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01화 (102/168)

[17. 독사지옥 (2)]

이마에 찍힌 붉은 점을 보고 경고했건만, 기껏 해준 충고를 듣지 않은 헌터는 노인의 저격에 쓰러지고 말았다. 자신의 동료가 검을 미처 다 휘두르지도 못하고 쓰러지는 걸 보고 당황하여 도망치려던 다른 헌터 역시 노인에게 저격당했다.

팔짱 낀 채 두 헌터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던 이나은이 놀리듯 물었다.

“정현 헌터가 알아서 해결한다는 거 아니었어요?”

“그래도 강이란이 여기 있다는 건 확인했잖아.”

민망함에 대충 둘러대고 호텔 쪽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노인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뒤, 서둘러 8번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기로 내려가야 공덕 실험실로 갈 수 있다고 하셨죠?”

“그렇다. 공덕 실험실로 이어진 출구 중 멀쩡한 출구는 현재 저기뿐이다.”

8번 출구는 실험실로 이어진 유일한 출구다. 강이란 세력의 헌터들 대다수가 강남 쪽으로 갔다고 하더라도 저곳을 지키는 헌터는 남겨두었을 수밖에 없다.

이나은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조심히 출구까지 다가갔다. 그러나 우리가 긴장한 게 무색할 정도로 거리는 너무나 조용했다. 심지어 출구 아래로 내려가는 데에도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출구 아래에 다다를 때까지 우리가 마주한 헌터는 노인이 저격한 두 헌터뿐. 아무래도 강이란 세력은 출구를 지키는 헌터까지 전부 강남 쪽으로 보낸 듯하다.

“막아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더 불안하네요.”

“불안하다고 돌아갈 순 없잖아. 백민기 헌터, 여기선 어떻게 가야 해요?”

백민기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며 고갯짓했다. 이후 그가 이끄는 대로 나아가다 보니 잔해에 막힌 막다른 길이 나왔다.

“이제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면 된다.”

이렇게 외진 곳에 뭐가 있을까 싶긴 했지만, 백민기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남자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백민기가 턱짓으로 가리킨 건 화장실 제일 끝의 칸. 그 칸을 열자 변기 대신 다른 게 우리를 맞이했다.

칸 안에 있던 건 물품 보관함. 화장실에 있기엔 생뚱맞은 물건이지만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게 실험실로 향하는 입구 같은 거죠?”

“정확히는 첫 번째 입구다. 비밀번호는 내가 도망친 이후로 바꾸지 않았다면 0000이다.”

“의외로 간단하게 설정해뒀네요.”

“간단하니 오히려 예측하기 힘든 거다.”

‘0000’을 입력하자 경쾌한 노래가 흘러나오며 보관함 문이 열렸다.

“이제 들어가면 된다.”

노들섬으로 이동할 때 썼던 캐비닛과 사용 방법은 같았다.

손을 집어넣어 보관함 안에 몸이 완전히 빨려 들어갔을 때 문이 닫힌다. 그다음 빙글빙글 세상이 돌며 멀미 유발. 토가 목 끝에 찼을 때쯤 다시 문이 열리면 목적지에 도착.

보관함 밖으로 나왔을 땐 좁은 화장실 칸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장소였다.

흰색 벽으로 둘러싸인 완전히 밀폐된 공간. 창문도 문도 존재하지 않는 이 비좁은 공간을 채우고 있는 건 물품 보관함과 공중전화부스뿐이었다.

“어서 오세요.”

이동하며 생긴 어지러움이 미처 가시기도 전, 누군가 말을 건네왔다. 말소리는 공중전화 위에 얹힌 수화기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인사과장님께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우리를 그쪽으로 데려가….”

이나은이 수화기를 얼른 붙잡았지만, 인사과장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말을 끝으로 수화기에선 규칙적인 신호음만이 울렸다.

“기다린다고만 하고 끊어버렸네. 이젠 어떻게 하죠?”

