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03화 (104/168)

[17. 독사지옥 (4)]

백민기에게 들은 실험동으로 가는 방법은 총 세 가지.

하나는 아까 싱크홀이 생겼던 통로를 따라 쭉 걸어가다가 보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는 것.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연구원 휴게실이 나오는데 거기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바로 제어실에 갈 수 있다. 실험체들이 갇혀 있는 격리실 문을 열어주려면 제어실로 가야 해서 원래는 이 방법을 통해 실험동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통로에 뻥 뚫린 싱크홀 때문에 제어실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니 패스.

다른 방법은 연구동 구석의 소장실에 있는 실험동으로 이어진 캐비닛을 이용하는 것. 이 경우엔 실험동 로비로 가게 된다. 그러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연구동 로비를 가로질러 소장실로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 이 방법 역시 패스.

마지막으로 남은 방법은 세 갈래 길에서 보았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것. 그렇게 해서 제어실로 가려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10여 분 정도 걸어야 해서 시간이 좀 걸린다는 문제점이 있으나 이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아까 연구원들에게 총을 갈겼던 군인이 돌아다니고 있지 않길 바라며 로비에서 나오자마자 세 갈래 길을 향해 뛰어갔다.

“아무도 없네.”

제멋대로인 강이란 세력과 달리 실험실 사람들은 지시를 잘 따르는 모양인지 복도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있어야 할 총 맞은 연구원 시체마저도 그새 치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 고인 핏자국만이 그들이 이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했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누가 핏자국 지우러 오기 전에 빨리 가야겠다.”

핏자국을 뒤로 한 채 열림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안엔 딱 두 개의 버튼만이 있었다. 위를 가리키는 화살표와 아래를 가리키는 화살표. 버튼이 의미하는 바는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래를 가리키는 화살표를 누르자 문이 절로 닫히더니, 엘리베이터는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예상외로 엘리베이터는 한참 동안 아래로 내려갔다.

“실험동이 이렇게 깊은 곳에 있다고?”

백민기가 말한 바에 따르면 이 실험실은 그와 허상헌이 손수 만든 장소라고 한다. 물론 강림한 신의 도움을 받아 만든 장소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 규모의 실험실을 멸망 이후에 만들었다는 건 믿기지 않긴 한다.

“백민기 헌터랑 허상헌 헌터는 이런 곳을 대체 어떻게 만든 거야?”

엘리베이터는 몇 분 정도 더 내려가고 나서야 멈추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실험동 로비가 보였다. 여기는 연구동 로비와 다르게 탁자 말고도 여러 가지 물품이 있었다. 방송이 나오기 직전까지 고스톱이라도 친 건지, 탁자엔 흐트러진 패들이 놓여 있었고 한쪽 벽엔 다트가 걸려 있었다.

한편 구석엔 캐비닛 하나가 있었는데, 저 캐비닛이 소장실과 실험동을 연결해준다던 캐비닛인 듯하다.

실험동 로비를 살피는 동안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조심히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 기준으로 로비 정면과 왼편엔 문이 하나씩 있었는데, 왼편의 문으론 지나갈 수 없어 보였다.

“위에서 보았던 싱크홀이 여기로 이어졌나 보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싱크홀이 보여 왼편으로 지나가는 것은 포기했다. 대신에 정면의 문 앞에 다가가니 역시나 자동으로 길을 터 주었다. 자동으로 열린 문을 통과하자 다시 기나긴 복도가 나왔다.

“여기서 앞으로 쭉 가다가 첫 번째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꺾은 다음 다시 앞으로 나아가면 제어실이 나온다고 했지.”

경로를 되짚으며 길을 나섰다. 복도 양옆에는 ‘격리실-1’, ‘격리실-2’, ‘격리실-3’ 등의 팻말을 단 방들이 있었는데 벽면이 투명해 내부가 훤히 보였다.

