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선전포고(15)]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리 일행과 저항군은 마을 회관에서 다시 모이게 되었다. 모두가 모인 가운데, 제일 먼저 입을 연 건 신동우였다.
“어제 회의 결과, 저항군은 손님분의 작전에 참여하기로 했어요. 그렇죠?”
그는 동의의 뜻을 구하듯 홍수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홍수현은 회의 결과를 제대로 전달하라면서 신동우의 말을 정정했다.
“우리 대장이 저항군 전부가 참여할 것처럼 말하긴 했는데, 그건 아니야.”
“그건 아니라면?”
“저항군 중 네 명은 여기 남아서 마을을 지킬 거야. 작전에 실패해서 전멸했을 때를 대비하는 건데. 그 정도는 상관없지?”
“그 넷이 빠지면 전력 소모가 큰가요?”
이나은의 물음에 A급 헌터 하나와 C급 헌터 셋이 여기에 남을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손님분들이 못 미더워서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니란 거 알아주세요.”
저항군 전체 인원에서 넷을 빼면 열아홉. A급 헌터가 빠진 건 아쉽긴 하지만 이 정도 전력이 추가된 것으로도 감지덕지다.
“작전에 참여하지 않는 네 분은 돌려보낼게요. 마을에 일손이 부족하거든요.”
신동우가 뒤편에 서 있는 저항군 쪽에 눈짓하자 백민기를 포함한 헌터 넷이 회관 밖으로 나섰다. 의외로 홍수현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본인을 바라보는 것을 눈치챘는지 홍수현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우리 가족을 죽인 놈들한테 한 방 먹이고 싶은 건 당연하잖아. 난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작전 이야기나 해.”
“전에 이야기할 땐 다음 시련이 시작되는 날에 실험실을 공격할 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게 싫었는지, 가까이에 있던 김태호가 끼어들었다. 그의 말을 감사히 받아 화제를 작전 쪽으로 돌렸다.
“맞아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이틀 뒤죠.”
“대략적인 작전 내용은 어제 손님분께 들었던 대로라고 생각하면 되나요?”
고개를 끄덕이니 김화영이 손을 번쩍 들었다.
“현아, 근데 나 어제부터 궁금했던 게 있어. 공덕 쪽의 실험실을 파괴하고 나면 어떻게 할 거야?”
“그대로 강남 쪽의 실험실까지 파괴해야죠.”
“강남 쪽의 실험실을 공격하는 건 시선을 끄는 용도라고 하지 않았어?”
“공덕 쪽의 실험실을 파괴하기 전까지는 그래요.”
“파괴하고 난 후에는 아니라는 거지?”
“네. 그러면 지금부터 제가 생각한 작전을 자세히 설명해드릴게요. 다들 잘 들어주세요.”
김화영의 질문에 답하는 김에 작전을 상세히 설명했다. 지은정과 만난 이후로 실험실을 파괴하고 강이란을 쓰러뜨릴 방법을 계속 고민했던 터라 말은 술술 나왔다.
작전을 전부 설명하자 이화가 손가락 두 개를 펴며 말했다.
“오빠가 실험체 분들을 설득하는 거랑 공덕 쪽의 실험실에 침입한 인원들이 강이란을 쓰러뜨리는 게 관건이겠네.”
이화가 작전의 핵심을 잘 짚었다. 이번 작전의 성패에 달린 건 이화가 말한 두 가지. 저 두 가지를 모두 성공시켜야 강남 쪽 실험실까지 파괴하며 강이란 세력을 완전히 몰락시킬 수 있다.
“그 전에 강이란이 공덕 쪽 실험실에 있을 거란 건 확실한 거지?”
“어. 그건 확실해.”
법무팀장에게 전해 들었던 강이란의 말을 떠올리며 답했다.
‘참, 내가 있는 곳은 자기가 백민기 헌터를 찾으면 절로 알게 될 거야.’
말을 전해 들었을 땐, 강이란이 있다는 장소가 어딘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 어제 백민기에게서 명함을 받고 난 뒤, 그곳이 어딘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백민기가 건네준 명함에 적혀 있던 그의 직책은 ‘공덕 실험실 연구소장’. 강이란이 있다는 장소는 공덕 실험실을 말하던 거였다.
