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09화 (110/168)

[17. 독사지옥(10)]

큰소리 뻥뻥 치긴 했는데 인정할 수밖에 없다. 초월자가 준 힌트를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그의 말에 조금만 더 집중했더라면 쓸데없는 죽음을 줄이고 강이란을 붙잡을 수 있었을 거다.

“이러면 작전 과장하고 대주교한테 고마워해야 하나?”

“네?”

작전 과장과 대주교에게 품은 의문을 말하고 있었기에 강이란을 쓰러뜨릴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초월자가 강림하더라도 강이란을 죽일 수 없을 거라던 대주교. 그리고 지옥의 존재마저 쓰러뜨린 강이란의 단검에 베였음에도 큰 상처를 입지 않은 작전 과장.

의문을 이야기하다 불현듯 떠오른 것들이 시발점이 되어 지금껏 놓치고 있던 여러 가지 요소가 하나씩 끼워 맞춰졌고, 결국 강이란을 쓰러뜨릴 방법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저기요, 정현 헌터?”

다만, 초월자가 준 힌트를 제대로 파악했는지 알아보려면 강이란의 스킬 혹 고유 능력에 관해 정확히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그와 단둘이 있을 시간을 한 번 더 마련해야 한다.

“어?”

“어떻게 할 거냐니까요?”

본인의 말을 무시하는 게 답답했는지 이나은은 내 몸을 세게 흔들고 있었다. 덕분에 ‘죽음의 경계’에서 빠져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돌아온 시점은 당연하게도 작전의 실행 여부를 정할 때. 일행을 데리고 실험실로 갈지 말지를 정할 분기점이다.

지금 내가 우선해야 할 건 실험실 폭파를 막으면서 강이란과 단둘이 마주하는 것. 나 홀로 실험실 폭파까지 막을 순 없는 노릇이니 일단 일행을 데리고 실험실로 가는 게 맞다.

“예정했던 대로 하자.”

“알겠어요. 그럼 시간 낭비할 것 없이 바로 시작하죠.”

몇 번인지 모를 이나은의 기습적인 공격에 절로 헛기침이 나왔다.

“…신호를 보낼 다른 방법을 찾긴 찾아야겠네.”

“어서 오세요.”

실험실로 가서 어떻게 할지 다시 계획을 세우다 보니 어느새 공중전화부스가 있는 공간에 도착했다.

“인사과장님께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우리를 그쪽으로 데려가….”

이나은이 수화기를 붙잡았을 때, 전화는 끊긴 후였다. 이나은은 규칙적인 신호음이 울리는 수화기를 신경질적으로 던진 뒤, 내게 물었다.

“기다린다고만 하고 끊어버렸네. 이젠 어떻게 하죠?”

바닥에 놓인 전화카드를 이용하면 실험실로 갈 수 있긴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허리를 굽혀 전화카드를 은근슬쩍 주머니에 찔러넣고 화제를 돌렸다.

“혹시 실험실에 자폭 장치 같은 게 있나요?”

“그걸 어떻게 알았나?”

“혹시나 해서요.”

“네 생각대로다. 각 실험실의 소장실엔 자폭 장치가 있다.”

“그러면 저희가 실험실에 들어갔을 때, 소장이 자폭 장치를 가동할 수도 있겠네요?”

백민기는 잠깐 턱을 문지르더니 답했다.

“자폭 장치를 가동하고 1분 뒤. 연구소장이 홍채를 인식해서 자폭 장치 가동을 최종 승인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폭 장치는 가동되지 않는다.”

“자폭 장치가 가동되면 연구소장은 무조건 죽는다는 거죠?”

“그렇다. 그런데 지금 연구소장은 그럴 위인이 못 된다. 본인 생명을 최우선으로 할 사람이니 자폭 장치를 가동할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의도했던 대로 대화의 방향이 잡혀 준비해둔 물음을 던졌다.

“그럼 저희가 그걸 이용해서 인질극을 펼치는 건 어때요?”

“인질극이요?”

