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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02화 (103/168)

[17. 독사지옥 (3)]

강이란은 잠깐 뜸 들이며 내 반응을 살피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딱히 나랑 할 말 없다 해놓고 조용히 귀 기울이고 있는 걸 보니, 자기도 궁금하긴 했나 보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본론이나 말해.”

“알았어. 말해줄 테니까 인상 풀어. 방법은 간단해. 자기 일행 중 한 명이 자기가 어디에 가는지 계속 알려줬거든.”

공방전 이후 법무팀 건물에 간 것, 마포대교를 거쳐 마포에 간 것 등. 내 행보를 강이란이 알고 있던 이유는 그 때문이라고 했다.

“덕분에 미리 마포대교에 가 있던 법무팀장이 자기한테 내 말을 전할 수 있었던 거고.”

저 말을 들은 내 표정이 어떨지는 뻔했다. 아마 완전히 썩은 표정을 짓고 있을 거다.

“정리하자면, 자기 일행 중에 배신자가 있다는 거지. 자기 기분이 어때?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하니까 기분 더럽지 않아?”

“네 말을 내가 어떻게 믿고….”

“자기 표정 보면 이미 내 말 믿고 있는 것 같은데? 그리고 자기는 똑똑하니까 알고 있었잖아. 우리 사이를 연결해주는 사람이 일행 중에 있다는 걸. 아니야?”

예전에 김아람과 이화랑 정보를 흘리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었지만, 마포대교에서 벗어난 이후로 강이란의 별다른 개입이 없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저 세 번째 시련 때부터 네 번째 시련 때까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단으로 정보를 얻다가 그 이후로는 그 방법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고 여겼다.

그랬는데 만나자마자 이렇게 정곡을 찌를 줄이야.

“어떻게 하면 자기가 내 말을 완전히 믿어 주려나?”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수작인 거….”

“노들섬.”

자신만만하게 말하려다 말끝이 뭉개졌다.

“거기서 며칠 편히 쉬던데 좋았어? 나도 다음에 거기로 휴가나 한번 가볼까?”

이나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냐고 윽박질렀으나, 강이란은 전혀 기죽지 않은 채 웃기만 했다. 숨이 넘어갈 듯 웃던 그는 이나은을 무시하고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아무렇게나 이어갔다.

“자기 친구들이 강남역에 모일 거란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않았어. 괜히 내가 그 사실을 알렸다가 허무하게 싸움이 끝나버리면 재미없잖아.”

싸움이 나면 수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 법이라면서 강이란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자기 친구들을 응원하고 있어. 이건 비밀인데, 난 강남 실험실에서 진행 중인 실험이 실패하길 바라고 있거든. 그러니까 우리 여기서 다 같이 그 친구들 응원하는 게 어때?”

강남역에 저항군이 모여 있다는 사실까지 알 정도이면 강이란의 말은 사실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 일행 중 누군가 꾸준히 정보를 흘리고 있었다.

“…우리가 용산역에 갔던 것도, 노들섬에 있던 것도 알고 있으면서 따로 개입하지 않았던 이유는 뭐야?”

“자기가 오준석 헌터 정도는 쓰러뜨려 줘야 백민기 헌터가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 같았거든.”

실제로 내가 부대장을 쓰러뜨렸기에 주인장이 노들섬으로 데리고 가준 거니, 이번에도 강이란의 생각대로 움직인 셈이다.

또 한 번 놀아난 것에 자조하고 있는데 이나은이 끼어들었다.

“네놈한테 우리를 팔아먹은 배신자는 누구야?”

“그게 누구였더라? 기억이 잘 안 나네. 근데 배신자를 너무 미워하진 마. 내게 모든 정보를 세세하게 다 알려주진 않거든. 지금도 그래. 자기들이 여기에 올 건 알려줬지만, 뒤로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까지는 안 알려줬어.”

강이란은 자기를 상대로 우리가 무슨 짓을 꾸몄을지 기대하고 있다며 혀를 날름거렸다. 결국 그의 도발에 넘어간 이나은은 책상을 발로 걷어차고 강이란에게 달려들었다. 멱살을 붙잡은 채 이나은이 욕설을 내뱉으니, 강이란은 시끄럽다며 귀를 후벼팠다.

