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대리 판결]
시련이 재개되기 직전. 일행과 떨어진 난 이나은, 백민기와 함께 공덕역 근처에서 적들의 동향을 살피며 대기하고 있었다.
시련 내용을 확인한 후 제일 먼저 실험실로 돌입할 인원은 여기 있는 셋. 그래서인지 자정이 가까워질수록 공덕역이 눈앞에 보이는 이곳, 우리가 숨어 있는 편의점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긴장감이 만들어낸 고요함. 그 적막을 한참 만에 깬 건 이나은이었다.
“임수연 헌터는 괜찮겠죠?”
“동현이 형이 호위로 함께 갔으니까 괜찮을 거야. 저항군분들도 수연이만큼은 최우선으로 지키겠다고 약속해줬고.”
역 주변을 돌아다니는 헌터들을 경계하며 조용히 답했는데, 이나은은 어쩐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정현 헌터, 여기 있는 거 맞아요?”
“어?”
그제야 ‘퀴네에’를 쓰고 있어 이나은이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얼른 투구를 벗자, 이나은은 안심되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나랑 백민기 헌터만 남겨두고 어디 가버렸는지 알았네.”
“미안. 반지 꼈을 때랑 다르게 투구 쓰면 내가 내는 소리까지 감추어진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네.”
이나은은 다음부턴 잘 기억해달라고 핀잔준 뒤, 본인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래서 아깐 뭐라고 답하셨어요?”
‘퀴네에’를 쓴 탓에 전해지지 않은 말을 되풀이하니 이나은은 불만이라는 투로 말했다.
“굳이 임수연 헌터를 저희랑 따로 떨어뜨려야 했어요?”
아무래도 우리 일행 중 수연이를 강남역 쪽으로 보낸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다.
“저항군은 강이란 세력의 헌터들을 상대하며 하루를 버텨내야 한다. 그들이 그 오랜 시간 동안 버티기 위해선 치료사는 필수적이다.”
“적들을 하루 동안 강남역 근처에 묶어 놔야 저희가 편하다는 건 저도 알아요. 그렇지만, 그냥 마음에 좀 안 드네요.”
수연이가 걱정된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일까? 이나은은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곤 다시 공덕역 쪽을 응시했다. 수연이에 관해 더 이야기할 생각이 없는 눈치라 조용히 옆에서 역 근처 상황을 지켜보는데, 이번엔 백민기가 말문을 열었다.
“작전을 바꿀 생각은 정말 없나? 어쩐지 불안하다. 자네들을 해치고 나를 붙잡으려는 강이란 헌터의 함정인 것만 같다.”
“걱정하지 마세요. 강이란이라면 분명 저희랑 직접 마주 보고 대화하려 들 거예요.”
“자네의 생각대로만 된다면 참 좋겠다만.”
백민기는 모든 일이 생각대로 흘러가는 것만은 아니라며 슬쩍 저 멀리 있는 호텔을 바라보았다. 그가 바라본 공덕역 뒤편의 호텔 옥상에는 현재 노인과 김아람이 올라가 있다. 그 두 사람이 맡은 역할은 공덕역 바깥에서 일어나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비하는 것. 만일 적들이 나와 이나은을 공격하려 든다면, 저 두 사람이 나설 거다.
“저기 있는 사람들이 나설 일은 생기지 않길 바란다.”
“그러고 보니 저희가 찾아야 할 사람 이름이 최유라 맞죠?”
백민기가 노인을 언급한 덕분에 생각났다며 이나은이 물었다.
“어. 우리가 그 사람을 찾는다는 조건으로 임성윤 헌터가 공덕역 바깥을 맡아주신 거니까, 시간 나는 대로 그 사람도 찾아야 해.”
“신혜진 헌터 가게 옆에 탁아소라도 차리실 거래요? 저희끼리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왜 자꾸 아이들을….”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잘은 모르겠네.”
