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선전포고(14)]
우리가 부대장을 쓰러뜨렸다는 소문이 퍼지고 많은 이들이 ‘후원 미션’을 수락했다며 가게에 왔다 갔다고 한다.
“생각보다 저희를 도와줄 분은 많은 것 같아요. 용산역을 공략한 지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한 열 명 정도 되는 분이 저희를 돕겠다고 나섰으니까 며칠 뒤에는 더 늘지 않을까요?”
김아람의 말대로다. 잘하면 전력이 지금의 몇 배로 늘 수도 있다.
“희소식이긴 하네. 그 부분은 참고하고 있을게. 일단은 저녁 먹고 이야기 계속할까요? 이 섬에도 저희를 돕겠다는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이랑 그때 이야기하기로 했거든요.”
“오빠, 저녁 먹기엔 시간이 이르지 않아?”
“신세 지고 있으니 저녁 준비 정도는 도우려고.”
저녁 식사를 해결하고 나니 신동우가 사람들을 이끌고 왔다. 그들 중에는 어제 반지를 가져간 마른 사내도 있었다.
“물건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하겠대요.”
신동우는 마른 사내의 말을 전해주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 ‘후원 미션’ 관련해서 작전을 짜자고 하셨는데, 생각해두신 게 있으신가요?”
“작전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어요. 저항군은 스무 명 정도 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신동우가 데려온 사람의 수는 총 열둘. 스무 명 남짓이라기엔 한참 모자라다.
“섬 안에 있는 저항군은 이게 전부가 맞아요.”
“그 말은….”
“다른 인원들은 섬 밖에서 지내고 있어요.”
“그분들도 이번 작전에 참여할 수 있는 건가요?”
“네. 이미 누나를 통해서 연락 돌려뒀어요.”
“총 몇 명이나 되죠?”
“누나 포함 열 명이에요.”
그렇다면 저항군의 수는 스물셋.
거기에 우리 일행 열 명을 더하면 서른셋.
용산역에서 구출해낸 선수들이 모두 우리를 돕는다고 치면 마흔다섯.
마지막으로 주인장이 퍼뜨린 소문에 이끌려 온 사람들까지 더하면 총 쉰 명이 넘는 사람이 이번 작전에 참여하는 셈이다.
“그러면 그것부터 확실히 하죠. 저항군 여러분께선 이번 작전에 전원 참여하는 거 맞죠?”
“그건 모르지.”
제일 뒤편에 서 있던 여성이 말하자 그 주변의 사람들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홍수현 헌터!”
“‘후원 미션’을 수락하긴 했지만, 실제로 참여할지 말지는 작전을 들어본 이후에 결정할 거야. 난 대장과 달리 섣불리 움직이고 싶진 않거든. 작전에 나섰다가 전멸하면 이 마을은 누가 지킬 거지?”
여성의 말에 신동우는 입을 다물었다.
“회사가 우리를 눈엣가시로 생각하게 된다면 그땐 어떻게 할지 정돈 생각해둔 거지? 우리 대장은 강이란 세력에게도 쩔쩔매는 주제에 회사까지 상대할 자신이 있나 보네.”
신동우에게 들었던 것과는 달리 저항군 전체의 의견이 일치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들이 모두 작전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게 우선인가.
“지금 이 천막 안에 있는 제 일행들과 신혜진 헌터의 가게에 있는 사람들을 합치면 총 서른 명 정도 돼요.”
“뜬금없이 그건 왜?”
“실제로 참여할지 말지는 작전을 들어본 이후에 결정한다면서요. 결정할 수 있도록 작전을 이야기해드리는 거예요.”
“그래? 그러면 계속 이야기해봐.”
“저희는 다음 시련이 시작되는 날, 실험실을 공격할 거예요.”
시련 내용에 따라 일정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덧붙이며 저항군과 일행의 반응을 살폈다. 저항군은 예상외로 많은 인원이 공격에 참여한다고 생각했는지 약간은 환해진 표정으로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한편, 일행은 서른 명 정도 되는 인원이 실험실을 공격한다는 부분에서 다들 어리둥절했다.
“현아, 그 사람들하곤 아직 이야기 안 된 거 아니야? 실은 우리도 실험실 관련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본 적 없고.”