“강이란을 쓰러뜨린다면 적의 기세가 확 꺾일 거야. 거기에 지원군까지 더해지면 강남 쪽의 실험실도 아무 문제 없이 파괴할 수 있어.”
다른 사람들, 특히 이화와 김아람의 도움을 받으며 작전의 세세한 부분까지 정하고 난 뒤 실행일까지 각자 정비하기로 하고 해산했다.
하나둘 빠져나가는 사람들 틈에 껴 밖으로 나가니, 헛기침 소리를 내며 누군가 다가왔다.
“묻고 싶은 게 있다.”
“마침 저도 찾아가려고 했었는데 잘됐네요.”
“그럴 줄 알았다.”
백민기는 한숨을 쉬며 회관 앞에 놓인 다 헤진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서 이야기하겠나?”
소파에 앉으니 백민기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내가 물어볼 건 이거 하나다. 강남에 있는 실험실은 내가 준 카드키가 있으니 출입하는데 문제없다. 공덕에 있는 실험실은 아니다. 카드키도 없이 어떻게 안으로 들어갈 생각인지 궁금하다.”
“카드키는 없어도 돼요.”
“없어도 된다?”
“지금 제 앞에 실험실 문을 열어줄 키가 있는 걸요. 그쪽이 가면 알아서 실험실 문을 열어줄 건데, 카드키가 왜 필요해요?”
“내가 키? 난 여기에 남아 있는 거로 알고 있었다.”
이해가 안 간다며 백민기는 설명을 요구했다.
“실은 강이란이 그쪽을 데려오라고 했거든요. 그러니 제가 그쪽을 데리고 실험실 앞으로 가면 알아서 문을 열어줄 거예요.”
“지금껏 도망쳐온 회사에 다시 붙잡히러 가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알고 있나?”
“아니죠.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 목마 같은 거예요. 저희는 실험실 내부로 침입해서 강이란을 쓰러뜨리고 공덕 쪽 실험실을 완전히 무너뜨릴 거거든요.”
“작전을 설명할 때, 저항군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이야기했나?”
“아니요.”
백민기가 이번 작전에서 빠진 건, 그를 회사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저항군의 조치였을 것이다. 그런 조치를 한 저항군에게 백민기를 강이란 바로 앞까지 데려가겠다고 이야기할 순 없었다.
“그냥 그쪽으로부터 양쪽 실험실의 카드키를 모두 받았다고 했어요.”
“잘했다. 내가 미끼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면 다들 반대했을 거다.”
그 후로 백민기는 눈을 감은 채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회사에서 날 찾는 이유를 알고 있나?”
“잘은 모르지만, 실험실 연구소장을 맡으셔서 그런 거 아닌가요?”
“비슷하다. 이 섬에 들어온 방법 기억하고 있나?”
“네. 그 캐비닛 잊을 순 없죠. 상점에서 팔지도 않는 물건을 어떻게 만들었나 싶었는데…. 설마 만드신 분이….”
백민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생각이 맞음을 알려주었다.
“난 그런 물건을 만들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초월자님께서 내게 강림했을 때만 만들 수 있는 거지만.”
강림?
“이해할 수 있게 말하겠다. 가끔 초월자님께서 내 몸에 깃들면, 인간으로선 만들 수 없는 물건들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초월자님께서 몸에 깃든다고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다. 초월자님이 내 몸을 차지한다는 뜻이다.”
“네?”
초월자가 인간의 몸에 깃든다고?
“믿지 못하겠단 표정이다.”
“그야 초월자님께서 인간의 몸에 깃들 이유가 없잖아요. 공방전 때 보니까 현신하는 방법도 있는 것 같던데, 왜 굳이….”
“내게 깃든 초월자님은 이렇게 말했다. 유한함이란 공포를 느끼는 것이 좋다고. 자세한 것까지는 모르겠다.”
“방금 하신 말씀이 사실이라면 초월자님께서 강림했을 때, 강이란 세력과 회사를 쓸어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요?”
