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98화 (99/168)

[15. 선전포고(16)]

“처음엔 그 자리를 원했었다.”

백민기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혐오하는 듯 자조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스탯이 0이었던 난 길가의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주둔지 사람들 모두가 날 무시하고, 깔보고, 얕잡아봤다.”

멸망 이후 하찮기만 했던 백민기의 삶은 초월자가 강림하며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한다.

“초월자님께서 강림하신 뒤에 사람들은 내게 물건 제작을 맡겼고, 그를 위해서 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모두 구해다 줬다. 그렇게 주둔지 내에서 점차 이름이 알려지며 회사란 곳에서 직접 나를 스카우트하러 오기까지 했다.”

그때 그들이 제안한 것은 실험실의 연구소장을 맡아 강림에 관해 연구하지 않겠냐는 것. 연구에 방해되지 않도록 괴수나 적대 세력의 헌터들로부터 지켜주겠다는 조건으로 그런 제안을 해왔다고 한다.

“그 제안을 수락하셨던 거네요.”

“초월자님께서 강림하시며 언제 괴수에게 죽임을 당할까 전전긍긍하던 처지에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대장장이가 되었고 난 정말 행복했다. 만약 스탯이 낮은 다른 사람에게도 초월자님께서 강림해 힘을 준다면, 멸망한 이 세계에서도 많은 사람이 행복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백민기는 회사의 제안을 수락하고 연구를 진행했던 거였다.

“내 연구로 많은 초월자님이 강림해 멸망한 이 세계를 구원해주길 바랐지만, 연구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초월자님께서 말씀하신 마지막 조건은 무슨 수를 써도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였다. 회사에서 강이란 세력을 끌어들여 사람들을 잡아 오기 시작한 건.”

그전까지는 연구원들이 자신의 몸에 초월자님을 깃들게 하려고 직접 여러 가지를 시도했으나 강이란 세력이 사람들을 붙잡아 오며 실험 양상은 바뀌었다. 스탯을 인위적으로 깎기 위해 여러 끔찍한 실험을 자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떠나기로 마음먹으신 건가요?”

“결정적인 계기는 하나 더 있었다. 내게 강림하신 초월자님이 한 가지 사실을 말해주어 실험실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사실을 말해주셨는데요?”

“모든 초월자님이 자신과 같지 않다는 걸 알려주셨다. 초월력을 사용해 세상을 직접 멸망시키려는 초월자님도 계시고, 모든 인간이 자신에게 복종하도록 만들려는 초월자님도 계신다는 사실을 말해주셨다. 그때 깨달았다. 이 연구는 완성되어선 안 된다는 것을.”

백민기가 모든 연구 자료를 갖고 도망친 건 그 사실을 들은 지 얼마 안 지나서였다.

“실험실에서 도망친 뒤에 노들섬에 흘러들어와 지금껏 숨어 지냈다.”

이야기를 마친 백민기는 섬을 한 바퀴 둘러보곤 한 마디를 덧붙였다.

“처음 이 섬에 들어왔을 땐, 회사를 후원하는 초월자님들께서 강림하기 전에 사람을 모아 실험실을 파괴하려고 했다. 그러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체되었다. 이제는 나갈 때가 된 것 같다.”

“제 작전에 동참해주신다는 거죠?”

“그렇다. 그런데 나도 네게 궁금한 게 있다. 넌 왜 실험실을 파괴하려고 하는 건지 궁금하다. 실험체 중에 가족이라도 있나?”

“그런 건 아니에요. 처음엔 개인적인 이유로 실험실을 파괴하려고 했는데, 백민기 헌터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어요.”

방금까지 백민기한테 들은 이야기는 너무 거창하다. 실험실을 파괴하지 않으면 강림한 초월자들에 의해 세상이 완전히 멸망한다는 건데. 단순히 강이란을 쓰러뜨리려고 했던 게, 스케일이 너무 커져 버렸다.

실은 초월자들이 강림하여 세상 밖으로 나와 초월력을 쓰든 말든 상관은 없다. 어차피 그들이 아니어도 시련을 즐기는 초월자들 때문에 세상이 망해가는 건 마찬가지니까. 그저 나와 일행을 건드리지 않으면 될 뿐이다.