“어. 소장을 붙잡은 다음, 허상헌 헌터를 우리 쪽으로 넘겨주지 않는다면 자폭 장치를 가동하겠다고 협박하는 거지.”

“어차피 저희가 자폭 장치를 가동하지 못할 걸 강이란도 알지 않을까요?”

“그래서 너의 단독행동인 것처럼 꾸미는 거야.”

인질극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자 이나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무래도 제멋대로 움직이는 본인을 이용한 작전인 점이 불만인 듯하다.

“핵심은 중간에 소장을 기절시킨 다음 어디 숨겨 놓으라는 거네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요?”

“강이란, 그 정신 나간 놈이 소장 눈을 뽑아서 자폭 장치를 가동한 다음에 초월자님께 부탁해서 순간 이동으로 도망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 자식도 소장을 이용하지 못하게 만들자는 거죠?”

“맞아.”

“알겠어요. 근데 실험실로 들어갈 수는 있는 거예요?”

이나은의 질문에 전화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거 바닥에 있던데, 여기 꽂으면 되는 거죠?”

백민기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전화카드를 넣었다. 카드를 넣자 공중전화부스의 문이 닫히고 주변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벌써 여러 번 겪는 건데 아직도 멀미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실험실에 도착하고 부스 문이 열렸을 땐, 토가 목구멍 위로 올라오지 않도록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백민기 전 소장님, 오랜만입니다.”

“뭐라고요? 이대로 협상하자고요? 저희 여기 온 이유 잊었어요? 강이란, 그놈 잡으러 온 거잖아요!”

우리를 반기는 최정규의 말은 무시하고 이나은이 공중전화부스 벽을 치며 화를 냈다. 도착하자마자 화를 내는 그녀의 모습에 최정규와 군인 둘은 무슨 상황인지 지켜보기로 마음먹은 듯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아무리 맺힌 게 많다지만, 냉정히 판단해서 지금 강이란과 싸운다고 좋을 게 하나도 없잖아.”

“없긴 뭐가 없어요. 그 자식 쓰러뜨려야 저 대신 죽은 사람들이 편하게 눈 감을 수 있다고요.”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그 입 다무세요.”

이나은이 복부를 강하게 후려 찼다. 아까 맞은 데를 한 번 더 맞으니 고통이 배가 되어 돌아왔다.

[‘인스턴트’ 특성이 발동됩니다.]

[3분간 민첩 스탯이 50 상승합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사이’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플레이어 ‘김화영’과 보상을 나누어 받게 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플레이어 ‘임수연’과 보상을 나누어 받게 됩니다.]

[3분간 플레이어 ‘정현’이 획득한 민첩 스탯 50 중 17 스탯이 플레이어 ‘김화영’에게 귀속됩니다.]

[3분간 플레이어 ‘정현’이 획득한 민첩 스탯 50 중 17 스탯이 플레이어 ‘임수연’에게 귀속됩니다.]

“그렇게 무서우면 제가 그 자식 쓰러뜨릴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세요.”

그 말을 남기고 이나은은 당황한 채 서 있는 군인들을 향해 달려갔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겨루기 준비’ 상태가 됩니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돌려차기’ 기술에 성공하였습니다.]

[2점 득점으로, ‘힘’이 2.5배 적용된 피해를 입힙니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뒤후리기’ 기술에 성공하였습니다.]

[2점 득점으로, ‘힘’이 2.5배 적용된 피해를 입힙니다.]

사전에 정했던 대로 이나은은 발차기 두 방으로 순식간에 군인 둘을 쓰러뜨리고, 홀로 남은 소장의 뒷덜미를 붙잡은 채 질질 끌고 통로로 나섰다.

이나은이 모습을 감출 때쯤 방송이 나왔다.

‘현재 출입구 쪽에 침입자가 있습니다. 모든 실험 및 연구를 중단하고, 각자의 방으로 이동하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현재 출입구 쪽에 침입자가 있습니다. 모든 실험 및 연구를 중단하고, 각자의 방으로 이동하길 바랍니다.’

