.

“아가는 다 죽었지만, 그쪽을 ‘이면’에 가두어둔다면…. 그러면 부대장님이 다 해결해줄 거예요.”

“방금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우릴 방해하지 않으면 넌 건드리지 않겠다니깐.”

“거짓말!”

그렇게 쏘아붙인 소녀는 손에 든 물체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 물체에서 강렬한 빛이 일었다.

“잠깐!”

내 말이 끝나기도 전, 소녀는 모습을 감추었다.

“완전히 겁에 질렸네.”

괴수를 아가라 부르며 나와 일행을 죽인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모습이다. 소녀가 저런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전부 강이란 세력에 오래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겠지.

“마포에서도 그렇고, 얼마나 많은 애를 뒤틀리게 만든 거야.”

짧은 불평을 내뱉고 보관해두었던 스크린도어 조각을 꺼내 들었다. 스크린도어 조각에는 내 얼굴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충분한 건가?”

검은 피를 뒤집어쓴 내 몰골을 바라보자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이 사라지고 나니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고속철도 승강장이 보였다. 잔해나 쓰레기 없이 완전히 텅 비어 있는 고속철도 승강장은 현실로 돌아왔음을 알려주었다.

“역시 공간을 ‘이면’으로 옮길 때, 그 공간 안에 있던 모든 물체가 한꺼번에 같이 옮겨지는 거였구나. 그래서 지난번 빌딩에서 6층부터 11층까지 완전히 텅 비어 있던 거고.”

생각이 맞았음을 확인하는데, 소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면’에서 어떻게….”

“이거 덕분이야.”

내 앞에 서 있는 소녀에게 금이 간 스크린도어 조각을 던지자 그녀는 잔뜩 몸을 움츠렸다.

“저 말고도 ‘이면’ 스킬을 가진 사람이 또 있는 거예요? 여기로 돌아오는 방법을 그쪽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이면’ 스킬을 가진 사람이 또 있는 건 아니야. 혹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란 책 아니?”

들어본 적 없는 듯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네 나이가 어떻게 되지?”

소녀는 내 물음에 손가락 일곱 개를 펴 보였다.

일곱 살이면 멸망했을 당시의 나이는 다섯 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 책의 후속작이 ‘거울 나라의 앨리스’란 책인데, 거울을 통해서 다른 세계로 들락거리는 내용이거든, 거기서 힌트를 얻었지.”

김화영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언급한 게 큰 힌트가 된 셈이다.

물론 ‘이면’과 관련된 일이 벌어질 때마다 빛이 번쩍이기도 했고, 내부가 거울의 방처럼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는데 ‘이면’의 실체가 거울과 관련되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는 게 말도 안 되긴 했다.

“‘이면’이 거울과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된 다음. 무언가를 비출 수 있는 물체를 통해서라면 ‘이면’ 밖으로 나오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어. 근데 이렇게 말해줘도 넌 책 내용을 모르니까 이해 안 되려나?”

대답이 없어 소녀를 보니, 입에 거품을 문 채 뒤로 쓰러진 상태였다.

“이미 기절해버렸네. 내가 그렇게 무서웠나?”

“어? 현아, 네가 쓰러뜨린 거야?”

소녀가 기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화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여자애는 잠깐 기절한 거뿐이에요.”

“그렇구나. 그런데 몸에 묻은 검은 건 다 뭐야?”

“일이 좀 있었어요. 다 잘 해결됐고, 전 아무 이상 없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혹시 김화영 헌터 쪽은 어떻게 됐어요?”

“남자애라면 당연히 쓰러뜨렸지. 현이 말대로 스킬을 반사하지 못하게 만드니까, 완전히 겁먹어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더라고. 참, 그리고 갇혀 있던 사람들도 다 풀어줬어.”

“본래 마음껏 뛰어놀며 자신의 꿈을 펼칠 나이의 아이들인데. 안타깝구먼.”

김화영의 뒤에서 노인을 비롯한 붙잡혀 갔던 일행들이 나타났다. 그 외에도 처음 본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데스웜’이 판 구덩이를 돌아 나오고 있었는데, 김화영은 그들이 붙잡혀서 선수가 되었다는 사람들이라고 말해주었다.