강이란은 자신이 있는 곳으로 백민기를 데리고 이나은과 함께 오라고 했다. 지시 사항을 전부 지켰는데도 강이란이 직접 실험실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분명 여기 어딘가에 우리가 실험실 내부로 들어갈 방법이 있다는 거다.

“백민기 헌터,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어떻게 해야 실험실로 들어갈 수 있죠?”

“공중전화에 전화카드를 넣으면 된다.”

“전화카드요.”

백민기의 말을 듣고 부스 안을 살피니 바닥에 떨어진 전화카드 한 장이 보였다. 그를 주워드니, 백민기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넣어야 하는 전화카드가 이거 맞나요?”

“그렇다.”

“그게 왜 여기 떨어져 있는 거예요?”

“누가 실수로 흘린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우리가 올 것을 예상하고 거기 놓아둔 것 같다.”

“그럼 정현 헌터 말이 맞았네요. 강이란은 처음부터 저희가 여기로 올 걸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근데 왜 부하들을 전부 강남 쪽으로 보낸 거지?”

“부하들을 딴 데 보내야만 우리가 실험실에 온다고 생각했겠지.”

“혼자서도 저희를 이길 자신이 있나 보네요.”

“아니면 실험실에 함정을 준비해뒀을 수도 있지. 실험실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조심하자.”

이나은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전화카드를 넣었다. 카드를 넣자 신호음이 들리더니 공중전화부스의 문이 저절로 닫혔다.

“이것도 멀미 심해요?”

“그렇다.”

“미리 물어볼 걸 그랬네요.”

이윽고 공중전화부스 주변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회전하던 흰색 벽은 어느 순간 회색빛으로 색이 바뀌었다. 회색 벽이 우리 주위를 도는 속도가 점차 느려지다가 완전히 멈추었을 때, 부스 문이 열리더니 세 명의 사람이 우리를 맞이했다.

“백민기 전 소장님, 오랜만입니다.”

세 사람 중 가운데에 선 흰색 가운을 입은 남성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에는 명찰이 걸려 있었는데, ‘최정규’란 이름과 ‘회사-공덕 실험실 소장’이라는 명칭이 적혀 있었다.

“오시는 길이 변변치 않았던 점 사과드립니다.”

최정규가 고갯짓하자 양옆에 서 있던 군복을 입고 무장한 두 사내가 물러섰다.

“여러분이 편하게 오실 수 있도록 경계를 서던 헌터들을 모두 물러나게 했는데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았나 봅니다. 저희는 여러분과 싸울 생각이 없으니 경계는 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나은이 여전히 양 주먹을 쥐고 있자, 최정규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인사과장님께서는 실험실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전투가 벌어진다면, 허상헌 수석연구원의 목숨이 위험해질 거라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이나은은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강이란은 어디 있지?”

“인사과장님을 만나려면 연구동으로 가야 합니다. 따라오세요.”

최정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뒤, 군인을 이끌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들의 뒤를 따라 회색빛의 방에서 나오자 기다란 복도가 나왔다. 작전을 짤 때 백민기에게 내부 구조를 듣긴 했지만, SF 영화에서나 볼법한 건물 내부의 모습을 실제로 보니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만요.”

최정규가 우리를 멈춰 세운 지 얼마 안 되어 방송이 나왔다.

‘현재 외부인이 들어왔습니다. 모든 실험 및 연구를 중단하고, 각자의 방으로 이동하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현재 외부인이 들어왔습니다. 모든 실험 및 연구를 중단하고, 각자의 방으로 이동하길 바랍니다.’

방송이 들린 뒤, 저 멀리에서 연구원으로 보이는 사람 몇 명이 정신없이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이후에야 최정규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인사과장님께서 별 탈 없이 모셔오라고 하셨으나, 세 분이 돌발행동을 한다면 수칙에 따라 제 옆의 분들이 총을 발포할 겁니다. 그 정도는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최정규의 말에 군인들이 위협하듯 총을 장전했다. 이나은이라면 충분히 저 둘을 상대할 수 있겠지만, 나와 백민기는 아니다. 혹여나 싸움이 벌어져 여기서 ‘CONTINUE?’ 특성을 쓰는 일이 생기는 건 원하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한 듯 최정규는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길을 안내했다.

