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독사지옥(8)]
「어이없군. 이번에도 지난번과 똑같이 압사하다니.」
정신이 들자마자 ‘크로노스’의 비꼬는 말이 들리는 걸 보니, 죽어서 죽음의 경계로 왔나 보다.
「그런 방식으로 죽는 걸 선호하는 건가?」
“시끄러워.”
초월자는 뭐가 웃긴지 웃음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귀를 틀어막아도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그의 웃음소리에 결국 소리를 차단하는 건 포기하고 생각이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번 죽음으로 얻게 된 정보는 총 세 가지.
우선 자폭 장치. 소장실에 있는 자폭 장치는 가동하려면 소장의 홍채를 인식해 최종 승인까지 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렇기에 일행 중 누군가 자폭 장치를 직접 가동한다는 선택지는 폐기. 우리가 손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자폭 장치가 가동될 테니, 그 이전에 강이란을 싱크홀에 빠뜨린다는 쪽으로 작전의 가닥을 잡아야겠다.
내가 얻은 다른 정보는 강이란이 나와 이나은은 함부로 죽이지 않을 거란 것이다.
“‘피의 살육자’가 강림할 육체로 사용하기 위해서란 게 꺼림칙하네.”
「꺼림칙할 수밖에. 자네의 성품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자거든. 정정하지. 보통의 인간은 그자를 받아들일 수 없을 거네.」
“어떤 점에서?”
「자네는 누군가를 죽임으로써 쾌락을 추구하나?」
“그 초월자는 그렇다는 거네.”
「그야말로 ‘피의 살육자’란 이명이 어울리는 자지.」
‘피의 살육자’는 강림하면 내 육체를 갖고 다른 헌터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다닐 초월자. 백민기가 연구 자료를 갖고 도망치게 만든 원인 제공자 중 하나였다.
그 초월자가 내 육체를 원하는 덕분에 강이란이 엔간해선 나를 죽이지 않을 거란 확신이 생겼으니 그 점을 제대로 이용해주고야 말겠다. 그러려면 확인해야 할 게 하나 더 있다.
「그게 어떤 거지?」
내가 얻은 마지막 정보는 자폭 장치를 가동한 건 소장이 아니라는 것.
「자폭 장치를 가동할 수 있는 사람은 소장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나?」
“누군가 소장을 죽인 뒤, 눈을 뽑아다가 홍채 인식을 한 거야. 그래서 최종 승인을 할 수 있었고 실험실이 폭파된 거지. 그 사람이 누구며 왜 실험실을 폭파했는지 알아봐야 해.”
자폭 장치를 가동할 방법을 정확히 아는 것으로 보아 실험실 내에서 일하는 사람이거나 회사 측 인물일 가능성이 크긴 한데, 그래도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그자가 실험실을 폭파한 이유도 중요한 건가?」
“강이란을 죽이려는 의도로 실험실을 폭파한 거였다면 좋겠지만, 나까지 함께 죽이려던 거일 수도 있으니까.”
나까지 함께 생매장하려던 의도였다면, 또 어떤 함정을 마련해두었을지 모른다.
“이번엔 소장실부터 확인해봐야겠네.”
「또 한 번 이 몸을 만날 생각인가?」
“싸워서 강이란을 쓰러뜨릴 수 없는 이상, 쓸만한 패를 여러 개 마련해둬야지. 그런데 실험실에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CONTINUE?’ 특성을 이용할 수밖에 없어.”
「싸워서 강이란을 쓰러뜨릴 수 없다? 그럴 리가. 그자도 결국엔 ‘필멸자’에 불과하다네.」
“‘불멸자’인 그쪽의 관점에서 이해할 순 없겠지만, 제한된 시간 내에 압도적인 스탯 차를 지닌 적과 싸워서 이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압도적인 스탯 차라. 이번에도 자네는 깨닫지 못했군. 다음에 나를 만났을 땐 아니길 바라네.」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
“뭐?”
“어떻게 할 거냐니까요?”