“내가 전에 자기한테 말하지 않았어? 세상엔 자기보다 강한 사람이 널리고 널렸다고. 우리 부대장만 봐도 그래. 장담컨대 자기 혼자서는 절대 못 쓰러뜨렸을걸?”

강이란은 몸을 틀어 손쉽게 이나은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리고는 본인이 들어왔던 문 앞에 서서 손가락을 튕겼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 자기들이랑 내가 만난 목적을 잊어선 안 되잖아?”

문이 열리자 군인 한 명이 휠체어를 끌고 왔다. 그녀가 끌고 온 휠체어엔 벨트로 손과 발이 단단히 묶인 남자가 앉아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걸 보니, 기절한 상태인 듯하다.

“허상헌 아저씨?”

군인이 남자의 머리끄덩이를 붙잡아 얼굴을 들어 올리자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눈 한쪽에 안대를 쓰고 있고, 볼에 깊은 흉터 자국이 있긴 하지만 얼굴을 알아보는 데 문제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전에 이나은의 악몽에서 봤던 사람, 허상헌이었다.

“자기가 찾는 게 이 사람 맞지?”

강이란이 씩 웃으며 허상헌의 안대를 벗기자 텅 빈 구멍이 보였다. 푹 꺼진 눈두덩이 밑에 있어야 할 눈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한테 무슨 짓을….”

“자기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연구 자료를 폐기하고 도망치려고 했대. 그래서 눈 하나 뽑았지. 연구해야 하는데 손을 자를 순 없잖아?”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허상헌임을 우리에게 확인시킨 강이란은 군인을 다시 돌려보냈다. 군인이 나간 뒤엔 빨리 거래나 마치자고 재촉했다.

“먼저 자기들이 백민기 헌터를 이쪽으로 보내. 그러면 내가 허상헌 헌터만 남겨두고 방 밖으로 나갈게.”

“아니. 그쪽이 먼저 허상헌 헌터를 우리에게 보내. 백민기 헌터를 여기 남겨두는 건 우리가 실험실에서 벗어날 때야.”

“백민기 헌터를 넘겨받고 자기들은 실험동에 가둘 생각이었는데, 역시 자기는 꼼꼼하네.”

강이란은 감탄하더니 별안간 휠체어를 발로 찼다. 우리 쪽으로 밀려오던 휠체어는 방의 중간 지점에서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먼저 데려가. 그리고 저 위치에 백민기 헌터만 남겨두고 다시 지금 그 자리로 돌아가면 돼.”

“허튼수작 부리면 백민기 헌터는 곧바로 죽을 거야.”

엄포를 놓으니 강이란은 마음대로 하라며 팔짱을 낀 채 휘파람을 불었다.

이나은과 눈빛을 주고받은 뒤, 함께 몸부림치는 백민기를 데리고 천천히 허상헌 쪽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강이란은 별다른 행동을 취할 생각이 없는지 여전히 우리를 응시하기만 했다.

“어떻게 해요?”

이나은이 물은 건 기존에 세웠던 작전대로 진행할 거냐는 것. 배신자의 존재가 맘에 걸리나 보다.

만약 배신자가 우리가 세운 작전을 알려줬다면 강이란은 그를 대비할 수단을 마련해두었을 거다. 그러나 강이란은 분명히 말했다. 우리가 이곳에 올 건 알고 있었으나,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는 모른다고.

거짓말이 아니라면 강이란은 현재 우리가 짠 작전을 모른다고 말한 거나 다름없다. 그러니 원래 정했던 대로 작전을 진행해도 될 것 같다.

“그대로 하자.”

“알겠어요.”

조용히 속삭이며 허상헌 바로 앞에 서자 강이란이 말했다.

“이제 그 자리에 백민기 헌터를 놓고 돌아가면 돼.”

“지금이야.”

“바로 갈게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외치자마자 이나은이 내 복부를 걷어찼다.

[‘인스턴트’ 특성이 발동됩니다.]

[3분간 민첩 스탯이 50 상승합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사이’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플레이어 ‘김화영’과 보상을 나누어 받게 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플레이어 ‘임수연’과 보상을 나누어 받게 됩니다.]

[3분간 플레이어 ‘정현’이 획득한 민첩 스탯 50 중 17 스탯이 플레이어 ‘김화영’에게 귀속됩니다.]

