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독사지옥 (1)]
거칠게 그어진 굵은 획은 한데 모여 하나의 장면을 묘사했다. 족자에 그려진 건 양을 잡아먹고 있는 늑대와 넘어진 채 그를 지켜보는 소년의 모습.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소년의 미래는 안 봐도 뻔했다. 누군가 도와주러 오지 않는다면 저대로 늑대의 식사가 되고 말 거다.
작품명(가제), 늑대의 풍족한 한 끼 식사. 왜 저런 그림을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화가의 취향만은 확실히 알 것 같다. 늑대에게 물어뜯겨 뼈를 드러낸 채 피 흘리는 양을 저리 상세히 묘사한 걸 보면 고어물에 푹 빠진 게 틀림없다.
내 취향은 그런 쪽이 전혀 아니기에 그림을 대충 훑은 뒤 눈길을 딴 데로 돌렸다. 눈길을 돌린 곳엔 붓글씨가 적혀 있었다. 수묵화 밑에 대충 휘갈겨 적힌 세 문장은 이러했다.
‘외로운 양치기의 거짓말.’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
‘그 찰나의 즐거움에 모든 것을 잃고 말았네.’
“양치기 소년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건가 보네.”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말하다가 완전히 인생 말아먹은 남자애 이야기요?”
“그렇게 말하니까 너무 암울한 이야기처럼 들리잖아.”
“거짓말 때문에 저 그림처럼 된 거면 암울한 이야기 맞죠. 근데 이 근처에 그림 족자는 저거 하나뿐인 건가? 다른 건 안 보이네.”
이나은을 따라 다른 곳을 둘러보았으나 시야에 잡히는 그림 족자는 공덕역 바로 앞에 펼쳐진 ‘양치기 소년’ 수묵화뿐이었다.
“설마 어디 있는지 일일이 찾아다녀야 하는 건 아니겠죠?”
다행히 이나은의 걱정대로 서울을 누비고 다닐 필요는 없었다.
「그림 족자 설치를 끝냈으니 이전 시련에서 동상 위치를 공개한 것처럼 그림 족자 위치도 공개해드릴게요.」
「이렇게 입력하던 거 같은데….」
[그림 족자의 위치를 표시합니다.]
[8202-E 구역의 그림 족자는 ‘공덕역’, ‘노을공원’, ‘망원시장’, ‘하늘공원’, ‘합정역’에 위치하여 있습니다.]
글씨가 새겨진 동시에 눈앞의 그림 족자에서 뿜어져 나온 밝은 빛이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저 멀리서도 빛기둥 여럿이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가는 것으로 보아 공방전 때처럼 그림 족자의 위치를 언제든 확인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려는 것 같다.
「자, 잘되었나요?」
「중간에 빛이 꺼지진 않으려나….」
「이번 시련이 진행되는 동안, 그림 족자의 위치를 계속 표시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볼게요.」
저번 MC의 문제점이 ‘자신감 과다’였다면 이번 MC의 문제점은 ‘자신감 결핍’. 어디서 이렇게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MC를 데려온 건지. 시련을 기획한 자들의 섭외 능력이 심히 의심된다.
「올바른 그림 족자는 각 구역당 세 개예요.」
「찍어서 올바른 그림 족자를 맞출 확률만 해도 50%가 넘긴 하지만, 좀 더 많은 플레이어가 다음 시련에 참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힌트를 드릴 생각이에요.」
「단, 힌트를 그냥 드리면 재미없으니까 한 가지 조건을 달게요.」
「구역 내에서 여섯 명 이상의 플레이어가 죽었을 경우. 올바른 그림 족자가 무엇인지 판단하는 데 도움을 줄 카드 한 장을 해당 구역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드릴게요.」
「이 점 참고해주세요.」
어이가 없다. 좀 더 많은 플레이어가 다음 시련에 참여하길 바란다면서, 서로 죽여야 힌트를 주겠다고?