이나은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초월자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한 건지 물은 거였는데, ‘죽음의 경계’에서의 일을 알 리 없는 이나은은 내가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해 되물은 거로 받아들였나 보다.
“돌아가기 전에 예고 좀 해주지.”
초월자에게 불평을 내뱉고, 이나은에겐 예정했던 대로 하자고 말했다. 소장실을 확인하기 위해선 일행과 함께 실험실 안에 들어가야만 했다.
“알겠어요. 그럼 시간 낭비할 것 없이 바로 시작하죠.”
별안간 복부에 가해진 충격에 신음이 절로 나왔다. 지난번에 홀로 실험실로 간 바람에 예정대로 한다고 말하면 이나은에게 맞게 된다는 걸 잊고 있었다.
“신호는 보내졌어요?”
“덕분에.”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사이’ 특성과 ‘인스턴트’ 특성이 제대로 발동된 걸 본 뒤, 백민기와 이나은을 향해 말했다.
“우리도 슬슬 움직이자.”
처음 실험실로 갔을 때와 똑같은 루트를 거쳐 공중전화부스에서 나오니, 역시나 최정규가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백민기 전 소장님, 오랜만입니다.”
내가 이번에 확인할 건 저자의 사무실. 그를 위해선 방해 요소부터 제거해야 한다.
“오시는 길이 변변치 않았던 점 사과드립니다.”
“이나은 헌터, 지금이야.”
“네? 지금이라고요? 허상헌 헌터는 아직 만나지도 않았잖아요.”
“내 말 믿어줘.”
이나은은 최정규와 날 번갈아 가며 보고는 내 복부를 걷어찼다.
[‘인스턴트’ 특성이 발동됩니다.]
[3분간 민첩 스탯이 50 상승합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사이’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플레이어 ‘김화영’과 보상을 나누어 받게 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플레이어 ‘임수연’과 보상을 나누어 받게 됩니다.]
[3분간 플레이어 ‘정현’이 획득한 민첩 스탯 50 중 17 스탯이 플레이어 ‘김화영’에게 귀속됩니다.]
[3분간 플레이어 ‘정현’이 획득한 민첩 스탯 50 중 17 스탯이 플레이어 ‘임수연’에게 귀속됩니다.]
글씨가 새겨지고 나타난 나머지 일행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 강이란은 어디 있어?”
내가 김화영에게 신호를 보내기로 한 건, 강이란과 직면해서 허상헌을 넘겨받은 직후다. 그런데 허상헌은커녕 강이란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데 신호를 보냈으니 나 같아도 저렇게 의아할 것 같다.
“상황이 바뀌었어. 지금은 저 셋부터 쓰러뜨려야 해.”
이화는 대화를 이어가려다 군인이 우리 쪽으로 총을 겨누는 것을 보더니 일단 알겠다며 우산을 들었다. 김화영과 송태섭, 한성수도 마찬가지로 적부터 쓰러뜨리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전투에 돌입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송태섭과 한성수는 군인에게 곧장 달려들었다. 근접전에서 총은 무용지물. 군인들도 그 사실을 알았는지 총 끝에 달린 검으로 맞대응했다.
한편, 소장은 겁에 질렸는지 도망치려다 김화영이 던진 단검에 다리를 찔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군인들이 얼마나 강할지는 몰랐는데, 일행을 상대로 쩔쩔매고 있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곳의 상황이 정리되기 전에 전투에 참여하려는 이나은을 불렀다.
“이나은 헌터, 저 셋 쓰러뜨리면 곧 강이란이 여기로 올 거야.”
“그러겠죠.”
“내가 ‘퀴네에’를 쓰고 허상헌 헌터를 구해올 테니, 넌 그동안 다른 사람들 이끌고 강이란을 맡아줘.”
“작전은 그게 아니…. 알겠어요.”
“만약에 강이란을 쓰러뜨릴 수 없을 것 같다면 공중전화부스를 타고 도망쳐.”
“정현 헌터는요?”
“난 ‘퀴네에’가 있어서 괜찮아.”