각 격리실에는 두세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이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유일한 가구라고 할 수 있는 매트리스에 걸터앉아 있었고, 그런 그들 옆으로 검은 봉지와 노란 액체가 담긴 페트병 몇 개가 보였다. 노인과 어린아이 가리지 않고 격리실에 가둔 것도 모자라, 최소한의 편의까지 봐주지 않는다니. 욕이 절로 나왔다.

“볼일도 저 안에서 해결하게 하는 거야? 적어도 실험당하지 않을 땐 편하게 지내게 해주지. 망할 놈들.”

어차피 ‘퀴네에’ 덕분에 남들에게 들리지도 않을 테니, 속 시원하게 욕을 내뱉으며 갈림길까지 나아갔다.

“여기서 왼쪽.”

좌측으로 몸을 트니 이번엔 ‘실험실-1’, ‘실험실-2’, ‘실험실-3’ 등의 팻말을 단 방들이 보였다. 이곳도 벽면이 투명해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어떤 실험실엔 피가 잔뜩 튀어 있고, 어떤 실험실엔 고문 기구 같은 장치가 있었다. 팻말을 가린다면 이곳이 실험실인지 고문실인지 분간할 수 없었을 거다.

“이딴 식으로 스탯을 낮출 방법을 찾을 수 있긴 한 거야?”

제어실에는 아홉 번째 실험실을 지나치고 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제어실의 문도 앞에 서자 자동으로 열렸는데, 그 탓에 내부에 있던 헌터들의 시선이 쏠렸다.

“뭐야? 누구 왔어?”

의자에 늘어져 있던 연구원이 눈을 비비며 묻자, 옆에서 컴퓨터를 바라보고 있던 연구원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퀴네에’를 쓴 날 인식하지 못한 그는 문 주변을 대충 둘러보다가 센서에 오류가 생긴 것 같다며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를 따라 재빨리 제어실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그제야 구석에 서 있던 군인들은 문을 향해 겨눈 총을 내렸다.

“오랜만에 잘 자고 있었는데, 이젠 센서가 오류 나서 단잠을 깨우네. 난 다시 눈 좀 붙일 테니까, 혹시 주변에 누구 왔다 간 건 아닌지 CCTV로 찾아봐.”

“네.”

“건성으로 대답하지 말고, 빨리 움직여!”

상급자인듯한 연구원이 다시 잠에 빠지자 컴퓨터를 보던 연구원은 그를 향해 중지를 들어 올려주곤 수많은 화면이 설치된 벽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뒤를 따라가니 실험실 내부를 속속들이 보여주는 CCTV 화면들이 보였다.

연구원은 화면을 훑어보다 어느 한 곳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꽂힌 곳은 연구동 로비 쪽을 비추는 화면.

“벌써 다 쓰러뜨리셨네. 홀로 ‘레비아탄’도 때려잡는 분한테 덤벼들길래 뭔가 있나 했는데, 전혀 아니었나 보네. 인사과장님이 얼마나 강하신지 몰랐던 건가?”

“어떻게 된 거야?”

화면에 강이란의 모습은 없었다. 대신 화면에 비치는 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일행들뿐.

“설마 강이란, 그놈이 이긴 거야?”

S급 괴수를 한 방에 쓰러뜨릴 정도로 강하다는 건 인식하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가 제어실로 오는 동안, 송태섭과 이나은 그리고 이화까지 전부 쓰러뜨리다니. 그 셋이라면 강이란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는데, 전혀 아니었다. 부대장과 마찬가지로 강이란 역시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으로 강했다.

“이화! 이화는 어디 있지?”

동생은 화면 구석에서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다행히 죽지는 않은 듯하다.

“저 셋으로도 상대할 수 없다면 대체…. 이래서야 부대장을 처음 상대할 때랑 똑같잖아. 이젠 어떻게 하지? 도망이라도 쳐야 하나.”

모든 작전은 저 셋이 강이란을 쓰러뜨린다는 전제하에 세워졌다. 이나은이 이번엔 자신이 반드시 강이란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장담해 세운 작전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꼬일 거라곤 생각 못 했다.

