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선전포고(13)]
우리가 쉴 집은 마을과 거리가 있는 곳에 따로 떨어져 있었다. 주인장은 집 위치를 알려주며 안 쓰는 물건 모아두는 창고라고 했는데, 그 말대로 천막에 들어서자 널브러진 잡동사니들이 보였다.
“좀 치워야 잘 수 있겠네요.”
“급한 대로 구하신 천막이라니까 어쩔 수 없지. 촌장님이 내일 마을 사람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깨끗한 곳으로 옮겨준다니까 불편하더라도 오늘 하루만 참자.”
“불편하긴요. 저희 평소엔 여기보다 못한 곳에서 지냈잖아요. 맨바닥도 아니고 찬 바람을 막아주는 천막이라도 있는 게 어디예요.”
“하긴. 괴수도 없는데 이 정도면 충분하지.”
잡동사니를 치우고 나니 생각보다 넓은 공간이 확보되었다. 먼지를 좀 마시긴 하겠지만 이 정도 크기면 대여섯 명 정도는 충분히 지내고도 남을 거다.
“불침번, 필요할까요?”
“신혜진 헌터가 보장한 곳이니까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아까 있었던 촌장과 아들의 말다툼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낯선 장소에 단둘이 남겨진 건데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혹시 모르니까 내가 먼저 불침번 설게. 눈 좀 붙여둬.”
“감사합니다. 평소처럼 두 시간 있다가 깨워주세요.”
부대장과 싸우며 쌓인 피로가 아직 남아 있는지 이나은은 구석에 자리 잡더니 얼마 안 가 잠들고 말았다.
“그동안 제대로 피로를 푼 적이 없으니까, 이번 기회에 이 마을에서 푹 쉴 수 있으면 좋겠네.”
서너 시간 있다가 이나은을 깨우기로 마음먹으며 천막 밖으로 나와 부서진 벤치 위에 걸터앉았다. 그렇게 마을 쪽을 응시하는데 저 멀리 누군가 천막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무언가를 바리바리 싸 들고 오는 사람은 촌장의 아들과 군복을 입은 한 남성이었다.
천막 밖에 나와 있는 나를 본 듯 촌장의 아들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그 자리에 멈추어 서 몸에 아무런 무기가 없음을 암시하는 몸짓을 보였다. 아무래도 불침번을 서고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접근해도 괜찮다는 의미로 고갯짓을 하고 나서야 두 사람은 천막 앞까지 다가왔다.
“손님분은 안 피곤하세요? 주무실 거 같아서 조용히 물건만 두고 가려고 했었는데, 깨어 계실 줄은 몰랐네요.”
“밤하늘이 예뻐서요. 멸망 이후에 괴수 걱정 없이 별 구경할 일이 없었거든요.”
호의를 베푼 이들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진 않아 에둘러 말을 돌리고 물건을 살폈다. 두 사람이 가져온 것은 물이 담긴 페트병을 비롯한 옷가지 등의 생필품이었다.
“두 분 가져온 짐이 아예 없길래 챙겨왔어요.”
“짐이요?”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전부 ‘특급 냉장고’ 안에 넣어두다 보니 빈손으로 마을에 들어왔다고 생각한 듯하다.
“사정이 있긴 한데. 일단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닙니다. 감사한 건 저희 쪽입니다. 손님분들이 용산역을 점거한 무리를 제거해준 덕분에 이제 이런 물품을 더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손님분들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육지로 나가지 못했을 겁니다.”
“육지랑 이어진 통로가 용산역 쪽 파출소 한 군데뿐인 건가요?”
용산역에 강이란 세력이 투기장을 만든 탓에 육지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을 떠올리며 묻자 군복을 입은 남성이 그렇다고 답해주었다.
“그러면 그동안 필요한 물자들을 어떻게 구해오신 거예요?”
“식량의 경우엔 직접 재배하고 있고, 그 외 물자는 신혜진 헌터님께서 운반해왔습니다.”
그가 덧붙인 말에 따르면 주인장은 투기장에 장비를 납품하고 돌아올 때 종종 파출소에 들러 캐비닛을 통해 물자를 옮긴다고 한다.
