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독사지옥(6)]
쏟아져 내리는 천장에 깔려 의식을 잃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이 들어 눈을 떴을 땐, 예의 어둠으로 가득 찬 공간이 보였다.
「일주일도 안 되어서 이곳에 오다니. 너무 이른 것 아닌가?」
어둠 속에서 나를 반긴 건 ‘크로노스’. 초월자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웃겼는지 귀청이 떠나가라 웃었다.
「사인이 고작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 압사한 거라니. 자네 덕분에 인간이 나약한 존재임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네.」
“나도 내가 이렇게 죽을지는 몰랐어.”
실제로 실험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압사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죽게 된다면 당연히 강이란 아니면 그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싱크홀에 빠져 지옥의 존재들에게 죽임을 당하리라 여기고 있었다. 무너지는 천장에 압사하는 것 따윈 내 선택지엔 존재하지 않았다.
「선택지라니. 흥미롭군.」
내 생각을 또 제멋대로 읽은 초월자는 실험실에 들어가기 전부터 어떻게 죽을지 선택지를 마련해둔 거냐고 물었다.
“혹시 모르는 거잖아. 부대장도 한 번에 쓰러뜨리지 못했는데, 대장을 원코에 쓰러뜨릴 수 있을지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
「원코?」
“코인 한 번. 한 번에 게임을 클리어한다는 의미야.”
「별의별 용어를 다 만들어 쓰는군. 그런데 강이란을 원코에 쓰러뜨릴 수 있는지와 자네가 어떻게 죽을지 선택지를 마련하는 게 무슨 상관인 거지?」
“처음부터 난 동료들이 강이란을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죽을 생각이었거든.”
작전을 짤 때, 내가 상정했던 흐름은 세 가지.
첫째, 동료들이 강이란을 쓰러뜨린다.
둘째, 강이란이 버거움을 느끼고 싸움 도중에 도망친다.
셋째, 내가 실험체들을 풀어주고 김화영과 백민기가 전력을 차단할 때까지도 전투가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이중 첫 번째 흐름대로 실험실 상황이 흘러가지 않는 이상, 죽음을 택하려고 했다.
부하를 대동하지 않은 강이란을 쓰러뜨릴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모른다. 여기서 강이란을 놓치기라도 한다면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CONTINUE?’ 특성을 몇 번이고 써서라도 강이란은 공덕 실험실에서 반드시 잡고 간다는 마인드로 작전에 임했다. 그랬는데.
「자네 친구들이 강이란에게 패배할지는 몰랐나 보군.」
초월자의 말대로다. 그 세 사람이 강이란에게 손쉽게 당할지 몰랐다. 게다가 송태섭이 죽음을 맞이할 줄이야.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보다 죽더라도, 적어도 동료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CONTINUE?’ 특성을 사용하고자 했는데. 고작 그거 하나 지키지 못하다니. 강이란을 얕봐도 너무 얕보았다.
「자네도 참 한결같군.」
“한결같다니?”
「자네가 쳐둔 선을 넘어온 사람들에겐 한없이 헌신적으로 대하는 게 신기해서 한 말이었네.」
내가 쳐둔 선?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시련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 선을 넘은 사람은 자네 동생과 임수연이라는 아이밖에 없었으니 모를 법도 하겠군. 중요한 건 아니니 신경 쓰지 말게나. 그래서 귀환한 뒤엔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봐야지. 잠깐만 조용히 해줘.”
「알겠네. 생각 좀 정리하게나.」
초월자의 배려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 내가 생각해야 할 건, 죽음에서 벗어나며 강이란까지 쓰러뜨릴 방법.
죽음에서 벗어날 방법은 단순하다. 무너지는 천장에 압사했으니 실험실이 폭파되지 않도록 만들면 된다.
“실험실이 폭파할 때, 싱크홀 아래에 있던 강이란도 놀랐던 걸 보면 그 자식이 실험실을 폭파하라고 지시한 건 아닐 테고.”
강이란의 지시로 실험실이 폭파된 게 아니라면 대체 누구의 짓이지?
우리 일행과 강이란을 제외하고 당시 실험실에 있던 사람은 연구원과 군인들. 지금으로선 그들 중 관리자 권한을 가진 사람이 실험실을 폭파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연구소장의 짓인가? 싸움에 아예 개입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도 견제해야 했나?”