문제는 그들이 우리를 건드리지 않을 리가 없다는 거다.

“그곳에서 진행되는 연구가 성공하면 남은 인류가 다 망할 수도 있다는 거죠?”

“그렇다.”

“그러면 두 곳 다 확실히 파괴해야죠. 안 그랬다간 제가 죽을 텐데. 그리고 강림한 초월자님을 상대하는 것보다야 강이란을 상대하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요?”

“그럼 넌 네가 생각한 작전대로 하면 확실히 강남 실험실까지 파괴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나?”

“네. 이번엔 목숨 아끼지 않고 강이란의 숨통을 반드시 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말 그대로다.

이번엔 몇 번을 귀환하든지 간에 실험실에서 반드시 강이란을 꺾고야 말 테다.

“좋다. 함께하겠다. 대신, 마을 사람들의 귀엔 내가 같이 간다는 사실이 들어가면 안 된다. 그들이 알았다간 작전 시작하기도 전에 날 어디 가두어 둘 거다.”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묻자, 이 마을을 만든 사람을 지키려고 그러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차피 공덕 쪽으로 가는 사람은 저희 일행 말곤 없어요. 저항군은 모두 강남 쪽으로 가기로 했으니까 함께한다는 사실이 알려질 걱정은 하지 마세요. 공덕 쪽으로 가는 사람들한테만 미리 백민기 헌터도 동행한다는 걸 일러둘게요.”

“알겠다. 그럼 나도 필요한 걸 준비하러 가보겠다.”

백민기는 실험실로 침입하기 전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겠다며 돌아갔다.

노들섬 밖에 있는 저항군에게 작전을 전하는 건 주인장이 맡기로 했다. 지금껏 노들섬에서 지내는 저항군과 육지에 남은 저항군을 연결해주는 연락망을 담당해왔다면서 주인장은 하루 만에 작전을 전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러니까 작전에 동참할 사람은 전부 강남역으로 모이라고 하면 되는 거지?”

“네. 그것 말고도 부탁 몇 가지 더 해도 될까요?”

“뭔데? 밖에 있는 저항군한테 작전 전하려면 서둘러 육지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얼른 말해.”

하루 만에 서울 곳곳에 퍼진 저항군에게 작전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빠듯할 건 알고 있었으나, 작전을 위해 주인장이 해줘야 할 일이 몇 가지 더 있었다.

“박다현 헌터한테 강이란 세력에 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다 캐내 주세요.”

“박다현 헌터? 그게 누군데?”

“임성윤 헌터가 데리고 있는 여자아이 이름이에요.”

“이름을 알면 나중에 내치기 껄끄러워지는데…. 그래서 뭘 물으면 될까? 강이란 세력의 인원이 얼마나 남았는지, 그런 걸 물어봐 줄까?”

“남아 있는 강이란 세력 중에 부대장보다 강한 헌터가 몇이나 있는지도 물어봐 주세요.”

“알겠어. 대충 그런 것들 생각나는 대로 물어봐 줄게.”

주인장은 알겠다고 답하면서도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나한테 그런 걸 이야기해주려나? 시도는 해볼 텐데 기대는 마. 애 다루는 건 서툴거든. 그거 말고 다른 부탁은?”

“시련이 시작되는 날, 오준석 헌터를 쓰러뜨린 정성훈 헌터의 조카를 필두로 한 무리가 강남 쪽의 실험실을 공격할 거라는 소문을 내주세요.”

“그건 어렵지 않네.”

“소문이 강이란 세력 측 헌터들의 귀에도 반드시 들어가야 해요.”

마지막 부분을 강조하여 말하자 주인장은 왜 그래야 하냐고 물었다.

“그런 소문이 퍼지면 방비를 단단히 해둘 텐데 괜찮겠어? 그것도 강이란 세력을 강남 쪽에 몰게 하는 방법인 건가?”

“대충 그런 느낌이에요. 어쨌든 이 두 가지만 부탁해도 될까요?”