방송이 끝나니 옆에서 이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강이란은 어디 있어? 나은이는 왜 갑자기 뛰쳐나간 거고?”

신호를 받고 왔는데 예상과 다른 상황이 펼쳐져 당황한 듯 일행은 다 같이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 이나은 헌터를 쫓아야 해! 혼자 강이란을 잡겠다고 뛰쳐나갔어.”

“뭐? 어느 쪽으로 갔는지는 알아?”

“소장실 쪽으로 갔어.”

이화는 어리둥절하면서도 더 묻지 않고 통로로 나섰다. 이화가 황급히 뛰쳐나가는 걸 본 뒤, 그녀를 쫓아가려는 다른 인원들에게 외쳤다.

“다른 분들은 작전대로 움직여야 해요!”

“현아, 작전은 이미 완전히 망한 거 아니야?”

“아니에요. 이나은 헌터랑 이화가 강이란을 쓰러뜨려만 준다면 작전엔 지장 없어요.”

“그런가? 그럼 난 나은이랑 이화 따라가지 말고 전력실로 가?”

“네. 지금 바로 백민기 헌터랑 함께 움직여주세요.”

백민기에게 눈짓하자 그 역시 알겠다고 말했다. 아까 공중전화부스에서 이야기한 것과 다르게 행동하고 있음에도 그는 눈치껏 김화영과 함께 밖으로 이동해줬다.

“전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한성수 헌터랑 송태섭 헌터는 이곳을 지켜주세요. 침입자가 있음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으니 곧 적들이 몰려올 거예요. 두 분이 여기를 지켜줘야 저희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이곳을 지키겠습니다.”

“직접 강이란과 결판내지 못한다는 건 아쉽긴 한데, 네 판단대로 하는 게 맞겠지. 넌 제어실로 가는 건가?”

“그러려고요. 제어실로 가서 실험체들을 모두 풀어줘야죠.”

“그럼 여긴 우리에게 맡기고 어서 가.”

송태섭과 한성수가 각자의 무기를 장비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니 군인 한 무리가 총을 겨눈 채 뛰어오고 있었다.

다시 한번 부탁한다고 말한 뒤 ‘퀴네에’를 썼다.

신기를 써 모습을 감춘 채 전투에 막 돌입한 인원들을 피해 통로로 향했다. 그리고 곧장 제어실 쪽으로 뛰어갔다.

격리실과 실험실을 지나 제어실에 도착하니 의자에 늘어져 있던 연구원이 전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뭐야? 누구 왔어?”

“센서에 오류가 생긴 것 같습니다.”

연구원들의 대화는 무시하고 서둘러 CCTV 화면 쪽부터 확인했다.

소장실 바로 앞의 복도. 그곳에선 작전 과장, 대주교와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이나은과 이화는 밀리지 않고 그들을 잘 상대하고 있었다.

“이러면 실험실이 폭파될 일은 없겠네.”

이나은에게 소장을 숨긴 뒤 소장실로 향하라고 했고, 그 뒤에 이화까지 붙였으니 자폭 장치에 대한 방비는 충분하다.

비록 이나은과 이화가 강이란을 이기지는 못했지만, 그건 강이란이 가진 능력이 상정 외이기 때문. 두 사람이라면 작전 과장과 대주교를 상대할 수 있을 거다. 맘에 걸리는 건 작전 과장이 지닌 고유 능력인데, 이화라면 전투 도중 그게 무엇인지 충분히 파악해내겠지.

거짓말을 섞어 두 사람이 작전 과장과 대주교를 맡게 했고, 다른 인원들은 실험동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렸으니 강이란과 단둘이 마주할 준비도 끝났다. 남은 건 그를 내 쪽으로 부르는 것.

“난 다시 눈 좀 붙일 테니까, 혹시 주변에 누구 왔다 간 건 아닌지 CCTV로 찾아봐.”

“네.”

“건성으로 대답하지 말고, 빨리 움직여!”

“그럴 필요 없어. 난 여기 있으니까.”

모든 준비를 마친 난 ‘퀴네에’를 벗고 연구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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