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선전포고(12)]
마을 입구의 갈림길 앞. 주인장은 언덕 위에 있는 파란 건물 쪽으로 우리의 등을 떠밀고 본인은 반대편 길로 가버렸다.
주인장은 이 마을에 자주 들락거린 모양인지 지나가는 사람들과 살갑게 인사하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길을 나아갔으나, 그녀와 달리 우리는 완전히 이방인인 입장. 천막과 텐트 사이에 덩그러니 남겨진 우리는 주민들의 경계하는 눈빛을 받아야만 했다. 심지어 몇몇은 뛰어놀던 아이들을 부르더니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기까지 했다.
“난감하네.”
조그만 마을에서 멸망 이전의 산물이라곤 파란 건물 밖에 남아 있지 않아 목적지까지 가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주민들의 눈초리에 난감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함정은 아니겠죠?”
그렇게 묻는 이나은은 주먹을 꽉 쥐고 있다. 누군가 공격해온다면 바로 반격하겠다는 기세다.
“함정은 아닐 거야.”
지금까지 주인장의 태도를 보았을 때 강이란 세력을 혐오하는 그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투기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돕기도 한 거고. 그런 그녀가 부대장을 쓰러뜨려 준 우리에게 함정을 팠다? 그러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함정이었다면 굳이 우리더러 마을 회관에 가라 할 이유가 없다. 그냥 여기 온 순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습격했으면 그만이니까.
“낯선 사람이 와서 경계하는 거겠지.”
“그렇겠죠?”
“일단 마을 회관에 가 있으라고 하셨으니까, 거기 들어가 있자.”
“네. 그래도 경계는 계속할게요. 신혜진 헌터는 믿을 수 있다고 해도, 마을 사람들까지 섣불리 믿기는 좀 그러네요.”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눈빛 속에서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언덕 위로 올라갔다. 이나은은 자신이 말했듯 주먹을 쥔 채 끊임없이 주변 동태를 살폈으나, 다행히 파란 건물에 다다를 때까지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 섬엔 괴수도 없나 보네.”
회관 앞, 이나은은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내심 부럽다는 투로 말했다. 무방비한 상태로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보고 한 말이었다.
입구를 지키던 헌터들이 있던 김요한 세력의 주둔지에서도 아이들이 저렇게 돌아다니진 못했다. 애당초 멸망 이후 살아남은 아이들이 저렇게 뛰어놀 정도로 천진난만하지도 않다. 보통은 김아람처럼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아 있기 마련이다 보니 술래잡기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지긴 했다.
“그렇다네. 여기는 괴수로부터 완전히 안전한 곳이지.”
갑자기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지팡이를 짚은 한 할아버지가 서 계셨다.
“우리 마을엔 무슨 일인가?”
할아버지의 곁엔 네 명의 헌터가 무기를 장비한 채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도 파란 건물에서 한 명의 헌터가 허겁지겁 나오는 걸 보니, 다들 우리가 이곳에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하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요.”
기척을 못 느꼈다며 이나은마저 혀를 내두르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실력의 헌터들인 것 같다. 내가 느끼기에도 한 명, 한 명에게서 풍기는 아우라가 상당하다.
“어떻게 할까요?”
“나한테 맡겨.”
자신과 같이 왔다고 하면 들여보내 줄 거라는 주인장의 말을 떠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저희는 신혜진 헌터랑 함께 마을에 왔어요. 신혜진 헌터가 지인을 데려오는 동안, 마을 회관에 있으라고 하셨는데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우리 딸이 왔다고? 어쩐지 마을이 떠들썩한 것 같더니만.”
차분히 설명하자 할아버지는 헌터들 쪽에 지팡이를 휘저었다. 그러자 헌터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지막에 허겁지겁 뛰쳐나온 헌터만이 남았다.
“우리 딸의 지인인 것도 모르고, 환각 스킬부터 쓴 건 미안하네.”
“괜찮아요. 별일 없었으면 된 거죠. 전 정현이고, 이쪽은 이나은이라고 해요.”
먼저 이름을 밝히니 할아버지는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난 이 마을의 촌장, 신세환이라고 하네.”
촌장과 악수하자 그는 뒤편의 헌터에게 말했다.
