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독사지옥(5)]
고유 능력 ‘오만’. 이나은이 헌터가 된 직후 S급 헌터를 일격에 쓰러뜨릴 수 있었던 건 바로 저 고유 능력 때문이었다.
효과는 단순하면서도 사기적이다.
조건이 충족되면 모든 스탯이 2배로 상승하는 동시에 ‘귀속 플레이어의 랭크 한 단계 감소’란 제약이 사라진다.
고유 능력의 자세한 내용까진 미지수지만 확실한 건 지금 이나은의 스탯은 SS급 헌터를 압도하고도 남을 만큼 높다는 거다. 어쩌면 SSS급 헌터마저도 단숨에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고유 능력이 발동된 상태에서 이나은이 강이란을 쓰러뜨린다 한들 송태섭이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S급 헌터가 속한 그룹도 전멸하는 와중에 우리 일행이 그런 꼴을 겪지 않은 건 네 덕분이라는 걸 모두가 알걸?’
‘나를 어떻게 굴리든 상관없으니까, 지금까지처럼 낙오자가 없도록 이끌어줘.’
“제길, 그런 말까지 들어놓고….”
송태섭이 죽었단 사실에 괴로워할 때, 이나은이 움직였다. 벽을 지지대 삼아 움직였던 사람이라곤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다. 그녀는 순식간에 강이란의 앞에 달라붙어 그의 멱살을 잡았다.
“아까랑은 다를 거야.”
그렇게 말하곤 이나은은 강이란을 실험동 로비 쪽을 향해 냅다 던졌다. 얼마나 세게 던졌는지, 전속력으로 날아간 강이란이 부딪힌 엘리베이터 문은 완전히 찌그러질 정도였다.
“정현 헌터, 이 근처에 계시죠? 그렇다고 생각하고 말할 테니 잘 들으세요. 방송으로 들었겠지만, 저희 계획은 완전히 망했어요. 송태섭 헌터는 죽었고 정이화 헌터랑 한성수 헌터 다 쓰러진 상태예요. 그러니 정현 헌터는 김화영 헌터랑 백민기 헌터 찾아서 연구동 로비로 가 주세요. 그런 다음 거기에 쓰러진 사람들 데리고 여기서 나가세요. 전 그동안….”
이나은은 질질 끌던 다리를 양손으로 붙잡더니 그대로 비틀었다. 뿌드득 소리를 내며 틀어졌던 다리가 본래의 위치를 찾고, 그 과정에서 생긴 고통을 견디는 중인지 이나은은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저 자식을 쓰러뜨려 볼게요. 아니, 적어도 시간은 벌어드릴게요.”
엘리베이터 문에 박혀 있는 강이란이 기이한 웃음소리를 내자 이나은은 얼른 말을 바꾸었다. 고유 능력으로 상승한 압도적인 스탯을 생각했을 땐 시간을 벌겠다고 말을 바꾼 게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강이란의 모습을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엘리베이터 문을 짚고 앞으로 걸어 나오는 강이란의 입에선 피가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표정에 두려움이라곤 전혀 없었다. 오히려 지금 상황을 즐기는 듯 자신의 이마에서 흐른 피를 손가락으로 찍더니 맛을 보고 있다.
“짜네.”
“역시 제정신이 아니네.”
“자기, 뭔 짓을 한 거야? 원래 이렇게까지 강하지는 않았잖아. 이 정도 파괴력이면 내가 만난 상대 중 ‘레비아탄’을 제외하면 자기를 이길 존재는 없을 것 같은데?”
“입 다물어.”
[플레이어 ‘이나은’이 ‘겨루기 준비’ 상태가 됩니다.]
칭찬에 질색하며 이나은은 강이란에게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다. 원래도 일행 중 김화영 다음으로 민첩한 움직임을 보여왔었는데, 지금은 김화영의 속도마저도 뛰어넘을 정도다.
다시 한번 강이란의 앞에 도달한 이나은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매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제 시작이니까 이 꽉 깨물어.”
[플레이어 ‘이나은’이 ‘정권 지르기’ 기술에 성공하였습니다.]
[1점 득점으로, ‘힘’이 2배 적용된 피해를 입힙니다.]