“제길.”

혼란스러워할 때, 제어실 문이 열렸다.

곧바로 누군가 들어오자 군인들은 경례하고 연구원은 자신의 선임을 황급히 깨웠다.

“실험실 전체에 방송할 거니까 준비해줘.”

명령을 내린 사람은 강이란이었다. 부대장처럼 물리적인 충격이 전혀 통하지 않는 건 아니었는지 강이란의 몸에는 부분부분 상처가 보였다.

“여기에 대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연구원에게 건네받은 마이크에 대고 강이란은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들, 지금 실험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 같은데 당장 연구동 로비로 돌아오는 게 좋을 거야. 자기들이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10분마다 자기 동료들을 한 명씩 죽일 거거든.”

태연하게 협박 방송한 강이란은 피식 웃고는 말을 덧붙였다.

“자기, 너무 멍청한 거 아니야? 내가 왜 부하들을 전부 강남으로 보냈겠어? 당연히 나 혼자서도 이곳을 충분히 지킬 수 있기 때문이란 생각은 안 해봤어?”

미친 듯이 웃던 강이란은 이번엔 CCTV 화면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화면 한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여긴 어디에 설치된 CCTV야?”

“실험동 로비입니다.”

“알아서 기어 왔구나.”

강이란이 가리킨 화면에 비치는 건 벽에 몸을 기댄 채 힘겹게 걷고 있는 이나은. 다리를 질질 끄는 것을 보니 한쪽 다리가 완전히 부러진 듯하다.

“CCTV 보고 있다가 다른 침입자가 보이면 바로 방송해서 나한테 알려줘.”

“알겠습니다.”

“그리고 소장은 근무 시간에 자는 연구원, 별로 좋아하지 않을걸? 소장한테 죽기 전에 내가 대신 죽여줄게.”

대꾸할 시간도 주지 않고 강이란은 단검을 던져 선임 연구원의 숨통을 끊었다.

“소장한테 걸려서 실험실로 끌려갈 바엔 깔끔하게 죽는 게 좋잖아. 안 그래?”

“마, 맞습니다.”

“아까 내가 이야기했던 거 기억하지? 다른 침입자가 보이면 바로 방송해.”

그 말을 남기고 강이란은 제어실 밖으로 나갔다. 이대로면 이나은이 강이란에게 붙잡히는 건 시간 문제. 그렇게 놓아둘 순 없다.

어떻게든 이나은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보려고 강이란의 뒤를 따라나섰는데, 그는 이미 저 멀리에서 코너를 돌고 있었다.

“방금 밖으로 나갔잖아? 왜 이리 빠른 거야.”

전속력으로 달려 그의 뒤를 쫓아 코너를 돌았을 땐, 강이란은 이미 실험실 로비로 이어지는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이 열리자 실험실 로비 한가운데 서 있는 이나은이 보였다. 이나은이 흘린 피로 흥건해진 바닥을 보며 강이란은 혀를 찼다.

“자기, 왜 얌전히 누워 있지 않고 여기에 온 거야?”

강이란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신의 이마를 쳤다.

“자기 동료 지금 여기 있는 거구나. 그래서 자기 동료 지키려고 자기가 여기 온 거지? 그런데 자기 동료가 여기 온 목적이 뭘까? 실험체들을 다 풀어주기라도 하려던 건가?”

그의 물음에 답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 이나은은 숨을 고르기만 했다. 증오스러운 눈으로 강이란을 노려보던 이나은은 입에서 피를 모아 뱉고는 주먹을 쥐었다.

“아니.”

“그러면?”

“그쪽 쓰러뜨리려고 왔어.”

[플레이어 ‘강이란’이 플레이어 ‘송태섭’을 살해하여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고유 능력 ‘오만’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이나은’의 모든 스탯이 2배로 상승합니다.]

[고유 능력 ‘오만’의 제약 조건, ‘귀속 플레이어의 랭크 한 단계 감소’가 해지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