“다들 괜찮으세요?”

“난 괜찮다네. 다만, 한성수 헌터도 괜찮은지는 모르겠군. 나를 감싸다가 본인이 대신 다치는 바람에….”

노인의 말대로 한성수의 한쪽 눈은 퉁퉁 부었고, 칼에 베인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에 옷 곳곳이 얼룩져 있었다.

“전 괜찮습니다. 일행에서 제 역할은 공격을 방어하는 것. 일행분에게 가해지는 공격을 대신 받는 건 익숙합니다.”

상처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도 괜찮다며 한성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오히려 시선이 자신에게 모인 게 민망했는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오면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지금부터 저희는 위쪽으로 가서 교란팀을 도우면 되는 거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그가 화제를 돌린 김에 이들에게 곧바로 해야 할 일을 말해주었다.

“몇 분은 여기 남아서 해주셔야 할 일이 있어요.”

“할 일?”

동현이 형의 물음에 구덩이 아래를 가리켰다.

“태울 만한 것들로 ‘데스웜’이 판 저 구덩이 안을 채워야 해요.”

“엄청 깊네. 다 채우려면 한참 걸리겠는데?”

“완전히 꽉 채울 필욘 없어요. 불이 붙을 정도면 돼요.”

내 지시를 이해했는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누가 여기 남으면 돼?”

상처를 입은 한성수와 오랜 시간 이곳에 갇혀 있던 선수들에게 전투를 맡길 순 없다. 그들은 여기 남기는 게 나을 것 같다.

“한성수 헌터, 송지아 헌터랑 여기 붙잡혀 계시던 선수분들과 함께 이 일 맡아주실래요?”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시간 없으니 바로 시작해주세요. 나머지 분들은 저랑 같이 위로 올라가요.”

대합실로 올라오니 교란팀이 힘겹게 싸움을 이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스무 명 남짓의 헌터가 쓰러져 있었으나, 여전히 열댓 명이 넘는 적이 교란팀을 공격하고 있다. 그들에 의해 구석에 몰린 채 송태섭이 김아람을 보호하는 중이었는데,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하루에 쓰러뜨릴 수 있는 적의 수가 제한되다 보니 수비에만 급급해 수세에 몰린 것 같다.

“‘이면’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나.”

본인이 ‘지켜야 할 게 있으면 강해지는 타입’이라고 말했기에 이곳에 배치한 거였는데,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김화영 헌터, 더 싸우실 수 있겠어요?”

“당연하지. 사실 아까 수연이가 피로 한 번 회복해줬어.”

“두 분도 괜찮으시겠어요?”

“괜찮네. 지금까지 지하철에 갇혀서 쉬고 있던 거나 다름없는데, 뭘 그러나.”

“나도 괜찮아.”

“그러면 아까 무기고에서 챙겨둔 무기 드릴게요.”

특급 냉장고에서 노인의 총과 동현이 형의 검을 꺼내주자, 둘은 각자의 무기를 장비하고 곧바로 전투에 돌입했다. 한편 김화영은 전투에 합류하는 대신 이곳에 남아 수연이를 지켜주기로 판단한 듯, 우리를 눈치채고 다가오는 선수들에게 달라붙었다.

“수연아, 다른 사람들은 적들을 쓰러뜨리느라 바쁘니까 전투 이후 해야 할 일은 너한테 말해둘게. 네가 다른 사람들한테 전해줘야 해.”

“왜 직접 말하지 않고?”

“고속열차 승강장에 남은 사람들이 내가 부탁한 일을 마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러니 지금부터 난 시간을 벌러 위로 올라갈 거거든. 아마 10분 정도밖에 시간을 못 벌 것 같긴 한데.”

지금 대합실의 전투 상황을 보니,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아무런 무기를 장비하지 않은 선수들은 동현이 형의 검 앞에 무참히 쓰러졌고, 무기를 장비한 헌터들조차 노인의 총에 하나둘 처리되는 중이다. 전투는 10분 안에 충분히 끝날 거다.