이번 이나은의 공격은 강이란의 가슴팍에 정확히 꽂혔다. 주먹이 닿자마자 충격파가 몸 뒤로 뻗어 나가며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뜯어졌다.
“이 꽉 깨물라니까.”
공격에 뒤로 밀려나려던 강이란의 머리채를 한 손으로 붙잡은 채 이나은은 주먹을 수십 번 휘둘렀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정권 지르기’ 기술에 성공하였습니다.]
[1점 득점으로, ‘힘’이 2배 적용된 피해를 입힙니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정권 지르기’ 기술에 성공하였습니다.]
[1점 득점으로, ‘힘’이 2배 적용된 피해를 입힙니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정권 지르기’ 기술에 성공하였습니다.]
[1점 득점으로, ‘힘’이 2배 적용된 피해를 입힙니다.]
공격은 모두 클린 히트.
가슴. 복부. 옆구리 등등. 그녀의 주먹이 닿을 때마다 강이란의 옷이 찢겨 나가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렇게 한참 주먹을 뻗다 마무리로 몸통을 발로 차 밀어내며 이나은은 손을 털었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밀어차기’ 기술에 성공하였습니다.]
[2점 득점으로, ‘힘’이 2.5배 적용된 피해를 입힙니다.]
찌그러진 채 바닥에 떨어져 있는 엘리베이터 문에 부딪힌 강이란은 입에서 피를 뿜었다.
“이 정도면 이나은 헌터 혼자서도 강이란을 쓰러뜨릴 수 있겠는데?”
송태섭이 죽었다는 걸 알았을 때, 귀환을 택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이나은의 말대로 움직이는 대신 여기 남아 전투를 지켜보면서 강이란의 약점이라도 찾아내려고 했다. 그랬는데 이나은이 이렇게 선전할 줄이야.
“일어서.”
이나은의 분노 어린 말에 강이란은 쓰러진 채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공격을 몇 번 더 맞았다간 골로 가겠지?”
그러다 두 팔을 들어 올리더니 손뼉을 쳤다.
“이 정도로 몰아세워 진 적은 처음이야. 자기가 강하다는 거 이젠 인정할게.”
“그런 말을 할 상태는 아닌….”
“그럼 이제 내 차례지?”
바닥에 쓰러져 있던 강이란이 모습을 감췄다. 그는 어느새 이나은 바로 앞에 서서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렇게나 많은 피를 흘렸는데도 움직임을 눈으로조차 쫓지 못할 정도라니. 더군다나 찢긴 옷 틈새로 보이는 상처는 완전히 아물기 직전이다. 어째선지 지금까지의 공격이 전혀 피해를 주지 못한 모양이다.
“자기는 이번에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공방전 때 봤던 분노 가득한 표정? 아니면 태섭이가 자기 동료 대신 죽을 때 지었던 두려움에 떠는 표정?”
물음과 동시에 강이란은 이나은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기습적인 공격에도 이나은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으나, 뼈 부러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아무래도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로 큰 충격을 입은 것 같다.
이어지는 강이란의 주먹질. 이나은은 팔을 뻗거나 허리를 틀며 공격을 어떻게든 피해갔으나 기세는 완전히 강이란 쪽으로 넘어갔다.
“자신만만하던 태도는 어디 갔지? 자기, 분명 날 쓰러뜨리러 왔다고 하지 않았어? 이래서야 날 쓰러뜨릴 수 있겠어?”
그 말을 뒤로 두 사람은 주먹을 실컷 주고받았다. 실험동 로비를 난장판으로 만들며 싸움을 이어나간 결과, 이나은은 거친 숨을 내쉬며 구석에 몰아진 신세가 되었다. 이제 한 발짝만 뒤로 물러나면 싱크홀로 빠질 수도 있는 위치. 그녀에게 승기는 없어 보였다.
강이란도 피를 흘리는 걸 보면, 이나은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체의 회복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 고유 능력을 써 ‘회복력’ 스탯이 기존의 배가 된 이나은보다도 빠르게 신체가 재생하고 있다.
“‘오만’을 발동한 이나은마저 압도한다면 강이란, 저 자식은 대체 어떻게 해야만 쓰러뜨릴 수 있는 거야.”
