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93화 (94/168)

[15. 선전포고(11)]

[후원 미션]

- 대상 플레이어 : ‘서울’에 있는 플레이어 전원

- 클리어 조건 : 일주일 내로 강남 구청 지하의 실험실을 파괴할 것

- 성공 보상 :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과의 전속 계약 혹 술 한 병 지급

- 실패 페널티 : 없음

[수락하시겠습니까?]

[Y/N]

‘후원 미션’이 새겨지자마자 주인장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술맛 좀 나네. 회사를 대놓고 싫어하는 초월자님은 또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타이밍 한번 좋네요. 저희가 투기장을 망가뜨리자마자 이런 후원 미션이 서울 전역에 뿌려지고. 그런데 실험실은 공덕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공덕에 하나 있고, 강남에도 하나 있지. 썩을 놈들, 그딴 곳을 두 곳이나 만들기나 하고.”

두 사람은 그 뒤로 한참 동안 강이란 세력과 회사에 관한 욕을 이어갔다. 원래라면 함께 욕했겠지만 ‘후원 미션’을 보고 몰려온 당혹감에 입을 열 수 없었다.

당혹감이 몰려온 이유는 ‘죽음의 경계’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다.

‘크로노스’가 ‘자네가 속에 감춰둔 말은 전해주도록 하겠네.’라고 말했어도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라면 그냥 무시할 줄로만 알았다. 당시 내가 속에 감춰둔 말은 서울 전역에 강남 쪽의 실험실을 파괴하라는 ‘후원 미션’을 뿌려달라는 것.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는 회사 측을 후원하는 초월자들을 적으로 돌리면서 굳이 내 부탁을 들어줄 초월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플레이어 따위가 초월자에게 그런 부탁을 한다며 무례하다고 여기지만 않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죽음까지 벗어나는 걸 보고 나면 내 부탁을 순순히 들어줄 거라더니, 정말 서울 전역에 ‘후원 미션’을 뿌려주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등록한 ‘후원 미션’을 수락합니다.]

“이런 후원 미션을 주신 초월자님이 계신다는 건 좋은데 수락하는 헌터들이 있을까요?”

“거의 없겠지. 그래도 상관없어. 우리도 강남 쪽엔 가지 않을 거니까.”

“뭐야, 이왕 투기장 망친 김에 실험실까지 망가뜨리는 거 아니었어?”

주인장은 우리의 다음 행보가 당연히 강남에 있는 실험실이라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저희는 공덕에 있는 실험실로 갈 거예요. 강남 쪽은 그다음이에요.”

“굳이? 후원 미션도 줬겠다 강남에 갔다가 공덕으로 가는 게 낫지 않겠어?”

“서울 전역에 이런 후원 미션이 뿌려진 상황에서 투기장을 공략당했다는 것까지 알게 되면, 회사 측도 긴장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렇겠지. 어쩌면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의 후원을 받은 세력이 회사를 공격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

주인장은 ‘후원 미션’을 뿌려준 타이밍이 절묘했다며 다시 한번 감탄했다.

“그럼 회사 측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 같으세요?”

“클리어 조건이 강남 구청 지하의 실험실을 파괴하는 거니까, 그곳을 방어하려고 헌터들을 집중시킨다?”

“정답. 강남 쪽에 헌터를 집중시키면 상대적으로 공덕 쪽 실험실을 지키는 헌터들이 줄어들 테니까, 저희는 그 틈에 공덕 쪽을 치는 거죠.”

“전부터 느꼈던 건데, 너 머리 좀 굴러가네.”

주인장은 흥미롭다는 듯 날 바라보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근데 네가 잘못 생각한 게 하나 있어.”

“잘못 생각한 거요?”

“후원 미션을 수락하는 헌터, 네 생각보다 많을 거야.”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의 ‘후원 미션’이 주어지고 두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투기장에 남았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여기서 지내던 사람들에 우리 일행과 붙잡혔던 선수들까지 더해지니 대장간은 꽤 북적거리게 되었다.

주인장은 돌아온 이들이 쉴 수 있는 공간부터 마련해주었다.

