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92화 (93/168)

[15. 선전포고(10)]

“뭐야? 따라오라더니 역시 꿍꿍이가 있었나?”

“꿍꿍이라고? 잘못 짚었어. 네가 여기 내려오자마자 우리를 전부 죽이고 박 씨 남매만 데려갈 수도 있으니까 보험 하나 든 것뿐이야.”

“이 정도 연막은 손짓 한 번이면….”

“그 순간 인질도 죽을 거야. 그러니 답답해도 참는 편이 나을걸?”

부대장에게 경고한 다음, 이나은과 이화에게는 내게서 떨어지라고 조용히 말했다.

“그냥 내 목소리만 잘 따라와. 두 사람이 보이는 곳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인내심은 깊으면 깊을수록 좋다고 했지. 좋아, 마음 넓은 내가 이번은 참고 넘어가도록 하지.”

“그럼 출발해볼까?”

이나은과 이화가 곁에서 멀어진 것을 확인한 뒤, 앞으로 나아갔다. 시야가 보이지 않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구덩이에 빠지지 않도록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나아가느라 이동속도는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너무 느린 거 아니야?”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 알고 있지 않나?”

부대장의 말투를 따라 하자, 그는 기분이 언짢아진 듯 한마디 덧붙였다.

“두 아이가 무사하지 않으면, 너흰 모두 강이란 헌터님께 죽게 될 거란 것만 알아둬.”

“알겠으니까, 조용히 따라오기나 해.”

인간성이 완전히 말소된 집단인 강이란 세력이 박 씨 남매를 전투에 함부로 나서지 못하도록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두 사람이 중요한 인물이라곤 예상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인질로 잡았다고 협박한 거였는데, 방금 부대장이 한 말로 박 씨 남매에 관한 내 예상이 맞았다는 게 확인되었다.

“거의 다 왔어.”

한마디씩 내뱉으며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구덩이 앞에 도달했다.

“잠깐 거기서 멈춰.”

부대장이 앞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한 뒤, 천천히 구덩이 둘레를 따라 기어갔다. 부대장에게서 충분히 멀어지고 나서야 다음 지시를 내렸다.

“거기에서 앞으로 열 걸음 걸어가. 그러면 박 씨 남매를 볼 수 있을 거야.”

“확실하겠지?”

부대장은 의심 섞인 목소리로 물으면서도 내 말에 따랐다. 그렇게 정적 속, 부대장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확하게 발걸음 소리가 다섯 번 들렸을 때.

“여기서 다섯 걸음만 더 나아가면 된다는 거군. 이 정도 거리면 아이를 구하기엔 충분하겠어.”

부대장이 손을 휘저어 연막을 모두 날려 버렸다. 시야가 트이자 구덩이 바로 앞에 멈추어 선 부대장의 모습이 보였다.

“꿍꿍이 따윈 없다더니, 역시 함정이었나. 이래서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야 한다니깐.”

“아니, 그 구덩이 아래쪽을 보면 두 사람이….”

“내가 그딴 허접한 거짓말에 또 속을 것 같나!”

[플레이어 ‘이나은’이 ‘겨루기 준비’ 상태가 됩니다.]

언제 기술을 준비한 건지,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부대장 위쪽에서 다리를 뻗은 이나은이 나타났다.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하고 그만 떨어져.”

[플레이어 ‘이나은’이 ‘찍기’ 기술에 성공하였습니다.]

[3점 득점으로, ‘힘’이 세 배 적용된 피해를 입힙니다.]

“나은아, 그런 공격으론 안 돼.”

“저도 그건 알고 있어요.”

이나은의 기술이 적중한 대상은 부대장이 아니었다. 이나은의 발이 내리찍은 건, 부대장이 서 있는 바닥.

이나은의 발이 닿자마자 바닥은 구덩이 안으로 무너져 내렸다. 무방비한 상태로 내게 노여움을 토해내고 있던 부대장은 그에 휩쓸려 구덩이 아래로 추락했다.

“드디어 한 방 날렸네요. 속 시원하다.”

‘데스웜’이 워낙에 깊게 구덩이를 판 탓에 부대장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는 한참 후에야 들려왔다.

“고작 이딴 술수를 부린 거야? 정정당당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네.”

오랜 시간 추락했는데도 전혀 다치지 않은 건지 부대장은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이어지는 충격음.