이나은의 푸념에 송태섭이 노인에게 ‘수진이는 아저씨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더 이야기해야 해요.’라고 쏘아붙였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의 대화로 미루어보면 노인이 아이들을 챙기려는 게 수진이란 사람의 죽음과 엮인 사연 때문이란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송태섭과 노인 모두 그 일에 관해 언급하는 걸 피해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실험실 안으로 들어가 최유라를 직접 구하겠다고 강하게 주장하실 때도 노인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관해선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말 못 할 사연이 있겠거니 여기고 노인 대신 최유라를 찾아주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신혜진 헌터가 엄청나게 싫어하시겠네요.”
“그건 어쩔 수 없지.”
며칠간 얌전히 지냈다고 강이란 세력이었던 박다현을 공덕 실험실을 공격하는 데에 데려갈 순 없는 노릇이라 노인은 주인장에게 그녀를 맡겼다. 그때, 주인장은 어린아이 돌보는 건 질색이라며 무척 싫어하셨으니 노인이 또 다른 아이를 데려간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진 뻔하다.
“그래도 실험체로 붙잡혀 있던 아이를 대놓고 싫어하시진 않을 거 같은데?”
“그러려나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긴장을 해소하는데 드디어 기다리던 글씨가 새겨졌다.
「시간 참 빠르네요. 벌써 일주일이 지나서 ‘시련’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니 믿기지 않아요.」
「지난번 ‘시련’이 예상치 못하게 중단되는 바람에 준비해야 할 게 너무 많았고, 또 제가 얼떨결에 MC를 맡다 보니까….」
[‘알 수 없는 자’님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별의 적대자’님이 사족 늘어놓는 대신 다음 ‘시련’을 시작할 것을 요구합니다.]
「죄, 죄송해요.」
「다음 ‘시련’으로 넘어가려면 우선 이 자료부터 보내드려야겠네요.」
[‘업칭’으로 측정된 신업과 구업이 ‘염라대왕의 판결’에서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들의 여죄가 적힌 자료를 ‘변성대왕’에게 전송합니다.]
「조, 존경하는 초월자님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얼른 자료 보내드리고 다음 ‘시련’으로 넘어갈게요.」
‘캠비온 멀린’의 말과는 달리 다음 시련에 관한 글씨는 한참 동안 적히지 않았다. ‘캠비온 녹스’가 좋았던 건 절대 아니지만, 새로운 MC가 답답하게 진행하는 걸 보니 차라리 ‘캠비온 녹스’가 다시 복귀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한국인이라면 모두 이런 느린 진행에 견디지 못하고 있을 거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득 궁금해졌다며 이나은이 물었다.
“저번 시련이 제대로 진행되었다고 치면, 이번이 여섯 번째 시련인 거네요. 앞으로 몇 번이나 이 짓거리가 반복될까요?”
“이번 시련 포함 두 번. 혹 다섯 번이다.”
잘 모르겠다고 답하려는데 뜻밖에 백민기가 정확한 답변을 내놓았다.
“‘독사지옥’의 ‘변성대왕’님, ‘거해지옥’의 ‘태산대왕’님. 이 두 분의 판결만이 남았거나 ‘철상지옥’의 ‘평등대왕’님, ‘풍도지옥’의 ‘도시대왕’님, ‘흑암지옥’의 ‘오도전륜대왕’님까지 합쳐 다섯 번의 판결이 남았다.”
“그건 어떻게 알고 계신 거예요?”
“시련이 끝날 때마다 판결을 내린 분들 모두 불교 경전에 등장한 시왕이다. 저승에 간 사자의 죄를 판결하는 시왕은 총 열 분. 그분들께서 왜 우리를 판결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지식에 의하면 남은 시련의 수는 그렇게 된다.”
그가 덧붙인 말에 따르면, ‘거해지옥’의 ‘태산대왕’의 판결이 내려진 이후 사자는 육도 중 한 곳에 가게 된다. ‘태산대왕’의 판결에서 육도 중 어디로 갈지 결정되지 못한다면, ‘오도전륜대왕’의 심판까지 받게 되는 거고.
“그게 시련이 두 번 혹 다섯 번 남은 이유다.”
“최악의 경우 다섯 번이란 거죠? 진짜 별로네.”
이나은의 기분을 완전히 망치려는 건지 별로라는 말에 딱 맞추어 다음 글씨가 새겨졌다.