공방전 당시 ‘저염식 전도사’는 찰나의 초월력만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그곳에 있던 헌터 전부를 압도했다. 만약 강림했을 때 초월자가 초월력을 조금만이라도 사용할 수 있다면 회사쯤은 금방 쓸어버리고도 남을 거다.
“불가능하다.”
“인간의 몸에 강림했을 땐, 초월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니다. 내게 강림하는 초월자님이 그들을 공격하는 데에 관심이 없는 것뿐. 내게 강림하는 초월자님은 장비나 물건을 만드는 것에만 관심을 두신다. 그 외, 관심을 두지 않는 데에는 초월력을 절대 사용하지 않으신다.”
백민기의 말을 들어보니, 몸에 깃든 초월자를 제어할 수 있는 건 아닌가 보다. 강림이란 초월자에게 몸을 빼앗기는 거나 다름없다고 여기면 될 것 같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다. 이제 회사에서 나를 찾는 이유를 알 것 같나?”
초월자가 인간의 몸에 깃드는 강림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제가 예전에 발견한 거거든요.”
연구 일지를 꺼내 연구 목적이 적힌 부분을 펼쳤다.
─ ─ ─ ─ ─ ─
연구 목적에 관해 알게 됨.
제물로 적합한 신체 조건을 찾기 위함.
제물 + 진명 + ?
그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조건.
실제로 책임자는 성공한 유일한 사례.
─ ─ ─ ─ ─ ─
“실험실에서 연구하고 있는 게 초월자를 인간의 몸에 불러들이는 방법인 건가요?”
“맞다.”
“여기에 적힌 유일한 성공 사례는….”
“내가 맞다.”
백민기는 미간을 찌푸리며 실험실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었다.
“내가 소장으로 있던 공덕 실험실에선 어떻게 하면 초월자님께서 인간의 몸에 강림하는지 연구를 진행했다.”
“강제로 초월자님들을 강림하게 할 방법을 찾는 거예요?”
“아니다. 회사를 후원하는 초월자님 몇 분이 인간의 몸에 강림하고 싶어 하신다. 그들이 강림할 수 있도록 연구를 진행했다.”
“그럼 그냥 강림하시면…. 초월자님이 모든 인간에게 강림할 수 있는 건 아닌가 보네요.”
“정확하다.”
그렇기에 회사는 초월자의 명에 따라 실험실을 만들어 초월자를 불러들이기 위한 조건을 찾고 있던 거였다.
“그 조건 중 두 가지는 찾았던 거네요.”
“그렇다. 우선 제물, 즉 인간이 필요하다. 그다음은 진명. 제물이 자신과 전속 계약을 맺은 초월자님의 진명을 알아야만 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하면 초월자님이 인간의 몸에 강림할 준비는 끝나게 된다.”
“준비가 끝나게 된다고요?”
“두 가지 조건만 만족하면 초월자님은 인간의 몸에 강림할 수 있게 된다. 단, 이 두 가지 조건만으로는 완전한 강림이 불가능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방식으로 강림하면 인과율에 의해 초월자님이 곧바로 인간의 몸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 한 가지 조건을 찾기 위해 여러 실험을 진행한 것이다.”
“이야기 끊어서 죄송한데, 궁금한 게 있어요. 백민기 헌터에게 강림한 초월자님께 그 마지막 한 가지 조건이 뭔지 여쭤보면 되는 거 아닌가요?”
“내게 강림한 초월자님은 강림의 조건이 세 가지란 것을 알려줬을 뿐. 그 내용까지는 알려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마지막 조건에 관해선 추정만 하고 있을 뿐이다.”
물어볼 게 산더미 같았지만, 일단 참고 백민기의 이야기를 마저 들었다.
“실험실에서 추정한 마지막 조건은 모든 스탯이 0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일한 성공 사례인 내 모든 스탯이 0이기 때문에 그렇게 추정하고 있다.”
‘스탯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네요.’
지은정을 비롯한 실험체에 끔찍한 실험을 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런 유일한 성공 사례가 도망쳤으니까, 회사에서 찾았던 거군요.”
“그렇다.”
“소장 자리는 원하지 않았던 거예요? 실험실에선 왜 도망치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