[A급 괴수 ‘데스웜’을 퇴치하였습니다.]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차등 배분됩니다.]

[기여한 바가 없어 보상이 지급되지 않습니다.]

부대장은 구덩이 아래에 있던 ‘데스웜’을 퇴치하며 분노 섞인 목소리를 내질렀다.

“내가 멋대로 스킬 쓰지 말라고 했잖아! 그런데 ‘이면’에 있어야 할 ‘데스웜’이 왜 여기 있는 거야! 강이란 헌터님께서 그날이 오기 전까진 스킬을 함부로 노출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저 자식 기어 올라올 기센데 어떻게 하죠?”

이나은의 말대로 가만히 놓아두었다간 벽을 타고 기어오를 거다. 그를 막기 위해선 이화가 나서야 한다.

“이화야, 구덩이 밑에 불 좀 질러줘.”

“내가 지금껏 공격해봤는데 ‘불 내성’ 특성이 있어서….”

“괜찮으니까, 빨리!”

다급한 내 말에 이화가 우산을 구덩이 아래쪽으로 향했다.

[스킬 ‘천마적룡’이 발동됩니다.]

우산에서 일곱 개의 머리가 달린 붉은 용 형태의 화염이 뻗어 나오더니 구덩이 아래로 쏜살같이 내려갔다. 한성수 일행이 부탁했던 걸 제때 끝마쳤던 건지 다행히 구덩이 아래에선 강한 불길이 일었다.

“나한텐 ‘불 내성’ 특성이 있어서 이래 봤자 소용없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목청 한번 크네. 무기고에서 챙긴 장비 절반.”

구덩이 쪽으로 손을 뻗으며 말하자, 무수히 많은 장비가 아래로 떨어지며 구덩이를 메우기 시작했다.

“내 몸에 충격을 주는 건 오히려 힘을 주는 셈이라고!”

부대장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머리 위로 주먹을 뻗었다. 그러자 엄청난 충격음과 함께 떨어지던 장비들이 산산조각이 났다.

“내 바람대로 장비 부수어줘서 고맙네.”

부대장이 내가 떨군 장비를 부수어줄 건 예상하였다. 장비의 용도는 애초에 구덩이를 메우기 위함이 아니라 연소할 물질을 늘리는 것. 곧 장비의 잔해에도 불이 붙기 시작했는지, 불길은 더 세졌다.

“‘레비아탄’의 시체.”

장비에서 그치지 않고 거대한 ‘레비아탄’ 시체도 구덩이 아래로 떨어뜨렸다.

워낙에 거대한 몸집 탓에 비스듬히 떨어지던 ‘레비아탄’은 고속철도 승강장과 그 밑바닥으로 이어지는 부분에 끼고 말았다. 덕분에 부대장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았으나, 구덩이의 틈을 메우려면 아직 부족했다.

“학습 능력이 없는 거야? 이런 건 소용 없다니깐?”

부대장의 당당한 외침 이후 충격음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레비아탄’의 시체는 파괴되지 않고 처음 상태 그대로 구덩이 틈을 막아주고 있었다.

“역시 ‘궁중 식도’가 아니면 ‘레비아탄’의 피부를 뚫을 방법이 아예 없는 거였네. 그나저나 이화야, 연소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요소 알지?”

“아, 그게 부대장을 쓰러뜨릴 방법이었구나.”

내 말뜻을 바로 이해했는지 이화는 한 번 더 아래쪽에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 ‘천마적룡’이 발동됩니다.]

“무기고에서 챙긴 장비 나머지 전부.”

‘특급 냉장고’에서 다시 장비들이 쏟아지며 ‘레비아탄’의 시체로 메우지 못한 틈을 채우기 시작했고, 대장간에서 챙긴 무기 일부를 더하자 곧 틈은 완전히 메워졌다.

틈이 메워질수록 부대장의 외침은 점점 줄어들다가 어느새 들리지 않게 되었다.

“저렇게나 많은 걸 태우면 산소가 부족해지니까 소리 지를 힘도 안 나겠지.”

불은 산소를 소비해 물질을 태우고 이산화탄소를 내뱉는다.

그리고 이산화탄소는 공기보다 무거워 아래로 가라앉는 성질이 있다.