힌트 없이 올바른 그림 족자를 추론할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자신의 감을 믿고 찍는 것. 확률은 60%. 꽤 높은 수치긴 하다. 그러나 시련의 성공 여부를 어떻게 운에 맡기겠는가. 40%의 확률에 걸려서 시련에 실패했을 때, ‘이번엔 운이 나빴네. 다음번엔 잘 찍어야지.’라고 말하며 넘길 만큼 실패 페널티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다른 방법은 구역 내 모든 그림 족자를 확인하는 것. 그림과 붓글씨를 비교하며 차이점을 찾아 뭐가 올바른 거고 뭐가 올바르지 않은 건지 추론하는 거다. 머리만 잘 쓴다면 이 방법으로 올바른 그림 족자를 분간해낼 수 있다. 문제는 모든 그림 족자를 확인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노을공원’이랑 ‘하늘공원’은 여기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다. 걸어가는 데에만 며칠 걸리는 거리라 거기에 갔다가 공덕역으로 돌아오는 데만 일주일은 족히 걸릴 거다. 아마 다른 구역 역시 그림 족자 간의 거리를 이만큼 멀리 떨어뜨려 놓았을 건데, 그렇게 그림 족자를 설치한 이유는 뻔하다.
힌트 없이 일주일 내로 올바른 그림 족자를 찾기는 힘드니까 서로 죽고 죽여서 힌트를 얻으라는 거다.
시련 출제자의 의도를 알고 나니 내 생각이 틀렸던 것을 깨달았다. ‘캠비온 멀린’의 자질을 의심하다니. 비록 성격은 정반대일지라도 악랄한 것만큼은 ‘캠비온 녹스’와 다를 바 없었는데. MC를 맡는 데 필요한 자질은 플레이어들을 악랄하게 괴롭히는 것, 이거 단 하나뿐임을 잊고 시련을 기획한 자들의 섭외 능력을 의아해하고 있었다.
「제가 해야 할 말은 이게 끝인 것 같네요. 저는 일주일 후에 다시 돌아올 테니, 그동안 시련 즐겨주세요.」
글씨는 그를 끝으로 더 새겨지지 않았다.
“어떻게 할래요?”
이번 시련에 관한 내용이 더 적히지 않을 거란 확신이 생겼는지, 이나은이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백민기 역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나은이 물은 건 작전을 변경하지 말고 그대로 실행할 거냐는 거다.
작전을 짤 때, 실험실 공격을 개시할지 말지는 시련의 클리어 조건을 본 이후 결정 내리기로 했다. 시련을 클리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촉박할 땐 실험실 공격을 미뤄야 하기 때문이다. 강이란 세력을 서울에서 몰아내더라도, 시련을 클리어하지 못한다면 말짱 꽝인 거니까.
시련의 클리어 여부와도 엮인 중요한 결정을 내릴 사람은 바로 나. 지금 내 대답에 따라 수많은 사람이 움직이게 된다.
“어차피 노을공원까지 가서 그림 족자를 확인할 시간은 없어. 실험실에서 강이란 세력을 쓰러뜨리다 보면 절로 힌트가 주어질 거니, 예정했던 대로 하자.”
“알겠어요. 그럼 시간 낭비할 것 없이 바로 시작하죠.”
대답을 듣자마자 이나은이 내 복부를 강하게 후려쳤다.
[‘인스턴트’ 특성이 발동됩니다.]
[3분간 민첩 스탯이 50 상승합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사이’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플레이어 ‘김화영’과 보상을 나누어 받게 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플레이어 ‘임수연’과 보상을 나누어 받게 됩니다.]
[3분간 플레이어 ‘정현’이 획득한 민첩 스탯 50 중 17 스탯이 플레이어 ‘김화영’에게 귀속됩니다.]
[3분간 플레이어 ‘정현’이 획득한 민첩 스탯 50 중 17 스탯이 플레이어 ‘임수연’에게 귀속됩니다.]
“적어도 예고는 하고 때리라고.”
“전투 시로 여겨지게끔 공격해달라고 하셨잖아요. 예고 없이 때려야 전투 상황으로 인식하죠. 신호는 보내졌어요?”
“덕분에 잘 보내졌어.”