주인장은 알겠다며 캐비닛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장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하루가 지난 뒤, 점심시간이었다. 주인장은 저항군과 우리 일행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자신이 맡은 일의 결과를 보고했다.

“모두에게 작전 전했고, 다들 시간 맞춰서 강남역으로 오기로 했어. 그리고 현재 강남과 공덕의 상황 말인데.”

주인장이 들은 소식에 따르면 현재 서울 전역의 많은 헌터들이 강남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한다.

“다들 서초 쪽 빌딩 근처로 모이고 있대.”

강남역 근처, 서초 쪽엔 빌딩 하나가 무너지지 않고 건재한 채 남아 있다. 그 빌딩은 백민기가 강남구청과 이어져 있다고 일러준 곳. 즉, 강이란 세력의 헌터들은 강남 쪽 실험실을 지키기 위해 모이는 중인 거다.

“그럼 계획대로 된 거야?”

“어. 지금 공덕이랑 마포는 사람 하나 없이 휑하다니까 강이란 세력의 헌터들은 전부 강남 쪽에 몰려갔다고 보면 될 거야.”

“다행이네요.”

“다행이라고 할 건 아닌 것 같아. 몰려든 헌터의 수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배로 많아.”

당초 예상했던 수는 쉰 명 안팎. 그런데 배로 많다는 말은….

“적어도 백 명은 모여 있대.”

주인장의 말에 저항군 헌터들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희가 그 정도 인원을 상대로 시간을 끌 수나 있을까요?”

“시도는 해봐야지.”

누군가 내뱉은 불길한 소리에 대꾸한 건 홍수현. 그녀는 이왕 하기로 한 거 기운 떨어지는 소리 하지 말라고 나무랐다.

“대장이 말했잖아. 이번 기회가 아니면 다시는 기회 없을 거라며. 맞지?”

“네. 부대장이 쓰러져 강이란 세력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지금이 아니면 저희가 강이란 세력을 꺾을 기회는 없어요.”

주인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이 친구가 다 알아서 이기게 해줄 테니까 다들 걱정하지 마.”

“그나저나 인원수가 늘면 작전 내용은 바뀌나?”

홍수현의 물음에 그건 아니라고 답했다.

“인원수가 많아졌어도 저항군 여러분의 역할이 바뀌는 건 아니에요.”

“강이란 세력 놈들의 시선만 끌면 된다는 거지? 알겠어.”

이 이야기는 여기서 일단락 짓고 주인장의 보고를 계속해서 이어 듣기로 했다.

“제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요?”

“일단 정성훈 헌터의 조카가 강이란 세력을 상대로 선전포고했다는 소문은 제대로 퍼뜨렸어.”

“박다현 헌터 쪽은요?”

“몇 가지 물어보긴 했는데, 네가 원하는 답은 아닐 거야.”

주인장은 박다현을 상대로 얻어낸 정보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Q: 실험실 안에 들어가 본 적 있는가?

A: 없다.

Q: 남은 강이란 세력은 얼마나 되는가?

A: 아주 많다.

Q: 남은 강이란 세력 중 박 씨 남매보다 강한 사람은 얼마나 있는가?

A: 거의 없다.

Q: 남은 강이란 세력 중 부대장보다 강한 사람은 얼마나 있는가?

A: 대장 한 명.

“이게 다야. 부대장보다 강한 사람이 강이란 한 명뿐이란 걸 알아낸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부대장보다 강한 사람이 강이란 말고도 더 있었더라면 이번 작전은 완전히 바뀌었을 거다.

그럴 필요 없이 이대로 작전을 진행해도 된다는 걸 알아낸 셈이니 주인장은 충분히 본인이 맡은 일을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작전은 그대로 진행하면 되겠네요.”

“그럼 지금부터 인원들 조금씩 육지로 보내겠습니다.”

신동우의 말에 그러자고 답하자 저항군 인원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미리 정해둔 조가 있는 듯, 차례로 두 사람씩 회관 밖으로 나섰다.

이제 저들이 모두 강남역 쪽으로 향한 뒤, 백민기를 데리고 공덕으로 가기만 하면 작전 준비는 끝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