“신혜진 헌터님이 안 계셨다면 생활에 있어 불편한 점이 많았을 겁니다.”
“정말 그랬겠네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의문이 생겼다. 왜 주인장은 촌장과 함께 노들섬에서 지내지 않고, 가게에서 지내던 걸까?
“신혜진 헌터는 물자를 수송하려고 육지에 남으신 건가요?”
“그런 건 아니에요.”
촌장 아들의 얼굴에 일순간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멸망 직후의 상황 기억나세요?”
“네. 잊을 수가 없죠.”
먹방 하다가 멸망을 맞이하게 된 걸 떠올리니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밥 먹고 있는데 뜬금없이 세상이 망해있더라고요.”
“저랑 비슷하네요. 세상이 망했을 때, 저와 아버지는 용산역에 있었어요. 오랜만에 누나네 가족을 만나러 서울로 올라온 길이었거든요.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누나가 용산역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는데, 하늘이 완전히 핏빛으로 물들었어요. 그리곤 괴수들이 쏟아져 나왔죠.”
촌장 아들은 당시 있었던 일을 말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누나는 그때 매형과 조카랑 함께 용산역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필 쏟아져 나오던 괴수 중 하나가 세 사람 바로 앞에 떨어진 거예요.”
주인장의 남편은 별다른 저항조차 못 하고 괴수에게 곧바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헌터가 아니었던 누나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었겠어요? 조카라도 데리고 도망치는 게 최선이었죠. 그렇게 누나는 조카를 데리고 간신히 도망쳤는데, 각자 살길을 찾아 도망치는 사람들 무리에 휩쓸려 그만 조카의 손을 놓쳤대요.”
수많은 사람이 혼비백산으로 도망치는 난장판에서 주인장이 딸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며칠 동안 그 근처에서 버텼지만, 다시 조카를 찾지 못한 누나는 결국 홀로 저희 쪽에 합류하게 되었어요.”
촌장 아들은 안타깝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부터 누나는 용산 전자 상가에서 쭉 지냈어요. 매형이 운영하던 가게에 있으면 조카가 올 수도 있다면서….”
가게 위치를 옮길 수 없다는 이유가 딸을 기다리고 있어서였나.
괜한 이야기를 꺼내 분위기가 무거워진 것 같아 화제를 전환했다.
“같이 오신 분도 저항군이신 건가요?”
“맞습니다. 제 이름은 김태호입니다.”
“그러고 보니 손님분의 성함만 듣고 정식으로 절 소개하지 않았네요. 제 이름은 신동우, 저항군의 대장직을 떠맡고 있어요.”
신동우는 직책을 밝힌 뒤에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거창하게 조직 이름을 저항군이라 부르곤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진 못했어요. 인원도 많이 못 모았고요.”
“몇 명 정도 모으셨는데요?”
주인장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모양인지 신동우는 오늘 처음 보는 나에게 저항군에 관해 상세히 알려주었다.
“스무 명 남짓 정도 돼요. 더 모아 보고 싶었지만, 다들 강이란 세력한테 시달린지라 그들에게 맞서고 싶지 않아 하더라고요.”
많이 못 모았다기엔 스무 명 남짓이면 인원수가 꽤 된다. 저 정도 인원이 이번 실험실 공격에 함께 해준다면 큰 전력이 될 것이다.
“목표가 강이란 세력을 서울에서 몰아내는 거라 하셨죠?”
“목표는 그렇죠. 실상은 노들섬을 지키는 데에서 그치고 있지만요. 그래서 이번에 손님분들께서 적은 인원으로 투기장을 공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성했어요. 강이란 세력에게 지레 겁먹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던 건 아닌가 싶어서….”
“별다른 성과가 없다뇨. 서울 전체가 점령당할 동안, 노들섬 사람들을 강이란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신 것만으로도 대단하세요.”
“대단하다?”
조용히 있던 김태호가 분한 듯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닙니다. 저항군에 속한 사람 대다수가 강이란 세력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복수도 못 하고 여기 갇혀 있는 신세인데,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순 없습니다.”