“동우야, 손님들 드릴 차 준비해둬라.”
“네.”
헌터는 활을 내려놓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문지방에 발가락을 찧었는지 동동거리는 그를 보고 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아들은 언제 좀 차분해지려나…. 저런 아이가 대장을 맡고 있고. 영 불안하네그려.”
혀를 몇 번 차던 촌장은 다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우리 딸하고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지? 또 강이란 세력 고것들 욕하다가 친해진 사이인가?”
이나은과 눈빛을 나눈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장간에 가게 된 것부터 주인장과 나눈 약속. 그리고 투기장에서 부대장을 쓰러뜨린 것까지 차례로 말해주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나 강한 헌터를 자네들이 쓰러뜨렸단 말인가?”
“네. 고생하긴 했지만, 확실히 쓰러뜨렸어요.”
“그놈들이 용산역에 자리 잡은 이후로 바깥에 나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젠 안심하고 부족한 물자를 구하러 육지로 갈 수 있겠군. 정말 고맙네. 한시라도 빨리 마을 사람들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야겠구먼. 다들 좋아하겠어.”
촌장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을 쪽을 지팡이로 가리켰다.
“마을 사람들 대다수가 그놈들을 피해서 여기로 온 신세거든. 멸망 직후의 서울은 끔찍했다네. 탈옥한 자들이 본인의 힘에 심취해 약자들을 죽이는 세상이었지. 아마 괴수보다 그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더 많을 거야. 그런 상황이니 다들 서울에서 벗어나기 바빴지. 그러다 우린 운 좋게 노들섬으로 흘러들어온 거고.”
“아버지, 차 다 끓였어요.”
“그렇다는군. 이야기는 들어가서 계속하지.”
촌장이 앞장서 파란 건물로 들어섰다. 천막, 텐트로 이루어진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게 홀로 현대식 건축물인 게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일단 촌장을 따라 건물 안에 들어갔다.
“이 건물도 마을 사람들이 지은 거예요?”
비록 불은 들어오지 않지만, 형광등이 천장에 배치되어 있고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곳곳에 있는 것이 신기했는지 이나은이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촌장은 이 섬에 처음 왔을 때부터 이 건물은 멀쩡한 상태로 있었다고 답했다.
“섬의 다른 건물들은 완전히 무너져서 쓸 수 없는 상태였네. 그래서 처음엔 다들 여기서 생활했지. 마을이 지금 모습처럼 변한 건 용감한 몇몇 사람들이 육지에 가서 텐트나 천막을 구해온 다음의 일이네. 저기, 뒤편에 놓인 다리 보이나?”
우리가 들어온 문의 반대편 벽. 통유리로 된 벽을 통해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니 촌장의 말대로 기다란 다리가 보였다. 비록 육지로 이어진 쪽이 모두 끊어져 있었으나, 섬을 관통한 다리는 과거 육지와 이곳에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려주었다.
“저 다리 너머 숲에 가면 멸망 이전에 있었던 건물들의 잔해를 볼 수 있다네. 우리가 거기에 옮겨두었거든.”
“잔해를 옮겨두었다고요? 강에 빠뜨려도 되잖아요?”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만, 내 환각 스킬이 펼쳐진 범위는 정확하게 섬에 한정되어 있다네. 강에 잔해를 빠뜨리는 걸 강이란 세력의 헌터들이 보기라도 한다면 큰일이 날 수 있으니, 힘들더라도 잔해들을 직접 옮겼지.”
“아버지, 일단 앉아서 이야기 계속하시죠. 손님들, 다리 아프겠어요.”
촌장의 아들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건네주며 우리를 자리에 앉혔다.
“동우야, 이분들께서 용산역에 있는 강이란 세력을 몰아냈다고 하더구나.”
“네? 부대장을 몰아낸 거예요?”
“그러니 네 동생이 이분들을 마을로 데려온 거겠지.”
촌장의 말을 들은 남성은 흥미롭다는 듯 우리 앞에 앉아 여러 질문을 던졌다. 부대장은 어떻게 쓰러뜨린 거냐, 투기장에 붙잡혀 있던 선수들은 어떻게 되었나 등. 질문에 하나하나 답해주는데, 촌장이 끼어들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앞으로 이분들이 어떻게 움직일 건지가 더 중요한 거 아니겠나?”