마지막으로 ‘레비아탄’은 불을 뿜는 괴수라 시체가 불에 탈 일은 없다. 즉, 구덩이를 막아준 채로 쭉 있어 줄 거다.

이 세 가지 사실을 결합하면, 부대장은 구덩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이산화탄소에 둘러싸여 질식하게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오빠, 이거면 된 걸까?”

“부대장의 스킬은 물리적인 충격을 받았을 때, 그를 흡수해서 되돌려주는 식일 거야. 완전히 자신을 무적 상태로 만들어주는 스킬이라면 여러 내성 특성을 안 샀겠지.”

“하긴 무적 상태로 만들어주는 스킬이었다면 아람이의 스킬을 반사할 이유가 없지. 애당초 강이란 밑에서 부하 노릇 하고 있지도 않았을 테고.”

“그러니 산소가 부족해지면 저 괴물이라도 죽고 말 거야.”

잔해를 발로 차 구덩이 아래로 떨어뜨리며 말하니, 이화는 주변의 헌터들에게 지시했다.

“다들 도와주세요. 구덩이 아래에 잔해를 떨어뜨려서 완전히 메꿔야 해요.”

이대로 우리 측 헌터들이 구덩이를 메우면 정말로 투기장 공략은 끝.

“피곤하네.”

피곤하다는 말을 끝으로 바로 잠이 든 것 같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니, 대장간 안의 의자에 눕혀진 상태였다.

“일어났네요.”

“어떻게 된 거야?”

“피곤하다고 말하자마자 바로 뒤로 자빠져서 주무시던데요.”

‘레비아탄’을 상대한 이후, 부대장까지 쓰러뜨리기 위해 움직이느라 체력이 완전히 고갈됐었나 보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구덩이 메우고 있고, 저희만 먼저 여기로 왔어요.”

이나은이 눈짓해 주변을 둘러보자 내 앞 의자에 앉아 자는 중인 이화와 한성수, 그 뒤의 벽에 기댄 채 눈을 붙이고 있는 송태섭의 모습이 보였다.

“왜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오지 않고?”

“치료가 급했으니까요. 임성윤 헌터가 남아서 상황 정리하고 계시니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그보다 구덩이 아래에 불붙여서 산소를 없앨 생각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그야.”

이전에 요리 가르쳐주던 분이 불에 관해서는 특히 더 엄격하게 가르쳤었다. 그때, 소화기에 관해서도 알려주셨었는데 이산화탄소 소화기는 위험하다면서 강조했던 기억이 있다. 잘못했다간 질식할 수도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옛날 일을 말해주자 이나은은 그런 일이 있었냐며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분께 고마워해야겠네요. 덕분에 부대장을 쓰러뜨렸으니까요.”

“…그분껜 항상 고마워하고 있지. 넌 안 자도 괜찮아?”

물음에 이나은은 자신의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시끄러워서 자도 금방 깨요.”

“그렇겠네.”

몸을 일으켜 제대로 앉으니, 뒤편에서 컵 두 잔이 튀어나왔다.

“마셔.”

컵을 건네준 사람은 주인장. 나와 이나은의 대화 소리를 듣고 와봤다고 했다.

“이야기는 다 들었어. 제대로 공략하고 왔던데? 곧 서울 전역에 소문나겠어. 강이란 세력 놈들한테 한 방 제대로 먹였다고.”

주인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목부터 축이라고 했다.

“감사합니다.”

이나은과 함께 조심스럽게 컵에 든 액체를 마시니, 머리가 띵했다.

“이거 물이 아니잖아요.”

“난 물이라고 한 적 없는데? 이런 날에 물을 마실 순 없지.”

예상치 못하게 소주 한 모금을 마신 게 되어버렸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소주라니.

“내가 사는 거니까 사양하지 말고 마셔. 물론 한 잔 더 마시려면 그에 충당한 대가를 내야겠지만.”

“대가 하니까 생각났는데, 저랑 약속했던 건 들어주시는 거죠?”

“지인 소개? 당연히 들어줘야지.”

주인장의 말에 안심하고 있을 때, 이나은이 컵을 내려놓았다.

“안 마시게?”

“머리가 너무 깨질 것 같아서요.”

“그럼 이리 줘. 아까우니까.”

주인장이 소주를 자신의 입에 털어 넣을 때, 글씨가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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