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독사지옥(7)]
전화카드를 꽂고 실험실에 도착한 뒤의 상황은 전과 동일하게 흘러갔다. 최정규와 군인 둘이 연구동 로비로 이어진 길을 안내하고, 그 과정에서 군인 한 명이 연구원에게 총질하기까지. 전부 이미 내가 겪은 그대로였다.
상황은 연구동 로비 안에 들어가고 나서야 바뀌기 시작했다.
“저기 앉아 계시면 곧 반대편 문에서 인사과장님이 나오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탁자 앞에 앉으니 최정규는 군인을 이끌고 온 길로 되돌아갔다. 기억을 더듬었을 때, 저렇게 퇴장한 최정규가 연구동 로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다. 아마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실험동 로비로 내려가 캐비닛을 이용해 소장실로 간 것 같다. 그러고서 실험실을 폭파했겠지.
“실험실 폭파를 막으려면 여기에 도착하자마자 소장을 제압해야 하나.”
조용히 중얼거리는데 연구동으로 이어진 문이 열렸다.
“자기, 오래간만이야.”
인사에 화답하는 대신 강이란 뒤에 선 군인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들은 누구지?”
내 물음에 강이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만 했다. 그가 내 물음에 답해준 건 군인들을 방 밖에 대기시킨 이후였다.
“군인들은 작전과 쪽 사람들이야. 저 사람들은 내 맘대로 다룰 수 없어서 강남 쪽으로 보내지 못했어. 그래도 자기가 바랐던 것처럼 내 부하만큼은 전부 강남 쪽으로 보냈으니 너무 맘 상해하진 마.”
의외로 순순히 답해준 데에 놀라니 이번엔 강이란이 질문을 던졌다.
“질문에 답해줬으니, 이젠 자기가 내 질문에 답해줄 차례야. 자기는 왜 여기 혼자 있는 거지? 난 분명 이나은 헌터랑 함께 백민기 헌터를 데려오라고 했을 텐데? 혹시 법무팀장이 일을 잘못 처리한 거야?”
“네 말은 제대로 전해졌어. 내가 신호를 보내면 그 두 사람은 곧바로 여기로 올 거야.”
“그러고 보니 자기 일행 중에서 순간 이동 비스름한 스킬을 가진 사람이 있었지?”
고개를 끄덕이니 강이란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훑었다.
“자기가 홀로 여기에 왔다는 건 나랑 따로 할 이야기가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지?”
“정확하게는 너랑 전에 하던 게임을 이어서 할 생각이야.”
“전에 하던 게임?”
“예술회관에서 진실게임 했던 거 벌써 잊은 거야?”
“만약 싫다면?”
강이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특급 냉장고’에서 궁중 식도를 꺼내 내 목에 가져다 댔다.
“난 그 즉시 여기서 죽을 거야.”
협박에도 강이란은 식도를 미적지근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내 목숨을 끊지는 못하리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내가 여기서 죽으면 넌 백민기 헌터랑 이나은 헌터를 만날 수 없게 되겠지. 그건 너도 싫지 않아?”
식도를 좀 더 목에 가까이해 피가 배어 나오고 나서야 강이란은 황급히 나를 말렸다.
“그만! 이번엔 내가 졌어. 자기가 바라는 대로 게임에 응해줄게.”
“내가 질문 한 번 하면, 그쪽도 질문 한 번. 규칙은 간단하지?”
“원하는 대로 진행해.”
“질문은 내가 먼저 할게.”
강이란에게 물어봐야 할 건 많다. 우선은 지난번 밝혀내지 못한 이 자식의 목적부터다.
“실험실에서 나를 보고자 한 이유는 뭐야? 내가 더 큰 혼란을 불러올 퍼즐 조각이라서 그런 건가?”
전에 진실게임 할 때 들었던 말을 인용하며 비아냥대자 강이란은 뜬금없는 답을 내놓았다.
“난 지금껏 자기만큼 대단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뭐?”