“아버지 말이 맞네요. 두 분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가요? 강이란 세력과의 싸움을 계속 이어가실 생각이신가요? 혹시 두 분도 ‘후원 미션’을 수락하셨나요?”
“‘두 분도’라면 그쪽은 ‘후원 미션’을 수락하신 거예요?”
이나은의 물음에 남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실수라도 한 듯 촌장의 눈치를 살폈다. 고민하던 촌장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고서야 남성은 말을 이어갔다.
“사실 저희 마을에 실험실을 파괴하라는 ‘후원 미션’을 수락한 헌터들이 꽤 있어요. 나름대로 강이란 세력을 서울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저항군 소속 사람들인데, 현실적으로 저희끼리 그들을 몰아내는 건 무리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랬는데 부대장을 쓰러뜨린 분들하고 함께하면 실험실을 파괴하는 것쯤이야 아무 문제 없겠네요. 이참에 저희랑 함께하시는 게 어때요?”
힘을 합치자는 제안을 한 남성의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으나 촌장의 눈빛은 정반대였다. 그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난 반댈세. 실험실을 공격하는 순간, 회사의 반감을 사게 될 텐데. 우리로서는 그들을 상대할 수 없지 않나. 회사가 우리에게 관심을 둔다면, 노들섬에 환각 스킬이 걸려 있다는 것도 금방 알아챌 거고. 그러면 마을의 안전은… 장담할 수 없네.”
“하지만 이대로면 이 섬에 갇힌 신세란 건 변하지 않잖아요.”
“섬에 갇혔다? 괴수도 없고, 적도 없는 낙원에 갇히는 게 오히려 좋은 거 아니겠나?”
“낙원이라고요? 지금껏 저희가 시련을 어떻게 해결해왔는지 기억 못 하시나 본데!”
“그만! 시련에 관해선 이미 투표로 모두가 합의 본 내용이잖나.”
말다툼을 시작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고 있는데, 문을 세차게 두드리며 주인장이 들어왔다. 그녀의 뒤에는 안경을 쓴 마른 사내가 따르고 있었다.
“두 사람 또 싸워?”
주인장의 비꼬는 말투에 촌장과 남성은 입을 다물었다.
“자, 여기 내 지인. 네 신기를 봐줄 거야.”
마른 사내는 아무런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주인장이 재촉했다.
“저 친구한테 반지 맡겨둬. 남의 물건을 훔쳐 갈 놈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반지를 건네주자 사내는 안경을 살짝 들쳐 나를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건물 밖으로 나섰다.
“워낙에 말주변 없는 친구야. 너희가 이해 좀 해.”
“반지를 갖고 나가셨는데….”
“말하는 걸 깜빡했네. 저 친구가 반지를 살피는 데 하루 정도 시간이 걸린다고 했거든. 그동안 이 마을에서 하루 쉬고 있어. 너희 쉴 집은 이미 구해놨어.”
“여기서 하루 쉬고 가라고요?”
“반지에 관한 이야기는 내일 해도 되잖아?”
새로운 시련이 시작되기까지 아직 나흘이나 남은 상태. 어차피 시련의 클리어 조건을 확인한 후에 실험실을 향해 움직이려 했으니 여기서 쉬어도 상관은 없긴 하다. 오히려 좋다면 좋다.
이곳이라면 강이란 세력이나 괴수의 방해를 받지 않고 푹 쉬며 계획을 다듬을 수 있을 거다. 저항군이란 사람들을 만나볼 수도 있을 것이고.
다만, 가게에 남아 있는 일행들이 마음에 걸린다.
“그러면 저희 일행은요?”
“걱정하지 마. 난 다시 가게로 돌아갈 거니까, 내일 점심쯤에 네 일행 데리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게. 아버지, 그래도 되죠?”
부대장을 쓰러뜨린 사람들이면 언제든 환영한다며 촌장은 쉴 곳을 내일까지 더 마련해두겠다고 말했다.
“그러면 더 해결할 문제도 없으니, 난 돌아갈게. 두 사람, 부대장 쓰러뜨리느라 고생했으니까 오늘 하루는 푹 쉬고 내일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