작전을 속행하는 쪽으로 결정 내리면 김화영과 임수연의 스탯을 상승시키는 것으로 신호를 보내기로 했다.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세게 얻어맞은 덕분에 신호를 무사히 보냈으니, 곧 두 사람이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가 실험실에 돌입한다는 것을 알려줄 것이다.
“정현 헌터가 고통받아야 보내지는 신호라니. 너무 비효율적인 거 아니에요?”
“비효율적이라도 달리 신호를 보낼 수단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
“이따가 실험실 안에서 한 번 더 맞아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그땐 최대한 살살 부탁할게.”
“방금도 그러긴 했는데…. 일단 알겠어요. 힘 더 빼볼게요.”
이나은은 내심 미안했는지 실험실을 파괴한 뒤엔 연락 수단을 하나 새로 마련하자고 엄포를 놓았다.
“아무리 김화영 헌터의 스킬을 아끼기 위해서라지만 신호를 보낼 만한 다른 수단을 찾긴 해야 할 것 같네요.”
“휴대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텔레파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달리 무슨 수가 있나 싶긴 한데.”
“그렇다고 매번 이렇게 맞으실 순 없잖아요. 정이화 헌터도 다신 이런 방법 쓰지 말라고 했고.”
“그건 그렇지.”
“실험실을 파괴하고 나선 다른 수단 찾는 거예요.”
나라고 이런 식으로 신호 보내는 게 좋은 건 아니다. 이나은의 말대로 얼른 대안을 찾긴 해야 할 것 같다.
“지금 당장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이 문제에 관해선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 일단은 돌입하죠.”
“그러자.”
이나은이 내민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쯤이면 강남역으로 간 저항군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거다. 그들이 벌어줄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도 서둘러 움직여야만 한다.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알겠다.”
예정대로 백민기에게 수갑을 채운 뒤, 팔뚝을 붙잡고 편의점에서 나섰다. 그 상태로 공덕역 쪽으로 나아가자 역 주변을 돌던 헌터 둘이 우리를 발견했다.
“너넨 뭐냐?”
험악한 인상을 지으며 다가온 두 헌터는 우리를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이 근처에 따로 볼일 없을 텐데, 험한 꼴 당하기 전에 그냥 돌아가.”
“그림 족자 때문에 온 것이라면 그냥 포기하는 게 좋을 겁니다. 경고는 한 번. 다음은 없습니다.”
이나은이 행동에 나서기 전, 서둘러 내가 해결하겠다는 눈짓을 보냈다. 내 뜻을 읽었는지 이나은은 잠자코 고개 숙인 채 있었다.
“저희는 강이란 헌터님의 명령을 받아 비밀리에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비밀 작전? 대장님께 직접 명령을 받았다고?”
“네. 강이란 헌터님께 이 사람을 잡아 오라는 명령을 받았거든요. 한시 빨리 강이란 헌터님 앞으로 끌고 가야 하는데 실험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내 말에 두 헌터는 난처한 듯 서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비밀 작전이 있다는 이야기 들은 적 있어?”
“제가 따로 들은 건 없습니다.”
“나도 그런데. 어떻게 하면 좋으려나?”
나이가 좀 더 많아 보이는 헌터는 턱을 쓸더니 결정했다며 말했다.
“비밀 작전이란 게 안경 쓴 멸치 데려가는 거 맞지?”
“맞아요.”
“그럼 너희 둘은 죽여도 상관없는 거지?”
“네?”
“내가 너희 둘 죽이고 멸치만 데려가도 아무 문제 없는 거잖아. 아니야?”
그의 말에 옆의 헌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좋은 생각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서 우리가 멸치를 잡아 왔다고 하면 대장님께서 뭐라도 주시지 않을까?”
“마침 대장님도 이곳에 계시니 잘되었습니다.”
“좋아. 그럼 이 둘은 그냥 죽이자.”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어이없어할 때, 한 헌터가 내게 검을 겨누었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 있어? 그 정도는 들어줄게.”
“좋게 넘어갈 수 있었는데, 안타깝네요. 머리 조심하세요.”
“머리? 어쩌라는 거야?”
헌터는 비웃으며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