“모든 스탯이 0인 자기가 해낸 걸 봐봐. 예술회관에선 S급 괴수에게서 살아남더니, 야구경기장에선 박무성 헌터를 붙잡았지. 더군다나 내가 지하통로에 배치한 행동대장과 부하들까지 격파했잖아. 이뿐만이 아니야. 이후엔 현신한 초월자님에게서 살아남았고, 법무팀장과 법무팀 전원을 마포대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기도 했어. 게다가 용산에선 여태껏 나 외의 그 어떤 헌터에게도 패배해본 적 없는 우리 부대장까지 쓰러뜨렸지!”
강이란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공방전 때부터 지금까지의 내 행적을 줄줄 읊었다. 그의 눈이 흰자로 가득 차고, 입에서 침이 새어 나오는 걸 보니 역겨움을 넘어 이젠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건 내가 대단한 게 아니라, 동료들이….”
“내가 준비한 것들을 하나하나 돌파하다가 결국엔 부대장까지 쓰러뜨린 시점에서 확신했어. 내가 그토록 찾아왔던 사람이 자기였다는 것을! 혼란의 씨앗이 싹 틔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자기밖에 없다는 걸 말이야! 나도 아니고, 작전 과장도 아니고, 회사도 아니야. 오로지 자기밖에 없다니깐!”
알 수 없는 말을 쏟아내던 강이란은 탁자를 집어 던지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법무팀장에게 말을 전하게 시킨 건 전부 자기를 위해서야. 자기를 예술회관에 보낸 것도. 자기를 야구경기장에 보낸 것도. 자기가 연구일지를 볼 수 있게 한 것도. 부대장이 자기 동료들을 붙잡게 만든 것도. 전부 자기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라고! 그래, 원래는 자기랑 이나은 헌터를 실험동에 가둔 다음 내 제안을 들어주지 않으면 죽일 생각이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겠네. 이참에 내 제안을 들어봐.”
지금껏 나를 괴롭혀 온 이유가 고작 이것 때문이었나.
“네가 할 제안이 뭔데?”
분노를 무릅쓰고 묻자 강이란은 이 순간만을 고대했다며 미친 듯이 웃었다.
“나랑 함께 백민기 헌터를 데리고 강남 실험실로 가자.”
“뭐? 거기엔 왜?”
“당연히 거기 있는 자료를 모두 날려 버려야지. 회사를 혐오하는 백민기 헌터라면 우리를 도와서 실험실의 자료를 전부 없애줄 거야.”
강남 실험실에서 진행 중인 실험이 실패하길 바라고 있다는 게 진짜였다니. 그땐 강이란이 아무 말이나 내뱉는 줄 알았다.
“그런 다음 쓸모없어진 백민기 헌터는 죽이고 우리 둘이서 회사를 치는 거야. 그래, 내가 거기까진 양보할게. 자기 동료들이 필요하면 데려가도 돼. 근데 딱히 필요하진 않을 거야. 자기랑 나, 단둘이서도 회사를 무너뜨릴 수 있거든.”
“회사를 치자고? 너 인사과장인 거….”
“그딴 자리가 뭐가 중요해. 이미 회사 안에서 필요한 건 전부 얻었어. 덕분에 자기에게 천재적인 머리를 충분히 활용할 힘을 줄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그런 자리 따윈 없어도 상관없어. 실은.”
귀에 대고 강이란이 한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공덕 실험실에서 연구는 끝난 지 오래야. 스탯을 내리는 방법? 그딴 게 있을 리 있겠어? 그냥 고문하는 걸 즐기는 연구소장이 여전히 실험을 이어가는 것뿐이야. 회사에선 연구소장이 정보를 누설할까 봐 묵인하고 있는 거고. 하지만 난 여기 연구 결과를 전부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지. 내가 알고 있는 연구 내용대로라면 자기에게 초월자님이 강림하도록 만들어줄 수 있어. 그러니 자기는 우리 초월자님과 전속 계약을 맺기만 하면 돼. 내 제안 어때? 구미가 당기지 않아?”
본인이 모시는 초월자가 강림할 신체, 그게 바로 나를 갈구하던 이유였다.
“하기야 나 같은 F급 헌터를 또 어디서 찾겠어.”
“제안에 대한 답은?”
“근데 듣자 하니 네 망상 속엔 이나은 헌터의 자리는 없는 것 같은데. 이나은 헌터는 왜 함께 오라고 한 거야?”