[3분간 플레이어 ‘정현’이 획득한 민첩 스탯 50 중 17 스탯이 플레이어 ‘임수연’에게 귀속됩니다.]

글씨가 새겨진 동시에 이나은의 등 뒤에서 김화영의 팔을 잡은 채 일행들이 등장했다.

실험실 내부에 침입할 방법으로 내가 제시한 건 강이란의 지시에 따르는 척 연기하는 것.

우선 나와 이나은 단둘이서 백민기를 데리고 강이란의 앞에 간다. 이후 허상헌의 신원을 확보하고 곧바로 신호를 보낸다. 신호를 받으면 나머지 일행들이 김화영의 스킬로 등장. 이 방법이 제대로 먹혀든 덕분에 허상헌의 신원을 확보하는 동시에 최종 보스 앞으로 일행 전원을 데려올 수 있었다.

“정현 헌터도 바로 움직여주세요.”

“알겠어. 강이란의 말대로 배신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심해.”

“네. 정현 헌터 말고는 아무도 믿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게요.”

그 말을 끝으로 이나은은 강이란에게 달려들었다.

“이럴 때 쓰려고 박 씨 남매를 데리고 있던 건데. 애들 하나 간수 못 하는 오준석 헌터 때문에 정작 필요할 땐 쓰질 못하네.”

강이란은 살짝 뒷걸음질해 이나은의 주먹을 흘리곤 전투에 임했다. 곧 송태섭과 이화도 가세했다.

이나은의 주먹과 이화의 불길, 송태섭의 대검이 그리는 궤적까지. 몰아치는 공격을 현란하게 피하며 강이란은 미친 듯이 웃었다.

“자기들, 전에 만났을 때보다 더 강해졌구나.”

“죽기 싫으면 전투에나 집중해.”

[스킬 ‘최후의 숨결’이 발동됩니다.]

[스킬 ‘최후의 숨결’로 인해, 플레이어 ‘송태섭’의 랭크가 한 단계 상승합니다.]

[스킬 ‘최후의 숨결’로 인해, 플레이어 ‘송태섭’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한 시간 뒤 플레이어 ‘송태섭’은 ‘전투 불가’ 상태가 됩니다.]

스킬을 쓴 송태섭과 이나은이 전열을 맡고, 이화가 후열을 맡은 상태. 그렇게 강이란 레이드가 시작되었다.

여기서부턴 저 셋이 강이란을 쓰러뜨려 주길 믿을 수밖에 없다.

강이란을 상대하는 세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나머지 일행에게 지시를 내렸다.

“한성수 헌터, 허상헌 헌터는 맡길게요.”

내 말에 한성수는 곧바로 허상헌 몸을 고정한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화영 헌터랑 백민기 헌터는….”

“전력실로 가서 실험실의 모든 전력을 차단한다. 맞지?”

“네. 그리고 연구 자료도 폐기해주셔야 해요.”

강이란 레이드가 진행되는 동안, 한성수는 허상헌을 보호하고 백민기랑 김화영은 전력실로 가 실험실의 모든 전력을 차단한 뒤 연구 자료를 폐기하기로 했다. 그사이에 난 ‘퀴네에’를 쓴 채 실험체들을 구하러 가는 게 우리의 작전.

“제어실은 실험동의 제일 안쪽에 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컴퓨터 비밀번호는 전부….”

“0000. 맞죠?”

“그렇다.”

“참 단순한 비밀번호를 선호하네요.”

“사용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기억해줬으면 한다.”

“비밀번호가 뭔지 잊을 일은 없을 것 같네요. 그럼 출발할게요.”

행동을 개시하기 전, 마지막으로 전투가 벌어지는 쪽을 바라보았다. 강이란은 여전히 빠른 움직임으로 모든 공격을 피하고 있었으나 표정에선 장난기가 사라졌다. S급 헌터 둘과 A급 헌터 하나를 상대하다 보니 진지하게 전투에 임하는 듯하다.

“여차하면 이화가 있으니까 괜찮겠지.”

강이란한테 당한 게 많아 직접 한 방 먹이고 싶긴 했으나, 비전투원인 내가 나설 자리는 아니다. 지금은 작전대로 내 역할을 완수할 때. 실험동으로 향하는 문 쪽을 바라보며 심호흡한 뒤, 난 ‘퀴네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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