조심스러운 수연이의 물음에 속삭임으로 답했다.
“저 사람들을 작전에 끌어들이려고 블러핑 하는 거니까, 일행들한테 동참해달라고 전해줄래?”
“알겠어.”
내 부탁대로 수연이가 일행에게 말을 전하는 동안, 다시 저항군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부대장이 쓰러진 동시에 투기장까지 공략당했는데, ‘후원 미션’의 클리어 조건으로 강남 실험실 파괴가 제시된 상황이에요. 그런 만큼 실험실을 지키는 데에 남아 있는 강이란 세력이 전부 투입될 거예요. 아마 대장도 투입될 가능성이 크겠죠.”
“정확한 판단이다. 실험실을 지키는 조건으로 회사가 강이란 세력이 서울을 차지할 수 있게 도운 거다. 그러니 실험실을 지키는 데 강이란 세력 전원이 투입되는 게 당연하다. 거기에 회사 인원도 몇 더 투입된다고 봐야 할 거다.”
내 말에 마른 사내가 어눌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에 저항군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내부 사정을 전부 다 꿰뚫는 듯한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덕분에 이야기를 진전시킬 수 있었기에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실험실은 공덕과 강남 두 곳. 그중 강남 쪽에 실험실을 지키는 인원이 몰릴 거예요.”
“당연하지. ‘후원 미션’이 지시하는 장소가 강남이니까.”
“맞아요. 그래서 저흰 강남 실험실 쪽을 공격하는 시늉을 하면서 실제론 공덕 실험실을 칠 생각이에요.”
“빈집털이하겠다는 거네. 근데 공격하는 시늉만 하면 너무 티 나지 않을까?”
“시늉을 좀 과하게 할 거예요. 강이란 세력 전체의 시선을 끌만큼, 강남 실험실 쪽에 많은 인원을 투입해서 실제로 전투를 벌일 거거든요. 그러려면 여러분들이 이번 작전에 협력해줘야만 해요. 적어도 마흔 명은 되는 인원에게 이 역할을 맡기고 싶거든요.”
제안에 저항군 사람들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의 결론을 참여한다는 쪽으로 기울이기 위해 한 마디 덧붙였다.
“실험실을 공격했다가 회사의 시선이 노들섬에 꽂히면 어떻게 할지 걱정이라면 그 부분은 신경 쓰지 마세요. 공격 전, 선전포고를 할 거예요. 모든 건 제가 회사 측 인물과 강이란 헌터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꾸민 일이라고요.”
“네? 그러면 모든 화살이 손님분께 향할 텐데….”
“오히려 전 좋아요. 그래야만 제가 찾는 인간이 기어 나올 테니까요.”
만약 선전포고한 뒤에 작전이 성공해서 공덕 실험실이 파괴된다면, 삼촌은 내 앞에 나오지 않고는 못 배길 거다.
삼촌은 자신이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삼촌이 현재 붙잡은 생명줄은 회사의 간부라는 직책. 본인 때문에 회사의 자산이나 다름없는 실험실이 공격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 직책을 위협받을 거다. 따라서 본인이 책임을 진다면서 우리를 만나러 올 게 분명하다.
만나러 와서는 특유의 화법으로 우리 돈을 떼먹은 걸 사과하려고 할 텐데, 그때 삼촌을 인질로 붙잡기만 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회사의 숨통을 끊을 수단이 마련된다.
“나름 괜찮은 작전이네. 그래도 혹시 우리끼리 이야기해봐도 될까?”
“네. 언제 이야기 결과를 알 수 있을까요?”
“내일 아침.”
홍수현은 본인들끼리 이야기해보겠다며 저항군 몇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신동우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제대로 된 작전은 내일 짜보자며 남은 저항군 인원과 함께 그 뒤를 따랐다. 그러고 나니 저항군 중 남은 사람은 마른 남자뿐이었다.
마른 남자는 저항군 모두가 나간 것을 확인한 뒤에 나를 따로 불러냈다. 그는 반지를 내게 돌려주며 말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읽어봤나?”
“만화로 된 거는요.”
“그리스 로마 신화. 투명. 짐작 가는 거 없나?”