“됐고, 강이란 여기서 쓰러뜨릴게요. 그럼 되는 거잖아요. 어서 가보세요.”
강이란은 이제 여기에 발이 묶일 거다. 방해 요소를 제거했으니 맘 편히 소장실로 가봐도 될 것 같다.
‘퀴네에’를 쓰고 전투 중인 일행을 지나 통로로 나서니 방송이 나왔다.
‘현재 출입구 쪽에 침입자가 있습니다. 모든 실험 및 연구를 중단하고, 각자의 방으로 이동하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현재 출입구 쪽에 침입자가 있습니다. 모든 실험 및 연구를 중단하고, 각자의 방으로 이동하길 바랍니다.’
방송을 들으며 세 갈래 길을 향해 뛰어가는데, 소대급 규모의 군인 한 무리가 내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
“전에는 개입하지 않더니만. 돌발 상황이라 투입된 건가?”
통로 구석에 서서 그들이 지나가길 기다리는데, 제일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강이란과 마주했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걸 보니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아 기분이 언짢은 듯하다.
‘퀴네에’를 쓰고 있었음에도 그가 근처에 있다는 압박감에 절로 걸음을 멈추고 숨을 참게 되었다.
“어라?”
그런데 내 옆을 지나던 강이란이 별안간 걸음을 멈추었다.
“자기, 혹시 이 근처에 있는 거야?”
그러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게 이렇게 될 리가 없는데?”
강이란이 의아하다며 바라보고 있는 건 본인의 상태창. 자세한 내용까진 볼 수 없지만 저 상태창에 적힌 어떠한 내용 때문에 내 존재를 인식한 것 같다.
정확한 내 위치까지는 모르는 듯 강이란은 주변을 더듬기만 했다. 그래도 여기에 가만히 멈추어 있다간 강이란에게 붙잡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가까스로 발을 뗐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어갔다.
거리가 벌어지자 강이란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뭔가 잘못되었다면서 다시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뭐였던 거지?”
의문이 들었으나 멈추어 설 때는 아니었다.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 실험동 로비로 향했다.
“저번엔 문이 잠겨 있었으니, 캐비닛을 이용해서 소장실로 가면 되겠지.”
캐비닛에 달린 숫자 패드에 0000을 입력하니 문이 열렸다.
“참 단순하네.”
캐비닛 안에 손을 뻗자 몸 전체가 빨려 들어가더니 문이 닫혔다. 이후 세상이 빙빙 도는 걸 경험하고 다시 문이 열렸을 땐 조그마한 사무실이 나왔다.
“그대가 주신 소중한 생명의 목숨을 오늘 거두려고 합니다.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니 부디 용서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책상 하나와 그 위에 놓인 컴퓨터가 전부인 이곳. 바닥에 무릎 꿇은 채 기도하고 있는 남성과 훈장이 잔뜩 달린 군복을 입은 남성이 있었다.
군인은 기도하는 사람이 언짢았는지 혀를 차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니 벽면이 전부 CCTV 화면으로 도배되어 실험실 내의 상황을 완벽히 보여주고 있었다.
“제어실뿐만 아니라 여기에도 CCTV 화면이 있었구나.”
캐비닛에서 나와 CCTV 화면을 둘러보는데 별안간 철제문을 쾅 치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난 곳을 보니 군인이 캐비닛 문을 거칠게 닫고 있었다.
“뭐야? 아무도 없는데 이 문이 갑자기 왜 열린 거야?”
군인이 별 뜻 없이 던진 말에 기도하던 남성이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바로 신의 뜻입니다!”
“신의 뜻?”
“신이시여. 제 뜻이 올바르다는 계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도 있지 않은 캐비닛 문을 열어 계시를 주시다니, 제 기도가 통한 거군요. 장교님, 이제 시간이 되었습니다. 소장님을 데려와 실험실 폭파를 준비하도록 하죠. 구원을 거부하려는 인사과장님과 함께 정현 세력 헌터들을 몰살할 시간입니다! 아아- 불쌍한 생명, 제가 여기서 구원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