“몰골을 보아하니 일단 다들 쉬어야겠네. 우석아, 근처 점포들 열쇠 줄 테니까 쉴 공간으로 내어 줘. 씻어야 하는 사람들한텐 화장실 위치 알려주고. 참, 어떤 인간처럼 의자에 검은 피 다 묻히면서 자지는 말라고 전해주는 거 잊지 마.”

‘데스웜’이 판 거대한 구덩이를 완전히 메꾼 뒤 부대장의 움직임이 전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왔으니 다들 상당히 피곤할 테다. 지금은 굳이 무리해서 실험실을 공략할 방법을 논의하기보단 주인장의 말에 따르는 게 나을 것 같다.

“맞아요. 큰일 하나 끝냈는데, 새로운 시련이 주어지기 전까진 푹 쉬죠.”

주인장의 눈치를 살피자, 그녀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 여기서 쉬어도 된다는 의미인 것 같다.

“동현 오빠, 저희한테 맡기고 들어가서 쉬세요.”

동현이 형에게 업혀서 자는 중인 김화영을 이화와 함께 받아드는데 갑자기 주인장이 망치를 집어 들었다.

“쟤 뭐야? 왜 여기 있어?”

주인장의 망치가 겨누는 것은 노인에게 업혀 있는 여자아이.

“애 깨겠네. 조용히 말하게나.”

노인은 주인장이 든 망치를 살포시 잡고는 옆으로 밀쳤다.

“애들? 내 눈에만 사람 목숨을 갖고 노는 박 씨 남매로 보이는 건가?”

“이제 겨우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의 아이네. 제대로 된 가르침 없이 어린 나이부터 강이란 세력에 방치되어 있었으니 하면 안 되는 것을 배우지 못했을 뿐이야.”

주인장과 노인의 말다툼에 대장간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옆에 다가온 수연이에게 저 여자아이는 어떻게 데려오게 되었냐고 조용히 묻자, 이미 투기장에서도 한바탕 말다툼이 있었다고 했다.

“쓰러진 강이란 세력의 헌터 중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데, 박 씨 남매 모두 숨이 붙어 있더라고.”

“둘 다 숨이 붙어 있었다고? 그러면 남자아이는 어디 있어?”

“그 아이는 깨어나자마자….”

수연이는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자기가 약해서 부대장이 죽었다면서 그 자리에서…. 온몸이 파래지더니 그만….”

“전자발찌에 달린 독을 주입하는 장치를 작동했나 보네. 저 여자애는?”

“남자아이랑 다르게 여자아이는 깨어나지 않았어. 그래서 우리랑 같이 붙잡혀 있던 사람 중 한 분이 죽이려고 나섰는데, 뭐가 옳은지 배울 기회는 주셔야 한다며 임성윤 헌터님께서 말리는 과정에서 말다툼이 좀 있었어.”

그 후엔 여자아이는 본인이 책임지겠다며 여기까지 데려왔다고 한다.

“이미 사람 몇은 죽였을 텐데, 배우지 않으면 그래도 되는 건가?”

“본인이 제대로 반성하게 만들고 죄를 뉘우치게 해야지. 이렇게 어린아이한테까지 죽음을 죽음으로 갚게 할 필욘 없지 않나.”

주인장과 노인의 대치가 이어지는데 송태섭이 끼어들었다.

“아저씨, 또?”

그런 그는 진심으로 슬픈 듯 보였다.

“태섭아, 이건 말이지.”

“이번에도 수진이 때문인 거죠?”

“그런 게 아니야.”

“수진이는 아저씨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더 이야기해야 해요. 수진이가 죽은 건 전부 다 그 강이란 자식 때문이라고요.”

그 말을 끝으로 송태섭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허락은 해줬지만, 딱 하루야. 더는 안 돼.”

“네, 저희가 잘 이야기해볼게요.”

결국 주인장은 점포에 가두어두는 조건으로 하루 정도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머물러도 된다고 허락했다. 내일이 된다고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생각날진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 하루만큼은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노인도 그렇고, 나도 하루 정도는 쉴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임성윤 헌터한테 이야기하고 올 테니까 오빤 좀 쉬고 있어.”

