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10화 (111/168)

[17. 독사지옥(11)]

“네, 네, 네가 어떻게 여기에? 바,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는데…. 내가 헛것을 보는 건 아니지? 아, 참! 잡아! 당장 붙잡아! 무슨 짓 하기 전에 붙잡은 다음에…. 어…. 그래, 방송! 방송해서 인사과장님이나 소장님 불러줘.”

허공에서 나타난 날 보고 많이 놀랐는지 선임 연구원은 의자에서 자빠진 채 이런저런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에 군인 둘이 나를 향해 총을 겨눴다.

“무기는 소지하고 있지 않으니까 너무 경계하지 마.”

양손을 들어 저항할 의사가 없음을 밝힌 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봤다. 다행히 연구원들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었다.

“어떻게 방송하면 될까요?”

“내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알려줘야 해? 알아서 해! 아, 그건 꼭 덧붙여. 내가 제어실로 숨어든 침입자를 붙잡았다고.”

“네, 알겠습니다.”

후임 연구원은 한숨을 내쉬더니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현재 남기석 헌터가 제어실에 침입자를 붙잡아두었습니다.”

“잠깐만. 침입자 이름이 그…. 뭐냐? 너 이름이 뭐야? 인사과장님께서 뭔 일이 있어도 너만큼은 생포하라 했는데.”

“정현.”

“맞다. 정현. 침입자 이름이 정현 헌터인 것도 같이 방송해.”

“침입자 이름은 정현. 인사과장님 혹 소장님께서 이 방송을 들으신다면 제어실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현재 남기석 헌터가 제어실에 침입자를 붙잡아두었습니다. 침입자 이름은 정현. 인사과장님 혹 소장님께서 이 방송을 들으신다면 제어실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후임 연구원이 방송을 마치자 선임 연구원은 마음이 놓인 듯 다시 의자에 드러누웠다.

“군바리 둘. 붙잡은 놈 도망 못 가게 잘 감시하고 있어. 넌 CCTV 보다가 인사과장님이든 소장님이든 누구 오시는 게 보이면 바로 나 깨우고.”

선임 연구원이 잠에 빠지자 후임 연구원은 지난번처럼 중지를 들어 올리곤 CCTV 화면이 설치된 벽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슬쩍 화면을 훑다 보니 이쪽으로 오고 있는 강이란의 모습이 보였다. 후임 연구원도 그 화면을 보았는지 서둘러 자신의 선임을 깨웠다.

제어실 문이 열린 건 선임 연구원이 깨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강이란이 들어오자 군인들은 경례하고 연구원들은 허리 숙여 인사했다.

“자기, 정말 여기 있었구나. 출입구 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헛걸음할 뻔했네.”

“제가 직접 붙잡았습니다!”

선임 연구원 말은 무시한 채 강이란은 곧장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는 머리를 갸웃하더니 후임 연구원에게 지시했다.

“아직 쉬고 있는 작전과 쪽 군인들한테 가서 출입구를 사수하라고 해. 태섭이를 쓰러뜨리려면 지금 인원으로는 부족할 거야.”

“작전 과장님과 대주교님 쪽은 괜찮겠습니까?”

“그 두 사람은 왜?”

강이란은 연구원이 가리킨 CCTV 화면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나 몰래 여기 기어들어 왔다가 자기 동료들하고 싸우고 있구나. 됐어, 저대로 놔둬. 저러다 죽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해. 시간 없으니까 빨리 나가봐.”

“방송으로 말고 직접 가서 이야기 전달하면 되겠습니까?”

“두 번 말하기엔 입 아픈데?”

“죄송합니다.”

강이란이 단검을 허공에 휘둘러 보이자 후임 연구원은 헐레벌떡 제어실 밖으로 나갔다.

“이러면 자기 일행이 자기 구한다고 제어실 쪽으로 올 일은 없겠네.”

“훌륭하십니다.”

“눈에 눈곱은 떼고 말하지? 소장은 근무 시간에 자는 연구원, 별로 좋아하지 않을걸? 소장한테 죽기 전에 내가 대신 죽여줄게.”

단검을 던져 선임 연구원의 숨통을 끊은 강이란은 별안간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런데 자기 무슨 생각이야? 실험실로 일행을 데려와 놓고 왜 여기서 붙잡힌 거지?”

“그쪽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거든.”

“하고 싶은 이야기?”

제어실로 강이란을 부르는 건 성공했으니 남은 건 실험동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제거하는 것. 연구원 둘은 강이란이 알아서 제거해줬으니 이젠 군인 둘을 제거할 차례다.