피해를 주는 즉시 회복되는 강이란의 모습에 포기할 법도 한데, 이나은은 여전히 주먹을 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강이란은 감탄했다.
“그래도 아까 자기 일행들보단 훨씬 낫네. 초월자님께서 자기를 그토록 아끼는 이유를 어렴풋하게는 알겠어.”
“…아직 싸움은 안 끝났어.”
이나은이 또다시 자세를 취하자, 강이란은 미친 듯이 웃었다.
“다른 일행들이 도망칠 시간을 이 정도로 번 것만으로도 자기는 대단해. 그렇지만 여기까지야. 이만 포기해줘. 난 자기를 죽여선 안 되는데, 이렇게 계속 버텼다간 실수로 자기를 죽여버릴 거 같거든.”
“다물어.”
강이란은 이나은의 사나운 눈매를 따라 하며 물었다.
“미안한데, 자기 일행들이 여기서 살아나간다 해도 아무 의미가 없어.”
“아니. 정현 헌터라면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아서 그쪽을 쓰러뜨려 줄 거야. 그렇게라도 네 놈을 죽일 수 있다면 충분해.”
“그건 맞는 말이지. 실험실 어딘가에 숨어 있을 자기라면 틀림없이 날 쓰러뜨려 줄 거야. 근데 자기가 착각하고 있는데, 내 말뜻은 그런 게 아니었어. 내가 하고픈 말은 이미 혼란의 씨앗이 뿌려진 지 오래란 거야.”
“혼란의, 씨앗?”
“자기들은 모르고 있지만 난 시련이 시작되기 전부터 알고 있었어. 내가 추구하는 세상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자기들이 나를 여기서 쓰러뜨리는 것도 그때가 되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거야. 모든 건 혼란에 집어삼켜질 거니깐.”
조금만 자고 있으란 말을 덧붙이곤 강이란은 단검의 칼등으로 이나은의 목덜미를 쳤다. 그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한 이나은의 눈이 풀리며 몸이 아래로 꺾였다.
“여기서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썼네. 다른 일행들이 도망치면 안 되는데.”
강이란이 불평하며 몸을 틀어 캐비닛 쪽으로 걸어가려는 순간. 쓰러진 이나은의 입에서 불길한 소리가 나왔다.
“어차피 뒤질 거 혼자 갈 순 없지.”
그렇게 말한 이나은은 강이란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네 부하랑 똑같은 방식으로 죽어봐.”
이나은은 씩 웃더니 싱크홀 쪽으로 굴렀다.
이나은의 악력을 이겨내지 못한 강이란은 그대로 그녀와 함께 싱크홀 아래로 떨어졌다.
워낙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놀랄 틈도 없었다. 그저 멍한 기분으로 싱크홀 쪽으로 다가가게 되었다. 머릿속에선 귀환을 택할 때가 되었다는 말이 울려 퍼졌고, 그에 홀려 있다가 정신을 차리니 난 싱크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싱크홀의 아래에선 들려선 안 될 강이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너무 안일하잖아. 고작 자기가 준비한 게 동료보고 구덩이로 끌고 들어가라는 거였어? 아니잖아. 자기라면 분명 이보다 더 꼼꼼하게 준비해야 했잖아. 정말 나를 쓰러뜨리려고 온 거 맞아? 아니면 그저 간만 보러 온 거야?”
싱크홀 바닥, 이나은은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고 있다. 이미 숨이 끊어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실망이 가득한 말투로 중얼거리는 강이란은 자신에게 덤벼오는 구덩이 속 존재들을 하나하나 상대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독사와 싸움꾼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놈이야….”
강이란이 구덩이 아래의 존재들을 쓰러뜨리는 걸 보고 경악하는데, 안내 방송이 울렸다.
‘관리자 권한에 따라 공덕 실험실이 곧 폭파됩니다.’
“뭐야?”
‘실험실 내에 남아 계신 분들은 서둘러 밖으로 대피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실험실은 1분 뒤 자동으로 폭파됩니다.’
뜬금없이 들린 안내 방송에 어이없어할 때, 처음으로 굳은 강이란의 표정을 보았다.
‘최종적으로 공덕 실험실 폭파가 승인되었습니다.’
‘공덕 실험실이 폭파됩니다.’
[죽음의 경계로 이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