더 생각한다고 알아낼 수 있는 건 없다. 누가, 어떻게 실험실을 폭파했는지는 귀환하자마자 백민기 헌터와 대화하며 알아내고 대처법을 마련해야겠다.
“아니면 그걸 이용할 수도 있으려나?”
방금처럼 강이란을 싱크홀에 빠뜨린 다음 우리가 실험실을 폭파한다면 그를 확실히 쓰러뜨릴 수 있다. 물론 이 방법을 쓰기 위해선 우리가 폭파에 휩쓸리지 않고 실험실에서 확실히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게 전제되어야겠지만.
실험실 폭파에 관해선 여기까지 생각하고 다음은 강이란을 쓰러뜨릴 방법이다.
당연히 평범한 방법으로 그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고유 능력 ‘오만’을 쓴 이나은마저도 그를 상대하지 못했으니, 부대장을 쓰러뜨렸을 때처럼 약점을 찾아 그 부분을 파서 공략하는 수밖에 없다.
“약점이 뭐가 있지?”
바로 생각나는 건, 이나은의 공격이 통하긴 했다는 것. 처음 제어실로 왔을 때도 상처를 입고 있었던 걸 보면 치유력 스탯이 압도적으로 높을 뿐, 신체의 강도 스탯까지 높은 건 아닐 거다.
「그러진 않을 거라네.」
“어째서지?”
「‘독사지옥’의 구덩이 속 존재 같은 지옥에서 온 생명체들은 ‘인간계’에선 일시적으로 모든 스탯이 ∞가 된다네. 그들이 ‘인간계’에서 ‘필멸자’에게 죽는 일이 있어선 안 되거든.」
“그럼 강이란은 어떻게?”
「그자가 지옥에서 온 생명체를 죽일 수 있었던 이유로 생각나는 게 하나 있긴 하네.」
“생각나는 거라면?”
「이 몸은 이미 자네에게 힌트를 줬다네. 해답은 자네가 직접 찾게나. 이 몸은 자네가 해답을 도출해내는 과정을 보며 즐기고 있을 테니.」
도움은 못 줄망정, 비꼬기나 하다니.
방금 초월자가 한 말의 핵심은 강이란이 모든 스탯이 ∞인 존재를 쓰러뜨렸다는 거다. 그것도 차례로 하나씩 말이다.
“그러면 강이란도 모든 스탯이 ∞라는 거야? 말이 돼? 그 정도로 스탯을 올리려면 초월자들한테 얼마나 많은 포인트를 후원받아야 하는 거야?”
「우리 초월자들에겐 초월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포인트가 지급된다네. 이때 받을 수 있는 포인트는 유한한 액수지.」
“포인트를 후원받아서 스탯을 올린 건 아니란 말이네.”
스탯이 어떻게 ∞가 되었건 간에 우리 일행이 전투를 통해 강이란을 쓰러뜨릴 방법은 따로 없다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근데 구덩이 속에 있는 존재들까지 죽일 수 있으면서 왜 이나은하고 비등비등하게 싸웠던 거지? 이나은의 고유 능력이 발동되기 전에 입었던 상처는 또 뭐였고?”
그냥 놀려고 연기라도 한 거였나?
뭐, 어찌 되었건 전투를 통해 쓰러뜨릴 순 없는 노릇이니 그를 싱크홀에 빠뜨린 다음 실험실을 폭파하는 방법이 최선인 것 같다.
“그러기엔 아직 정보가 부족해.”
강이란의 스탯에 관한 비밀은 제쳐두고라도 실험실을 폭파할 방법, 강이란을 구덩이에 빠뜨릴 방법 등. 알아내야 할 것은 여전히 많다.
“적어도 한 번은 그쪽을 더 보러 와야겠네.”
「한 번 더 죽을 생각인 건가?」
“강이란을 쓰러뜨리기 위해선 그게 최선이야.”
「재미없군. 왜 직접 싸울 생각은 안 하는 건가?」
“당연한 걸 묻고 그래. 내가 싸워봤자 강이란에게 한 방에 죽을 건….”
설마 본인이 내게 강림하려고 저런 이야기를 하는 건가?