「자료 전송이 끝났어요.」
「원래라면 ‘염라대왕’님이 판결을 내리고 다음 ‘시련’으로 넘어가야 하지만, 상황이 꼬였으니 이번만은 ‘변성대왕’님이 대리 판결을 내려주실 거예요.」
[‘변성대왕’이 자료를 확인합니다.]
[입을 함부로 놀려 타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플레이어들에 분노하며 변성대왕이 유죄 판결을 내립니다.]
[U+2641 행성의 죄악 수치가 10 상승합니다.]
「‘시련’이 없는 동안에도 플레이어들이 서로를 헐뜯은 덕택에 유죄 판결이 내려졌네요.」
「무죄 판결이 내려지면 어떻게 할까 걱정 많이 했는데 정말 감사해요.」
「이제 죄악 수치는 50, 남은 ‘시련’도 부디 힘내주세요.」
[‘균형을 재는 자’님이 쌓여만 가는 죄악 수치에 실망합니다.]
「다음 ‘시련’을 시작할게요.」
「이번 ‘시련’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시련’이 시작됩니다.]
[‘시련’의 난이도를 조정 중입니다.]
[변성대왕의 심판]
- 대상 플레이어 : U+2641 행성 생존자 전원
- 클리어 조건 : 7일 내 올바른 그림 족자 안으로 들어갈 것
- 성공 보상 : 다음 시련 진출 및 해당 그림 족자에 깃든 보상 지급
- 실패 페널티 : ‘철환소’로 이동
- 만일 전속 계약을 맺은 초월자님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플레이어는 다음 시련에 참여할 수 없으니 주의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후원자님은 이번 시련에서 추가로 전속 계약할 대상 선별이 가능합니다. 신중한 선택 부탁드립니다.
[변성대왕의 심판이 시작됩니다.]
[행성 곳곳에 그림 족자가 생성됩니다.]
[그림 족자는 구역당 다섯 개씩 생성됩니다.]
[U+2641 행성에 ‘독사지옥’이 구현됩니다.]
‘독사지옥’이 구현된다는 글씨에 맞추어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현 헌터, 조심하세요.”
이나은이 황급히 끌어당겨 품에 안긴 꼴이 되었으나, 덕분에 바로 앞에 생겨난 싱크홀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변성대왕’님께서 ‘독사지옥의 구덩이’를 체험할 수 있도록 무대를 꾸며주셨어요.」
「체험하는 것은 좋지만, 한번 빠졌다간 다시 나올 수 없게 되니 주의해주세요.」
“뒤로 물러나는 게 좋을 것 같다.”
“‘독사지옥의 구덩이’가 뭐길래….”
“보이는 그대로다.”
백민기의 눈짓에 쉭쉭 대는 소리가 들리는 싱크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싱크홀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게 뚫려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바닥이 훤하게 잘 보였다.
싱크홀의 밑바닥에선 셀 수 없이 많은 뱀이 사람들의 몸에 달라붙어 피부를 물어뜯는 중이었다. 기이하게도 살갗이 다 벗겨진 사람들은 고통을 느낄 수 없는 건지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서로에게 주먹질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대체 왜 저기서….”
“지옥의 존재다. 저들의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굳이 이해하려 할 필요 없다.”
“이번 시련이 끝날 때까진 구덩이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네요.”
“저 틈바구니에 끼고 싶은 게 아니면 그래야만 한다.”
백민기는 혀를 차며 역 쪽을 바라보았다. 역으로 향하는 길 곳곳에도 지면이 푹 가라앉아 생긴 싱크홀이 있었다. 그 주변을 돌아다니던 헌터들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기겁하는 걸 보니 저곳에 뚫린 싱크홀 바닥에도 끊임없이 싸우는 사람들과 뱀들이 있는 듯하다.
“저 밑의 것들이 밖으로 나오진 않겠지?”
“그러기를 바라야죠.”
불길한 소리 하지 말라던 이나은은 근처를 둘러보더니 허공을 가리켰다.
“저게 그림 족자인가 봐요.”
이나은이 가리킨 둥둥 떠다니는 거대한 족자엔 수묵화가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