대답을 회피하자 귓가에 뜨거운 바람이 느껴졌다. 강이란이 한숨을 쉬며 뒤로 물러난 탓이었다.
“이제 질문은 내가 던질 차례일 텐데? 자기는 F급 헌터면서 어떻게 ‘레비아탄’을 쓰러뜨린 거지?”
“그걸 어떻게?”
“들었어.”
배신자가 알려준 건가.
“‘레비아탄’을 쓰러뜨린 방법은 단순해. 칼로 찌르고 살집을 물어뜯었어. 괴수는 나에게 식재료일 뿐이거든. 그게 다야.”
솔직하게 말하지 않아 죽임을 당했던 기억을 되짚으며 진실을 말하자 강이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술회관에서 S급 괴수를 눈앞에 두고도 죽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구나.”
“다시 내 차례지? 이나은 헌터는 왜 데리고 오라고 한 거야?”
“그건 이나은 헌터와 전속 계약 맺은 초월자님 때문이야.”
이나은과 전속 계약 맺은 초월자라면 ‘허영의 사내’. 근데 강이란과 전속 계약 맺은 초월자는 ‘피의 살육자’일 텐데, 무슨 연관이 있지?
“의외네. 자기라면 내가 자기의 행보를 알고 있던 이유부터 물을지 알았는데.”
“정보를 흘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어.”
“자기 일행 중 누가 배신자일지는 궁금하지 않나 보네?”
배신자 후보는 주경기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와 함께 다녔던 일행인 김화영, 송태섭, 이나은, 임수연 이렇게 넷이다. 그중 송태섭과 이나은은 지난번 강이란과의 싸움에서 죽음을 맞이했으니 배신자 후보에서 제외. 김화영은 스킬을 써서 지원군을 데려와 줬으니 배신자 후보에서 제외된다.
남은 건 수연이뿐인데, 수연이는 강남역에 있으니 지금 당장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배신자가 있다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거든. 널 여기서 쓰러뜨리면 되는 거니까.”
“그 말은 내 제안은 거부하겠다는 거지? 자신만만하네. 역시 자기 준비해둔 게 있구나.”
“아니. 지금부터 준비하러 갈 거야.”
“뭐?”
강이란에게서 알아내고 싶었던 정보는 모두 얻었다. 그가 나와 이나은만큼은 죽이지 않을 걸 알았으니, 이제 이 점을 이용해서 강이란을 구덩이에 빠뜨릴 방법을 짜면 된다.
“‘퀴네에’”
‘특급 냉장고’에서 꺼낸 ‘퀴네에’를 써 모습을 감춘 뒤, 연구동 쪽으로 달려갔다. 내가 도착하고 시간이 얼마나 흘러야 실험실이 폭파되는지 확인하려면 소장실로 가야 했다.
연구원들이 쉬고 있는 방들이 늘어선 통로를 지나쳐 군인들이 모여 화투 치는 방까지 지나고 나니 마침내 소장실로 이어진 통로가 나왔다.
“뭐야?”
그런데 예상에서 벗어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장실에서 자폭 장치 가동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최정규가 통로에 쓰러져 있던 것이다.
몸통을 관통한 두 자루의 칼을 보면 그가 살아 있을 거라고 기대하긴 힘들었다.
“소장이 아니면 대체 누가?”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하니 역시나 그는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한쪽 눈이 뽑혀 있었다.
“눈?”
시체를 더 살피려는데,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관리자 권한에 따라 공덕 실험실이 곧 폭파됩니다.’
‘실험실 내에 남아 계신 분들은 서둘러 밖으로 대피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실험실은 1분 뒤 자동으로 폭파됩니다.’
눈앞에 최정규가 죽어 있음에도 들린 안내 방송. 그에 당황하고 있다가 황급히 소장실로 달려갔다. 문고리를 여러 번 돌렸으나,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몸으로 부딪쳤음에도 무거운 물체로 문을 막아놓은 듯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1분 동안 문을 열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했으나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최종적으로 공덕 실험실 폭파가 승인되었습니다.’
‘공덕 실험실이 폭파됩니다.’
[죽음의 경계로 이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