“음…. 어…. 신화 쪽이면 동생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네요.”
[‘무형의 관리자’님이 실망합니다.]
“안 된다. 반지를 사용하려면 네가 이름을 알아내야 한다. 힌트를 주겠다. 그리스 로마 신화. 지옥의 신. 투명. 이래도 짐작 가는 거 없나?”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지옥의 신이 하데스란 것쯤은 알고 있다. 남은 건 하데스와 투명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찾는 건데.
“그러고 보니 투구 같은 게 있지 않았어요?”
“정답이다. 정확한 이름은 ‘퀴네에’.”
“‘퀴네에’. 어디서 들어본 기억은 있네요.”
[‘무형의 관리자’님이 만족합니다.]
순간 손에 들린 반지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글씨가 새겨졌다.
[‘??? ???? ??’ 장비가 이름을 드러냅니다.]
[‘무형의 관리자의 반지’]
- 사용 가능 직업 : 전 직업
- 장비 등급 : 신기
- 내구도 ∞ 공격력 0 방어력 0
- 착용자는 ‘은신’ 상태가 됩니다.
[‘무형의 관리자’님이 플레이어 ‘정현’에게 ‘퀴네에’의 이용 자격을 부여합니다.]
[‘무형의 관리자의 반지’가 진정한 힘을 드러냅니다.]
[‘퀴네에’]
- 사용 가능 직업 : 전 직업
- 장비 등급 : 신기
- 내구도 ∞ 공격력 0 방어력 0
- 착용자의 모습과 기척을 지웁니다.
- 현재 이용 자격은 플레이어 ‘정현’에게 있습니다.
[‘호색한 찬탈자’님이 당신을 의심스럽게 바라봅니다.]
[‘호색한 딸바보’님이 ‘무형의 관리자’님에게 경고합니다.]
빛이 가라앉자 반지는 사라진 후였다. 대신 내 손에 들려 있는 건 황금빛 투구.
“이러면 내 할 일은 다 했다.”
“반지만 보시고 장비의 이름이 ‘퀴네에’란 걸 알아내신 거예요? 어떻게 알아낸 거예요? 반지도 신화에서 나오나요?”
“신화에 나오진 않는다. 이름을 알아낸 건 고유 능력 덕분. 더 자세히 말해주진 않을 거다. 그럼 신기를 한 번 착용해보겠나?”
조심스레 투구를 쓰자 마른 남성은 놀라며 안경을 들치었다.
[‘퀴네에’로 인해 다른 존재가 플레이어 ‘정현’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게 됩니다.]
“한번 돌아다녀 줄 수 있나? 그러면 어디에 있는지 맞혀 보겠다.”
남성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는데, 그는 엉뚱한 곳만을 짚었다.
“이번엔 일부러 소리 내면서 돌아볼 수 있나?”
그의 요구대로 손뼉을 쳐 보았는데,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이번에도 그는 엉뚱한 곳을 짚었다.
“속이 불편하진 않나?”
“네. 괜찮아요.”
“벗어도 된다.”
투구를 벗자 그는 다시 한번 물었다.
“속이 불편하진 않나?”
“아까 속은 괜찮다고 대답해드렸는데, 안 들리셨나요?”
“네 대답은 내게 들리지 않았다. 그 신기는 착용자가 내는 소리까지 숨겨준다. 잘 이용해라.”
“감사합니다. 혹시 저 말고 다른 사람도 신기를 사용할 수 있을까요?”
“신기는 이용 자격이 없다면 쓸 수 없다.”
“안 된다는 말이네요. 알겠습니다.”
볼일이 끝난 남성은 잠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뜬금없는 말을 물었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나?”
진의를 알 수 없어 답을 하지 않고 있자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실험실 파괴한다는 말.”
“네. 진심이었어요.”
“키가 없으면 실험실엔 들어갈 수 없다. 이게 그 키다.”
남성은 카드키를 건네주었다.
“그건 강남에 있는 실험실의 카드키다.”
“이걸 왜 그쪽이?”
“실험실이 처음 세워졌을 때, 거기서 일했었다.”
명함을 건넨 뒤, 그는 그대로 마을 쪽으로 가버렸다. 명함에는 내가 찾던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백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