“미안한데 내게 강림할 생각이라면 접어둬. 그럴 바엔 차라리 나랑 전속 계약 맺어서 가진 포인트나 전부 뱉어.”
「고작 강이란 따위의 존재에게 겁먹은 자와 전속 계약하기는 싫네.」
「자네가 강이란을 직접 쓰러뜨린다면, 그땐 한 번 고민해보지.」
“전속 계약 절대 안 맺겠단 이야기네. 나도 그냥 해본 이야기니 됐어.”
「시간이 다 됐군.」
「곧 다시 만나길 고대하고 있겠네.」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
“곧 다시 만나길 고대한다고? 빨리 죽으란 말이나 다름없잖아!”
“네?”
눈앞에 당황한 표정의 이나은이 있다.
지난번과 같은 패턴이다. 난 초월자의 말을 끝으로 귀환했다.
귀환한 시점은 편의점에서 공덕역 근처를 살피던 때. 그림 족자가 보이는 걸 보니, 시련 내용이 밝혀진 뒤인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니까요?”
정확하게는 작전을 실행할지 말지 정하기 직전.
귀환한 시점이 이때라 다행이다.
“그전에 백민기 헌터한테 뭐 하나만 물어볼게.”
“내게 뭘 물어보고 싶나?”
“혹시 실험실에 자폭 장치 같은 게 있나요?”
“그걸 어떻게 알았나?”
백민기가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냥 뭐. SF 영화 같은 데 보면 그런 게 하나씩은 꼭 있길래….”
“네 생각대로다. 각 실험실의 소장실엔 자폭 장치가 있다.”
“그걸 작동시키면 어떻게 되죠?”
“자폭 장치를 가동하면, 1분 뒤 실험실이 폭파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그리고 1분 뒤 ‘펑’. 맞나요?”
“그건 아니다. 경고했던 시간이 지나면 책임자가 자폭 장치 가동을 승인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폭 장치는 가동되지 않는다.”
그러면 책임자는 무조건 죽을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이나은도 나와 같은 의문을 품었는지 책임자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다.
“무너지는 실험실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책임자는 당연히 연구소장이겠죠?”
“그렇다.”
“책임자 말고 다른 사람이 자폭 장치 가동을 승인할 순 없는 거죠?”
“가동을 승인하기 위해선 책임자의 홍채를 인식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이 장치를 가동할 순 없다.”
실험실을 폭파한 범인은 찾았다.
“연구소장이 저지른 짓이었나.”
그러면 이제 여기서 더 알아낼 사실은 없다.
“책임자가 저희 말에 순순히 따를 리는 없으니 자폭 장치는 쓸 수 없겠네요.”
“…미안.”
대답 대신 사과의 말을 남기고 ‘퀴네에’를 썼다.
“네? 미안하다고요? 뭐 잘못하신 거라도 있어요? 아니면 설마 또 혼자 무슨 짓 꾸미고 있는 건 아니죠?”
갑자기 모습을 감춘 날 정신없이 찾았으나, 이나은이 나를 찾을 수 있을 린 없었다.
이나은이 공덕 실험실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더 나중에 하길 바라며, 홀로 8번 출구 쪽으로 향했다.
자폭 장치에 관한 정보를 알아냈으니 이젠 실험실에 가서 다른 정보들을 얻을 차례다.
강이란을 쓰러뜨리기 위한 정보만 수집하고 귀환할 생각이니, 거기에 굳이 다른 일행들을 데려갈 필욘 없다. 일행과 함께한다면 오히려 강이란과 대화를 나눌 시간이 줄어들 게 뻔하다.
“8번 출구로 내려가면 되는 거였지.”
그렇게 백민기와 이나은을 뒤로하고 나는 8번 출구 밑으로 내려갔다.
기억을 더듬으며 이동하여 어느새 공중전화부스가 있는 방에 도착했다.
“백민기 헌터랑 이나은 헌터 없이 홀로 왔는데, 실험실로 들여보내 줄지가 문제네.”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돌이킬 순 없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퀴네에’를 벗은 채 공중전화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곧 수화기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세요. 인사과장님께서 정현 헌터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번에도 그 말을 끝으로 수화기에선 규칙적인 신호음이 울렸다.
“여기 있다.”
그리고 바닥엔 전화카드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