신동우도 김태호랑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이번엔 강이란 세력에 대놓고 맞서려는 거 아니에요? ‘후원 미션’을 수락한 헌터들이 많다고 하셨잖아요.”
“네. ‘후원 미션’이 주어진 김에 맞서보려고요.”
“아까 함께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으셨죠? 그 대답 지금 해드려도 괜찮을까요?”
“당연히 괜찮죠.”
“날이 밝으면 저를 저항군 사람들 앞에 데려다주세요. 그때 한번 이번 ‘후원 미션’ 관련해서 작전을 짜 보죠.”
내 대답에 두 사람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알겠습니다. 모을 수 있는 사람들 최대한 모아서 저녁 즈음에 자리를 마련해보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이야기 마칠까요?”
“손님분을 너무 늦은 시간까지 붙들고 있었네요. 저희는 가볼 테니, 편히 쉬세요.”
주인장은 본인이 말했던 대로 점심시간 이후 나머지 일행을 데리고 왔다. 다만 거기에 노인은 없었다.
“임성윤 헌터는요?”
“신혜진 헌터가 아저씨가 데려온 여자애를 이 섬에 들일 순 없다고 하니까, 아저씨는 그 애랑 함께 가게에 남으셨어.”
“박다현 헌터는 정신 차렸어요?”
“어. 정신은 차렸는데, 겁먹었는지 떨기만 하더라. 그 모습 안쓰럽다면서 신혜진 헌터가 가게 옆 점포에서 며칠 더 지내도 된다고 하셨어. 물론 아르바이트생들을 감시역으로 붙이셨지만.”
“그렇구나. 저희는 저 천막에서 지내면 돼요.”
마을 회관 뒤편의 거대한 천막을 가리키자 송태섭은 살짝 놀란 듯했다.
“아홉 명이 지내기엔 살짝 큰 것 같은데?”
“마을 사람들이 오늘 오전에 세워주셨어요. 부대장을 쓰러뜨려 줘서 고맙다는 의미에서요.”
“어지간히 시달리셨나 보네.”
“그런가 봐요.”
일행을 이끌고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김화영이 바닥에 펼쳐진 이불을 껴안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 얼마 만에 이런 곳에서 지내는 거야! 허리 배길 일 없겠다!”
“여기서 얼마나 오래 있을 거야?”
이화의 물음에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왜? 더 있으면 안 돼?”
“다음 시련도 있고, 무엇보다 저희는 실험실로 나아가야 하잖아요. 여기서 오래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용산역을 돌파하긴 했어도 아직 더 큰 관문이 여럿 남아 있음을 말하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실험실엔 시련이 시작되는 날에 간다는 거지?”
“네. ‘후원 미션’이 주어진 만큼 실험실을 지키는 데에 강이란 세력 전원이 투입될 거예요. 강이란도 직접 실험실을 지키려 할 거고요. 부대장을 쓰러뜨리긴 했지만, 여전히 저희 전력이 강이란 세력에게 밀리는 건 사실이에요. 실험실을 공격하기 전에 작전도 제대로 짜고 정비도 해두죠.”
“동의한다.”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던 동현이 형이 본인의 뜻을 밝혔다.
“강이란 헌터는 부대장보다 강하겠지. 힘을 더 키워야 해.”
동현이 형의 말대로 온갖 공격이 통하지 않던 부대장을 수하로 부리는 대장 위치에 있으니 강이란은 무척 강할 테다. 지금까지 보아온 모습만 보아도 그러했고. 무엇보다 강이란은 머리가 좋다.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그를 쓰러뜨릴 수 없을 거다.
“그래도 저희한테 희소식은 있어요.”
김아람의 말에 나와 이나은을 제외한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현 헌터님과 이나은 헌터님은 먼저 이 섬에 오셔서 모르겠지만, 어제 가게에 꽤 많은 사람이 왔다 갔거든요.”
“많은 사람? 왜?”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신혜진 헌터님이 서울 전역에 제대로 소문을 퍼뜨렸더라고요. 고작 열 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부대장을 쓰러뜨리고 용산역을 차지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