“내가 내려오는 순간, 임성윤 헌터가 연막탄을 뿌려주셔야 해. 정말 앞이 하나도 안 보일 정도로 뿌려주셔야 하거든. 꼭 전해줘.”

“알겠어.”

“그리고 연막이 뿌려지기 전에 너희는 전부 구덩이 반대편에 가 있어야 해.”

“구덩이 반대편이라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여기 기준에서 반대쪽?”

“그렇지.”

“전할 건 그것뿐이야?”

“응. 부탁할게.”

“그런데 위층엔 무슨 일로?”

부대장을 맡으러 간다고 하면 걱정할 게 뻔했기에 대답 대신 다시 한번 부탁한다고 말하고 야외정원 쪽으로 향했다.

야외정원은 대합실보다 상황이 더 심각했다. 핏빛으로 물든 정원 한가운데에는 부대장이 멀쩡한 자태로 서 있었고, 그의 양옆엔 피투성이 상태인 이화와 이나은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만!”

이나은이 주먹을 쥐는 것을 보고 외치자 세 사람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정현 헌터? 신호 준다는 거 아니었어요? 그런데 몸엔 대체 뭘 바르신 거예요?”

“이제 세 사람이 힘을 합쳐 날 공격하는 건가? 백지장도 맞들면 낫긴 하지만, 그래 봤자 시간 낭비일 텐데? 너희는 날 쓰러뜨리지 못해. 어차피 강이란 헌터님께서 네놈들을 산 채로 붙잡아두라고 하신 이상, 나도 너희를 죽이지 못하는 처지거든. 그러니 피차 시간 낭비는 그만하는 게 어떻겠어?”

“네 말이 맞아. 피차 시간 낭비는 그만해야지. 싸움은 여기서 끝이야.”

“합의된 것 같네. 말이 통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합의는 아니고, 일방적인 협박이야. 네가 아끼는 박 씨 남매, 지금 우리한테 인질로 붙잡혀 있거든.”

느긋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부대장은 눈썹을 들썩였다.

“내 명령도 없었는데, 두 아이가 너희 앞에 나타났을 리 없어.”

“덕분에 내 몸이 괴수 피로 떡칠 된 거 보면 모르겠어?”

씩 웃으며 던진 도발에 부대장이 발을 떼고 내게 한 발짝 다가왔다.

“네가 하고픈 말이 뭐지?”

“그 두 사람은 아래에 있는 내 동료들이 붙잡아 둔 상태야. 우릴 여기서 보내주면 그 둘을 풀어줄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인데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지? 두 눈으로 직접 두 아이가 살아 있는지 아닌지 보고 그 말에 따를지 결정하도록 하지.”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 대신 지금 여기 있는 두 사람부터 이쪽으로 보내. 우리가 먼저 내려가고 네가 내려오는 거야. 너 정도로 강한 사람을 경계하는 것쯤은 이해하지?”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욘 없지. 그 말에는 따라 주지.”

부대장이 팔짱을 낀 채 이화와 이나은을 노려보자, 두 사람은 머뭇거리다 내 쪽으로 왔다.

“오빠, 대체 무슨 일이야?”

“이야기는 나중에. 두 사람 힘은 남아 있어?”

“네. 조금은요.”

“너무 늦어서 미안. 일단 저자부터 쓰러뜨리고 남은 이야기하자.”

“셋이 쑥덕거릴 시간에 아래로 내려가는 게 어때? 슬슬 기분 나빠지려 하는데?”

“이제 내려갈 테니, 진정해. 지금 이 정도 간격 유지하면서 따라오는 거 잊지 말고. 간격이 좁아지면 내 동료들이 인질을 바로 죽일 거야.”

부대장이 끼어들어 대화를 멈추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다행히 모든 선수는 쓰러져 있는 상태였고, 일행들은 내가 부탁했던 위치에 서 있었다.

“아이들은 어디에 있지?”

그리고 부대장이 에스컬레이터 아래에 도착했을 때.

노인이 던진 수많은 연막탄에 대합실이 뿌연 연기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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