여러 개의 방이 위치한 기나긴 복도를 따라 나아가다 보니 어느 순간 세 갈래 길이 나왔다. 정면으로 이어진 통로엔 엘리베이터가 보였고, 오른쪽으로 이어진 통로엔 큰 구덩이가 보였다.

구덩이 앞에는 실험동으로 가는 길이 끊겨 멀리 돌아가야 한다며 투덜대는 연구원 몇이 있었다.

“방송 못 들으셨나요? 왜 복도에 나와계신 거죠?”

“여기 싱크홀이 갑자기 뚫리는 바람에 실험동으로 가지 못하고 있어서….”

“길이 여기 하나 뿐은 아닐 텐데요?”

“죄송합니다.”

“어서 돌아가세요.”

최정규의 말에 연구원들은 헐레벌떡 엘리베이터 쪽으로 뛰어갔다.

“저희는 왼쪽 길로 가야 합니다. 그럼 다시 출발하죠.”

다시 길을 나서는데 뒤따라오던 군인이 둘에서 하나로 줄었다. 군인 한 명이 세 갈래 길에 남은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총소리와 함께 울려 퍼진 짧은 비명. 그에 걸음을 멈추자 최정규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제 실험실에 얼빠진 사람은 필요 없거든요.”

신경 쓰지 말라며 최정규는 복도의 끝에 있는 문 앞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백민기 전 소장님, 만나 봬서 영광이었습니다.”

“저희끼리 들어가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인사과장님께서 여러분과 따로 대화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자 최정규는 문 앞에 섰다. 자동으로 문이 열리자 방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흰색의 원형 탁자가 보였다.

“함정은 없습니다. 저기 앉아 계시면 곧 반대편 문에서 인사과장님이 나오실 겁니다. 여러분은 백민기 전 소장님이 도망치지 않도록만 주의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최정규와 군인이 정말로 우리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자 이나은이 조용히 물었다.

“이건 또 무슨 속셈일까요? 함정은 아니겠죠?”

“함정을 팠다면, 여기까지 친절하게 길 안내는 안 해줬을 거야.”

조용히 이나은과 대화를 주고받는데, 최정규가 언급한 반대편 문이 열렸다.

“자기들, 오래간만이야.”

문 뒤에는 강이란과 군인 셋이 서 있었다. 강이란은 군인들을 방 밖에서 대기하게 시키고는 홀로 우리의 앞에 앉았다.

“잘 지냈지?”

강이란은 정말로 반갑다는 듯 환희에 찬 표정을 짓고 있다. 지금껏 내게 해온 짓과 대비되는 저 표정이 너무나 역겹게 느껴졌다.

“법무팀장에게 들은 대로 백민기 헌터를 데려왔어. 너도 약속은 지켜야지.”

“허상헌 헌터 말이지? 지금 내 부하들이 여기로 데려오고 있으니까, 자기들이랑 난 그동안 대화하고 있으면 돼.”

“딱히 그쪽하고 할 말은 없는데.”

“아닐 텐데. 자기, 나한테 궁금한 게 많지 않아? 예를 들면 내가 자기의 행보를 낱낱이 알고 있는 이유라든가.”

신경을 긁는 강이란의 말투에 결국 대화에 응해주었다.

“내가 묻는다고 순순히 답해주는 것도 아니잖아.”

“나 대신 우리 법무팀장도 죽여줬는데, 자기가 궁금한 것쯤은 알려줄 수 있지.”

“너 대신 죽여줬다고?”

“그건 자기가 신경 쓸 게 아니야. 그럼 그 이야기부터 해볼까? 내가 어떻게 자기가 어디로 갈지 알고 있었는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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