“전속 계약.”

“응?”

“진명. 마지막으로 모든 스탯이 0인 헌터.”

“자기, 아무런 대책 없이 붙잡힌 게 아니었구나. 강림에 관해선 백민기 헌터한테 들은 거지?”

“맞아.”

강이란은 이야기를 들어줄 마음이 생겼는지 내 목을 겨눈 단검을 치워주었다.

“난 그쪽이 할 제안을 들어줄 용의가 있어서 여기에 혼자 온 거야.”

“그러면 자기 일행은 실험실에서 뭘 하는 거지?”

“우리 대화를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으면 했거든. 그래서 일행을 속여 작전 과장과 대주교랑 싸우도록 만들었는데, 맘에 안 드는 모양이네? 나랑 단둘이 이야기할 용의가 그쪽은 없는 거야?”

강이란이 원하는 건 내 몸에 본인이 모시는 초월자가 강림할 수 있도록 하는 거다. 그를 먼저 언급하면서 미끼를 던지니, 강이란은 덥석 물어 주었다.

“자기 말은 내 제안을 들어줄 용의가 있다는 거네. 자기, 난 거짓말 싫어하는 거 잘 알고 있지?”

“너무 잘 알고 있지.”

F급 헌터가 아니라는 거짓말 때문에 몇 번이나 죽었는데 모를 수가 없다.

“좋아.”

강이란은 미친 듯이 웃더니 소매에서 단검 한 자루를 더 꺼냈다.

“단둘이서 대화해보자고.”

단검이 군인의 목에 꽂히고 원했던 대로 제어실에는 나와 강이란만이 남게 되었다.

“자! 자기가 바랐던 대로 이제 단둘이 남았어.”

“아니지. 아직 실험동엔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이 있잖아.”

기지개를 켜며 뒷걸음질 치다가 선임 연구원 자리에 놓인 스위치를 당겼다. 백민기한테 들었던 격리실 개방 장치를 작동하자 밖에서 철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어차피 공덕 실험실에서의 실험은 끝난 거 아니야? 그쪽한테 필요한 사람도 여기 와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냥 보내주자고. 싫다면 나도 그쪽 제안을 들어주지 않을 수밖에.”

“자기, 나한테 조건을 제시하는 거야?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자기는 나한테 조건을 제시할 처지가 아니야.”

“그래? 혼란이 퍼진 세상에 필요한 건 나 아니었나? 그쪽이 모시는 초월자님이 강림할 몸이 여기 있는데, 이 정도 조건도 들어주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지.”

‘특급 냉장고’에서 궁중 식도를 꺼내 내 목에 겨누니 강이란은 난감한 듯 말문이 막혔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군인 목에 꽂힌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 탓에 완전히 베여 떨어진 군인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차며,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다.

“고마워. 그럼 잠시 실례할게.”

어차피 초월자가 내 몸을 원하는 이상 강이란은 날 죽이지 못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 여유를 갖고 움직였다.

“방송은 이걸로 하면 되나?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땅에 떨어진 마이크를 집어 테스트를 하자 다행히 바깥에서 소리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오준석 헌터를 쓰러뜨리고 실험실에 온 정성훈 헌터의 조카 정현입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의 ‘후원 미션’을 보고 알고 계셨겠지만 전 제가 제시했던 거래 조건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대답을 듣기 위해 실험실로 온 거고요.”

CCTV 쪽을 보니 격리실 밖으로 나온 헌터들이 방송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를 확인한 뒤, 숨을 가다듬고 방송을 이어나갔다.

“저와의 거래를 원하지 않는 분이 계신다면 그대로 위층으로 올라가 실험실 밖으로 도망치세요. 만약에 저와 거래할 생각이 있으시다면 위층으로 올라가서 실험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어주세요. 그동안 제가 강이란 헌터를 쓰러뜨려 주겠습니다.”

강이란을 쓰러뜨려 주겠다는 말에 격리실 밖으로 더 많은 헌터가 나왔다.

“강이란을 쓰러뜨린 이후에 실험실 밖으로 나가서 지금껏 저희를 힘들게 만든 회사 놈들을 함께 쓰러뜨리죠. 방송은 여기서 마칠게요. 지금 눈앞에 있는 강이란을 쓰러뜨려야 하거든요. 거래에 응하시든 아니시든, 휘말리지 않도록 위층으로 올라가 주세요.”

“어이없어서 듣고 있긴 했는데,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자기가 날 쓰러뜨리겠다고?”