이화가 주인장의 말을 전한다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 뒤를 따라 일어서는데, 주인장이 팔을 붙잡았다.

“우린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았을 텐데.”

“할 이야기라면….”

“지인 소개 안 받을 거야?”

“받아야죠.”

주인장은 눈을 굴리며 대장간 안의 사람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망치를 챙겨 들었다.

“저기 저 애만 데리고 아래층으로 조용히 내려와.”

“저 애라면?”

“교복 입은 여자애.”

고개를 끄덕이자 주인장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아야, 우석이랑 가게 잘 보고 있어.”

“어디 가시게요?”

“우리 괴롭히던 놈들도 사라졌는데, 맘 편히 산책이나 하고 오게.”

“알겠습니다.”

주인장이 대장간에서 나간 뒤, 5분쯤 후에 이나은을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중요한 일이 이분 만나는 거였어요? 그냥 대장간에서 이야기해도 되는 거였잖아요.”

“따라오기나 해.”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주인장은 이나은의 말을 무시한 채 곧장 상가 밖으로 나갔다. 그에 어깨를 으쓱하며 뒤를 따르니 이나은도 결국 우리를 따라 나왔다.

목적지는 상가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용산역 근처의 파출소로 들어가고 나서야 주인장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이야기해주었다.

“노들섬. 가본 적 있어?”

“처음 들어봤어요.”

나와 이나은 모두 고개를 젓자 주인장은 꽤 멋진 곳이라며 기대하라고 했다.

“혹시 지금 저희가 가는 곳이 그 섬이에요?”

“맞아. 여기 어디 있을 텐데.”

주인장은 캐비닛을 하나하나 열어보더니, 제일 구석의 캐비닛을 확인하고 우리를 불렀다.

“여기야.”

주인장 옆에 쪼그려 앉으니 그녀는 숫자를 중얼거리며 캐비닛을 여닫고를 반복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여덟, 아홉. 됐다. 이제 셋 세면 동시에 캐비닛 안에 손 집어넣는 거야. 알겠지? 하나, 둘, 셋.”

주인장은 대답할 겨를도 없이 숫자를 세더니 캐비닛에 손을 집어넣었다. 얼떨결에 캐비닛 안에 손을 집어넣으니 곧 그 안에서 무언가 나를 잡아끄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이상한데요?”

“맞다. 멀미할 수도 있다.”

잡아끄는 느낌이 점차 강하게 들더니, 갑자기 훅하고 캐비닛 쪽으로 몸이 끌려갔다.

완전히 캐비닛 안으로 몸이 끌려가자 문이 닫히고,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감각이 다시 돌아왔을 땐 몸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멈추고 싶었으나 나를 돌리는 힘엔 저항할 수 없었다. 그렇게 1분가량 돌고 나니 주인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뒤를 돌아보니, 캐비닛 문을 연 채 주인장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뭐였던 거예요.”

비틀거리면서 나온 이나은을 부축하며 주인장이 답했다.

“순간이동 장치 같은 거래. 그 인간, 손재주 하난 좋아서 별의별 걸 다 만든다니깐. 어쨌든 여기가 노들섬이야.”

주인장의 뒤쪽으로 강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 보였다. 조그만 집이 다닥다닥 달라붙은 마을 쪽엔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마을이 아직 남아 있다고요?”

마을 구석에서 아이들이 술래잡기하는 모습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자, 주인장은 기대 이상이지 않냐고 뿌듯해했다.

“습격은 한 번도 안 받은 거예요?”

“여기 촌장님이 환각 스킬을 쓰거든. 섬 전체에 환각 스킬을 걸어 두어서 바깥에서 보면 황폐한 섬으로 보이게 해뒀대. 그렇게 다른 헌터들의 관심에서 벗어났다고 하더라고.”

주인장은 지인 소개부터 해주겠다며 마을 쪽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저기 파란 건물 보이지? 저기가 마을 회관이거든. 나랑 같이 왔다고 하면 들여보내 줄 거야. 거기서 촌장님하고 이야기 나누고 있어. 그러면 곧 지인 데려와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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