헌터들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하는 걸 확인한 뒤, 강이란을 보니 그의 눈에 광기가 돌고 있었다. 아무래도 잔뜩 화난 것 같다.

“내 제안을 들어줄 용의가 생겼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던 거야?”

강이란의 말을 무시하고 내 목을 겨누던 식도를 고쳐 잡았다.

“거짓말에 내 말을 무시하기까지. 자기 지금 정신이 나간 거지?”

“아니. 그쪽 제안을 들어줄 용의는 지금도 있어. 물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생각이지만. 내 몸을 네가 모시는 초월자님께 넘기라고? 너 같으면 그 제안을 들어주겠냐? 그럴 바에는 그냥 널 여기서 쓰러뜨리고, 회사는 내가 알아서 무너뜨릴게.”

“F급 헌터 주제에 나에게 덤빈다고? 자기 동료들도 쓰러뜨리지 못한 나한테?”

‘레비아탄’까지 쓰러뜨릴 수 있으나 헌터와의 전투에선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 그게 바로 나다. 그러나 그런 내가 상대할 수 있는 헌터가 단 한 사람 있다.

“F급 헌터니까 너한테 덤빌 수 있는 거야.”

그건 바로 강이란.

“설마 내 비밀을 알아챈 거야?”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덤비고 있겠지?”

“내 비밀을 어떻게?”

강이란의 비밀을 알아차릴 순간은 여러 번 있었다. 그렇지만 강이란에게서 생겨난 의문을 깊게 파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에 지금껏 그의 비밀을 알아낼 수 없었다.

그에게 느낀 의문은 다음과 같다.

강이란은 어째서 작전 과장에게 큰 상처를 입히지 못했는가?

대주교는 어째서 초월자가 강림해도 강이란을 쓰러뜨릴 수 없다고 언급했는가?

강이란은 어떻게 지옥의 존재까지 쓰러뜨릴 수 있었는가?

강이란은 어째서 송태섭, 이나은, 이화와의 싸움에서 상처를 입었는가?

강이란은 어떻게 ‘레비아탄’을 쓰러뜨렸는가?

강이란은 어떻게 본인의 상태창만 보고 ‘퀴네에’를 쓴 내가 근처에 있다는 걸 인식했는가?

무엇보다.

“내가 F급 헌터인 걸 네가 알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밖에 없거든.”

“진실게임으로 알아낸 사실 말인가?”

“아니, 넌 진실게임을 하기 전부터 내가 F급 헌터임을 확신하고 있었어. 그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생각해볼 수 있는 건 너에겐 남의 상태창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그런데 넌 작전 과장의 고유 능력이 뭔지 몰랐으니까, 그런 능력은 없는 거로 봐야겠지.”

“작전 과장의 고유 능력 이야기는 뭔지 모르겠지만, 자기 말이 맞아. 내게 그런 편리한 능력은 없어.”

“그렇다면 남은 이유는 이것밖에 없어. 스킬인지 고유 능력인지 모르겠지만, 넌 주변에 있는 존재의 스탯을 가져올 수 있는 거야.”

강이란에게 상대방의 스탯을 베끼는 능력이 있다면 앞서 언급한 모든 의문이 깔끔하게 해결된다. 그리고 초월자가 직접 싸우라며 부추겼던 이유까지 설명된다.

“반은 정답.”

답을 내놓자 강이란은 흡족한 듯 손뼉을 쳤다.

“정확하게는 특정 반경 안에 있는 상대 중 원하는 상대의 스탯을 선택해서 가져올 수 있어. 그리고 베껴온 스탯을 지닌 상대와의 전투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베껴온 스탯도 배로 증가하는 고유 능력이야.”

사기적인 능력이긴 하지만, 내 앞에선 무용지물.

“배로 증가해봤자 0의 배수는 0. 큰 상관은 없어.”

“실험동의 인원을 전부 위로 올려보낸 건 그래서였구나.”

“네 자식 능력의 범위를 모르니까 일단 최대한 멀리 보낸 거지.”

“그런데 어쩌나? 자기가 꾸민 대로 내 모든 스탯이 0이 되었어도 여전히 자기 정도는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어. 난 멸망 이전부터 사람을 죽여왔는걸?”

“미안하지만, 나도 공정하게 싸울 생각은 없어. 어떻게든 네놈을 여기서 쓰러뜨리고 싶으니까 지금부턴 비겁하게 갈게. ‘퀴네에’.”

대화는 여기까지. 이제는 싸울 때다.

투구를 써 모습을 감춘 후, 강이란 쪽을 향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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